평양냉면 마니아4.0<굿 포 낫씽>(2010)은 ‘실패’의 영화다. 곧 성인이 되는 세 고등학생이 동네의 방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하는데, 그들의 방범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던 중 어느날 그들의 차가 도난당한다. 이내 그것을 찾지만, 그중 한 소년이 그 범인을 두들겨 패버려 기절시키는 바람에 도망갈 수밖에 없게 되어 그것을 되찾는 것은 실패한다. 이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꾸준히 실패한다. ‘실패’의 주제는 영화의 서사에 국한되지 않고 스타일에도 적용된다. 그는 내용이 곧 방법이라고 말하는 셈으로, 그것을 포괄한다. 인물과 내러티브를 설명하는 숏이나 대사는 희박하다. 서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인물의 신체를 유리창 등에 한 번 여과시켜 화면에 배치하는 것처럼, 무언가 고정하지 않고 ‘깊은 양의성을 띤 기호들’이 되게 하는데 그것을 해결하지는 않는다. 숏을 연쇄하는 과정에서 미야케 쇼는 빠르고 많은 숏을 연쇄하고, 점프컷을 사용하는 등 연결을 거칠게 다루어 서사의 진행 과정을 어지럽게, 실패한 것처럼 세공한다. 그 외에 서사 전개에 있어서 필요 없는 순간, 이른바 ‘데드 타임’에 그는 이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숏을 구성한다. 가능한 한 숏으로 그것을 담으려는 것이다. 주로 그것은 인물들이 단지 어딘가를 방황하고 있는 순간에 행해지며, 미야케 쇼의 그 방법론은 고집스럽다. 영화의 첫 숏에서 그들은 걷다가 점점 뛴다. 이내 카메라에서 그들은 점점 멀어진다. 여기서 카메라는 차의 적재함에 위치하여 한 개의 숏으로 장면을 전개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방범 회사의 사람들은 그 건물 앞에서 카메라를 고정하고 단체 사진을 찍고자 모인다. 그것이 작동하지 않자 그들은 허탈하게 하나 둘 자리를 뜬다. 그들이 모두 프레임 밖으로 나가자 거기 남아 있는 그것이 뒤늦게 작동된다. 이 또한 영화는 카메라를 그 자리에 고정하여 하나의 숏으로 전개한다. 많은 이들이 동의하듯이, 영화는 시간을 다루는 예술이다. 데드 타임을 제거하여 영화는 서사 매체로 변모해왔다. 미야케 쇼는 거기에 순응하지 않는다. 일전에 그는 자신의 영화가 “영원하지 않은 세계를 다룬다”고 한 바있다. 그 표상으로 자신이 설정한 세계를 전개하는 대신에 하나의 숏으로 특정 순간을 거칠게 재단하지 않고, 물리적 힘을 분산하지 않고, 카메라를 기록의 용도로 사용하여 장면을 진술하여 표층에 시간을 각인하고자 시도한다. 그것을 집약하는 장면은 인물들이 차를 탈 때다. <굿 포 낫씽>에서 탈 것은 반복된다. 그들은 차를 운전하지 못한다. 대신 자전거를 탄다. 다만 차가 눈에 의해 길에서 멈추었을 때 힘을 합쳐 그것을 밀어 운동하게 할 뿐이다. 운전을 시도하려고 하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현재적 위치다. 그들은 방범 일을 나갈 때 차의 적재함에 몸을 싣는다. 장난스럽게 한 명씩 낙오시키며 차의 꽁무니를 쫓아오게 만든다. 그중 한 소년이 낙오되지 않기 위하여 차를 타고자 한다. 그는 차의 동선을 예측하여 길을 가로지르고 눈이 소복하게 쌓인 언덕 위를 올라 그 적재함 칸에 몸을 던진다. 그 소년의 몸짓은 <셜록 2세>(1924)에서 스크린에 몸을 던져 그 세계로 들어가는 ‘버스터 키튼’을 연상케 한다. 앙드레 고드로와 톰 거닝은 초기 영화사 1907년에 D.W 그리피스의 등장으로 ‘어트랙션 양식’에서 ‘내러티브 통합 양식’으로 영화가 이행했다고 주장한다. 이 이행으로 전자가 사라졌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피스는 그것을 통합한 감독이라고 봐야한다.