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생명
1969 · 드라마 · 한국
1시간 13분 · 청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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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에서 작업하던 광부 김창선(장민호)은 갱도가 무너져 지하 250미터에 고립된다. 그가 외부에 구호 요청을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전화선 하나. 전화선을 통해 그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매스컴들은 이를 ‘특종’으로 다루며 연일 기사화한다. 신문 기자인 홍 기자(남궁원) 역시 이 사건을 기사화하려 하지만, 그의 선배인 서 기자(허장강)는 이 사건에 별반 관심이 없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증폭되자 신문사에서는 이들에게 취재 명령을 내리고, 홍 기자와 서기자는 탄광에 가서 취재를 한다. 결국 동료 광부들이 김창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갱도로 내려가 가까스로 김창선을 구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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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솜땅
3.5
생명의 존엄, 그리고 그 사고를 통해 말많은 사람들, 이익을 앞에둔 사람들.. 기록관리 하는 사람들.. 탄광촌의 매몰 사고를 실사화한 영화다. #19.3.30 (394)
시나문
3.5
재난 영화의 주인공은 관객이 되어야 한다.
토끼나루
3.5
1. '싸우며 건설하여 승공통일 다짐하자. 삼천만 한몸되어 분쇄하자 북괴만행.' 이만희 감독의 <생명>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좀 더 이상하게 표현할 수 있다. 영화는 시작하지 않았지만 영화가 출발했다. 신호등은 빨간불인데, 자동차는 출발했다. 오작동이라고만 이야기할 수 없는 어떤 의지가 거기에 있다. 왜곡된 의지. 2.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김기영 감독의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에서 지독히 반복되는 이 절규는 <생명>에서도 들려온다. 어떠한 수신호.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는 대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아의 갱도를 파고들어가는 절규로 위장한 구조요청. 3. <생명>은 즉각적으로 두 편의 미국영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1941, 존 포드), 그리고 무엇보다 <비장의 술수>(1951, 빌리 와일더). <시민 케인>이 세상에 등장한 그 해에 함께 개봉한 영화. 빌리 와일더가 <선셋 대로>를 찍고 나서 찍은 영화. 그리고, 이만희가 <휴일>을 찍은 이듬해에 찍은 영화. 4. <비장의 술수>가 밖에서부터 시작한 영화라면, <생명>은 안에서부터 출발한 영화다. 물론 차이는 그것만이 아니다. <비장의 술수>에서 영화는 고립된 생존자 사이를 가로막는 벽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물론 카메라는 그 벽을 넘는다. 하지만 영화는 함께 뛰어가지 못한다. '경험'의 쇼트로 들어가는 대신 '관음'의 쇼트로 물러난다. 하지만 <생명>은 '경험'의 쇼트를 제공한다. 고립된 광부와 함께 영화가 진행되고 있다. 5. 재난영화의 모럴을 제공하는 것은 재난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다. 비극의 공간 속에 벌어지는 과정과는 별개로 그 원심력 바깥에 있는 존재들이 그 사건의 '성격'을 결정짓는다. <생명>은 그런 모럴의 응시를 요구하는 영화다. <비장의 술수>가 공간을 잠시 밀어둔채 그 '바깥'의 공간이 영화의 중심에 올 수 있지 않을까 과도하리만큼 밀어붙여 보는 영화라면 <생명>은 어떤 전형성의 구조를 따르고'는' 있다. 6.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서 상승하는 엘리베이터는 '죽음'을 함께 몰고온다. 동시에 그것은 영화의 말미에 이 영화의 종언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생명>이 시작하자마자 상승하는 엘리베이터엔 어떤 이도 타고 있지 않다. 종언이 아니라 일종의 예언 같은 것. 하지만 실패한 예언. A에서 종언이라 학습한 방법이 B에선 예언처럼 시작했지만 변칙적으로 그것을 거부할 때 생기는 일. 이만희의 영화에선 종종 그런 일이 벌어진다. 7. "문제는 그를 구출하는 방법입니다." <비장의 술수>에서 구출의 방식은 토론의 주제가 되지만 결국 권력이 결정하는 방향대로 이끌려져 간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통상 아는 '권력'의 성격과는 다르게 '삐뚤어진' 권력이다. 무언가로부터 굴절된 권력. 그래서 '권력'이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욕망의 지렛대와, 어그러져 있는 굴절이 만들어질 수 밖에 없는 개인들의 특수한 욕망을 한데 묶어냈다. 하지만 <생명>은 어느 지점까지의 투명성을 제공하면서 영화가 완전한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것을 차단하고 있다. 외부에서 제공된 '목적'을 향해 '한국'영화가 걸어가는 방식. 8. 광부 김창선을 구출하기 위해 들어간 광부들은 갱도의 어디에 위치한다고 봐야 할까. '연옥'에 위치한다고 봐야 할까. 김창선과 그들이 다른 것은 그들에겐 외부의 목소리와 소통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이다. 