(그 이전에 <대열차 강도>(1903)와 같은 ‘교차 편집’을 통한 ‘서사 영화’가 있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이후 무성 영화 시기에 위대한 두 명의 광대, 버스터 키튼과 찰리 채플린이 등장하였다. 미야케 쇼는 21세기 영화가 잃어버린 그들의 영화를 전횡하는 신체적 노동, ‘신체의 미장센’의 풍취를 회복하고자 한다. 오늘날 영화에서 이러한 경향은 찾아보기 힘들며, 스타들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는데 시간을 할애한다. 그것은 끝없이 나열되는 어떤 화보, 단지 배우의 물리적 아름다움을 전시하는 이미지에 가깝다. 기능적인 숏으로만 영화가 나열된다고 말하는 것도 어딘가 어색하다. 이에 영화가 현실과 동떨어진 가짜라고 치부되며, 지금을 벗어나 ‘이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경향에 물들어졌다. 관객은 거기에 지쳐, 영화를 전보다 적게 소비하고 있다. 이는 게오르게 루카치가 말하는 실제 세계의 외관을 포착하여 세계의 소유권을 확보하려는 ‘리얼리즘’ 따위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영화가 잃어버린 것, 어트랙션과 서사의 종합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 것이다. <굿 포 낫씽>과 키튼, 채플린의 서사적 친연성은 무엇일까. 질베르토 페레스는 키튼의 영화가 “세계에 속하고 싶지만 속하지 못하는 인물”을 다루며,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에 저항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순응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 바 있다. 이는 그가 ‘유대’를 중시하기 때문으로, <제너럴>(1926)에서 그는 사랑하는 여성을 얻기 위해 전쟁 영웅이 되는 등 거기서 성공한다. 찰리 채플린의 인물은 그 반대다. 그는 ‘부랑자’를 다루며, 사회가 추한 것이라며 그 관습을 끝내 거부한다. 유일하게 사회에 편입되는 인물이 중심인 그의 영화 <황금광 시대>(1925) 조차 주인공이 부자가 되어 여인을 얻게 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다. 미야케 쇼의 <굿 포 낫씽>은 무성 영화의 그들이 바라보는 사회에 관한 시선의 대립에서 어떤 벡터를 정하지 않고, 그 경계에서 감각적으로 운동하여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려고 한다. 그들은 성인이 되기에 일을 하려고 하지만, 관습에 벗어난 ‘방범’을 행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미끄러진다. 그런 그들에게 회사는 급여를 제공한다. 사회 관습을 그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거기서 세 소년 중 한 인물은 자신이 한 일이 없다며 돈을 끝내 받지 않으려고 한다. 일을 완료하지 못했기에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러한 행위를 한 것인데, 그의 영화에서 인물은 ‘직업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일하는 아이들의 모습, 방범 회사와 몰래 거래하는 경찰의 몸짓의 대립이 그 표상이다. 거기서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다시 한번 차를 발견하여 그것을 향해 운동하는 그들은 그것을 끝내 잡지 못하고 실패한다. 그럼에도 그것을 향해 뛴다. 작고(Small), 천천히 가지만(slow), 꾸준히 나아가는(Steady) 셈이다.좋아요9댓글0
이동진 평론가
3.0
시작을 걷는 영화의 팽팽한 동력.
simple이스
3.0
간신히 제자리지만 감사함을 부르짖는 아무것도 아닐 자유.
황재윤
3.0
무라는 황량한 세계에서 유의미한 무언가를 발견해내려는 미야케 쇼의 초심을 상상해본다. ❄️ 260114 광주극장에서.
김솔한
3.5
이참에 더 콕핏도 개봉합시다
RAW
3.0
무쓸모, 무가치, 무의미한 움직임 속에 담긴 희미한 성장 3.2/5점 파도를 거니는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평양냉면 마니아
4.0
<굿 포 낫씽>(2010)은 ‘실패’의 영화다. 곧 성인이 되는 세 고등학생이 동네의 방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하는데, 그들의 방범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던 중 어느날 그들의 차가 도난당한다. 이내 그것을 찾지만, 그중 한 소년이 그 범인을 두들겨 패버려 기절시키는 바람에 도망갈 수밖에 없게 되어 그것을 되찾는 것은 실패한다. 이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꾸준히 실패한다. ‘실패’의 주제는 영화의 서사에 국한되지 않고 스타일에도 적용된다. 그는 내용이 곧 방법이라고 말하는 셈으로, 그것을 포괄한다. 인물과 내러티브를 설명하는 숏이나 대사는 희박하다. 서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인물의 신체를 유리창 등에 한 번 여과시켜 화면에 배치하는 것처럼, 무언가 고정하지 않고 ‘깊은 양의성을 띤 기호들’이 되게 하는데 그것을 해결하지는 않는다. 숏을 연쇄하는 과정에서 미야케 쇼는 빠르고 많은 숏을 연쇄하고, 점프컷을 사용하는 등 연결을 거칠게 다루어 서사의 진행 과정을 어지럽게, 실패한 것처럼 세공한다. 그 외에 서사 전개에 있어서 필요 없는 순간, 이른바 ‘데드 타임’에 그는 이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숏을 구성한다. 가능한 한 숏으로 그것을 담으려는 것이다. 주로 그것은 인물들이 단지 어딘가를 방황하고 있는 순간에 행해지며, 미야케 쇼의 그 방법론은 고집스럽다. 영화의 첫 숏에서 그들은 걷다가 점점 뛴다. 이내 카메라에서 그들은 점점 멀어진다. 여기서 카메라는 차의 적재함에 위치하여 한 개의 숏으로 장면을 전개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방범 회사의 사람들은 그 건물 앞에서 카메라를 고정하고 단체 사진을 찍고자 모인다. 그것이 작동하지 않자 그들은 허탈하게 하나 둘 자리를 뜬다. 그들이 모두 프레임 밖으로 나가자 거기 남아 있는 그것이 뒤늦게 작동된다. 이 또한 영화는 카메라를 그 자리에 고정하여 하나의 숏으로 전개한다. 많은 이들이 동의하듯이, 영화는 시간을 다루는 예술이다. 데드 타임을 제거하여 영화는 서사 매체로 변모해왔다. 미야케 쇼는 거기에 순응하지 않는다. 일전에 그는 자신의 영화가 “영원하지 않은 세계를 다룬다”고 한 바있다. 그 표상으로 자신이 설정한 세계를 전개하는 대신에 하나의 숏으로 특정 순간을 거칠게 재단하지 않고, 물리적 힘을 분산하지 않고, 카메라를 기록의 용도로 사용하여 장면을 진술하여 표층에 시간을 각인하고자 시도한다. 그것을 집약하는 장면은 인물들이 차를 탈 때다. <굿 포 낫씽>에서 탈 것은 반복된다. 그들은 차를 운전하지 못한다. 대신 자전거를 탄다. 다만 차가 눈에 의해 길에서 멈추었을 때 힘을 합쳐 그것을 밀어 운동하게 할 뿐이다. 운전을 시도하려고 하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현재적 위치다. 그들은 방범 일을 나갈 때 차의 적재함에 몸을 싣는다. 장난스럽게 한 명씩 낙오시키며 차의 꽁무니를 쫓아오게 만든다. 그중 한 소년이 낙오되지 않기 위하여 차를 타고자 한다. 그는 차의 동선을 예측하여 길을 가로지르고 눈이 소복하게 쌓인 언덕 위를 올라 그 적재함 칸에 몸을 던진다. 그 소년의 몸짓은 <셜록 2세>(1924)에서 스크린에 몸을 던져 그 세계로 들어가는 ‘버스터 키튼’을 연상케 한다. 앙드레 고드로와 톰 거닝은 초기 영화사 1907년에 D.W 그리피스의 등장으로 ‘어트랙션 양식’에서 ‘내러티브 통합 양식’으로 영화가 이행했다고 주장한다. 이 이행으로 전자가 사라졌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피스는 그것을 통합한 감독이라고 봐야한다.(그 이전에 <대열차 강도>(1903)와 같은 ‘교차 편집’을 통한 ‘서사 영화’가 있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이후 무성 영화 시기에 위대한 두 명의 광대, 버스터 키튼과 찰리 채플린이 등장하였다. 미야케 쇼는 21세기 영화가 잃어버린 그들의 영화를 전횡하는 신체적 노동, ‘신체의 미장센’의 풍취를 회복하고자 한다. 오늘날 영화에서 이러한 경향은 찾아보기 힘들며, 스타들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는데 시간을 할애한다. 그것은 끝없이 나열되는 어떤 화보, 단지 배우의 물리적 아름다움을 전시하는 이미지에 가깝다. 기능적인 숏으로만 영화가 나열된다고 말하는 것도 어딘가 어색하다. 이에 영화가 현실과 동떨어진 가짜라고 치부되며, 지금을 벗어나 ‘이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경향에 물들어졌다. 관객은 거기에 지쳐, 영화를 전보다 적게 소비하고 있다. 이는 게오르게 루카치가 말하는 실제 세계의 외관을 포착하여 세계의 소유권을 확보하려는 ‘리얼리즘’ 따위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영화가 잃어버린 것, 어트랙션과 서사의 종합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 것이다. <굿 포 낫씽>과 키튼, 채플린의 서사적 친연성은 무엇일까. 질베르토 페레스는 키튼의 영화가 “세계에 속하고 싶지만 속하지 못하는 인물”을 다루며,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에 저항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순응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 바 있다. 이는 그가 ‘유대’를 중시하기 때문으로, <제너럴>(1926)에서 그는 사랑하는 여성을 얻기 위해 전쟁 영웅이 되는 등 거기서 성공한다. 찰리 채플린의 인물은 그 반대다. 그는 ‘부랑자’를 다루며, 사회가 추한 것이라며 그 관습을 끝내 거부한다. 유일하게 사회에 편입되는 인물이 중심인 그의 영화 <황금광 시대>(1925) 조차 주인공이 부자가 되어 여인을 얻게 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다. 미야케 쇼의 <굿 포 낫씽>은 무성 영화의 그들이 바라보는 사회에 관한 시선의 대립에서 어떤 벡터를 정하지 않고, 그 경계에서 감각적으로 운동하여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려고 한다. 그들은 성인이 되기에 일을 하려고 하지만, 관습에 벗어난 ‘방범’을 행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미끄러진다. 그런 그들에게 회사는 급여를 제공한다. 사회 관습을 그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거기서 세 소년 중 한 인물은 자신이 한 일이 없다며 돈을 끝내 받지 않으려고 한다. 일을 완료하지 못했기에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러한 행위를 한 것인데, 그의 영화에서 인물은 ‘직업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일하는 아이들의 모습, 방범 회사와 몰래 거래하는 경찰의 몸짓의 대립이 그 표상이다. 거기서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다시 한번 차를 발견하여 그것을 향해 운동하는 그들은 그것을 끝내 잡지 못하고 실패한다. 그럼에도 그것을 향해 뛴다. 작고(Small), 천천히 가지만(slow), 꾸준히 나아가는(Steady) 셈이다.
Mean Han
3.0
그 의미없는 여정이 우리 모두에게 남긴 그 자국을 골똘히 되돌아보면.
류재형
이명박 닮은 애만 기억에 남는 영화 미약한 시작 미약해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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