똑같이 구멍에 들어갔지만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생존의 위계질서를 '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이 '선'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고립된 광부와 그를 구하기 위한 동료들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를 비주얼화 할 수 없기 때문에 시네마틱 센스만으로 그 거리를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이만희는 '응답하는 목소리'의 존재유무로 그것을 만들어 낸다. 즉, '소리의 리버스 쇼트'로 그 차이를 만들어 낸다. 또한 그 '전화'는 서기자와 홍기자를 탄광으로 불러내는 주문으로도 작용한다. 9. 김창선은 영화가 시작되고 13여분이 지나서야 "살려달라!"는 말을 입밖으로 낸다. 이것은 같은 탄광의 광부에게 전화가 연결되어 그에게 보내는 구조요청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독백처럼 마무리되어지며, 더 밀고나간다면 김창선의 환상처럼도 느껴진다. 이 장면을 이만희는 '신파'의 방식으로 찍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방식으로부터 벗어난다. 오히려 동료와 연결된 그 장면보다 김창선의 독백같은 외침을 더 집착적으로 연출했다. 이것은 이만희'식' 신파의 한단락일까 아니면 그것으로부터도 벗어난 무엇일까. 10. 스필버그는 <A.I.>이전에 이미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통해 21세기에게 질문했다. 어떤 '위장'을 통한 질문. 이만희 감독의 <생명>은 '20세기'에게 질문했을 뿐이지 그 질문의 성격은 같다. 물론 <생명>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계산을 포함시켜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영화를 통해서 보는 것은 '실화'가 아니라 '상황(의 연속)'이다. '기록'이 아니라 '액션(과 감정)'이다. 한 명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어가는 위태로움의 '액션'을 보면서 그 질문의 위중함을 느껴보는 것이다. 11. 한국영화에서 자주 느끼는 기적의 순간이 있다. 특히 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확인하게 되는 순간인데, '배우의 얼굴'이 어떤 '장르'가 되어서 보는 이에게 걸어오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순간이다. 결정적으로 '허장강'의 얼굴이 그러하다. <격퇴>(1956, 이강천)를 보아도, <십년세도>(1964, 임권택)를 보아도, 허장강의 얼굴은 지금까지 달려오던 영화의 진행을 정지시킨다. 아니, 정확히는 영화를 보던 이의 사고를 당황하게 만든다. 다른 곳으로 언제든지 중력탈출해버릴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선 정작 본인은 영화 바깥에서 영화 안으로 들어온 사람처럼 영화 속 온기를 체감하고 있다. 어떤 의미로는 이방인. 물론 이것이 전적으로 허장강만의 공(?)은 아니다. 그 허장강의 화면 바깥에, 신영균, 김승호, 김희갑, 신성일(등)의 얼굴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에서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그 얼굴들을 허장강이 리버스 쇼트로 받아쳐 버릴때 이질감이 탄생한다. 때론 김승호가 허장강이 없는 영화에서 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골목안 풍경>의 김지미도 어떤 이질감을 불러온다. 물론 지금도 장르에 '순응'하는 방식으로서의 훌륭한 배우들은 많다. 하지만 배우들간의 어떤 '화학작용'은 연기력을 떠나서 사라진 것 같다. 마법이 사라진 시대. 아마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파고들어가볼 시간이 있을 것 같다. / 하지만 허장강에게도 어떠한 예외의 순간이 있다. 스스로가 '예외'가 되지 못하고 영화와 함께 굳어버린 이상한 순간. 정확히 양주남 감독의 <종각>에서 그것을 느꼈다. 문정숙과 마주치는 순간, 허장강이 아니라 최남현, 김동원이 그 자리에 있었어도 다를게 없지 않았을까하는 이상한 착시현상. 물론 그럼에도 허장강의 '연기'는 훌륭했으며, <종각>은 걸작이다. 아마 <종각>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할 시간이 있을 것이다. 하여튼 영화에서 배우란 '연기'와 '얼굴' 그 사이에 있다. 그 명징하게 언어를 쏟아내는 비평가들마저도 여전히 배우란 존재와 부딪혔을땐 불투명한 언어로밖에는 배우를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때로는 로댕의 조각상을 비평하는 방식으로, 때로는 고흐의 자화상을 비평하는 방식으로 배우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절대 비평가들의 한계가 아니다. 오히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봐야한다. 혹은 그것이 '배우론'이란 블랙홀로 사람들이 빠져들어갈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벌써 몇줄째 '이만희'의 이름없이 배우들의 이야기만 하고 있다. 12. 이만희는 영화에 '소리'를 이상하게 삽입한다. 대표적으로 <귀로>가 있을 것이다. 소리를 선행시켜놓고 우리의 감각을 시험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생명>에서도 마찬가지다. 우습게도 김창선에게 울리는 전화벨소리를 그의 코골이로 착각했다. 완전히 당해버린 것이다. 처음엔 코골이로 들리던 것을 드릴소리로 의심하게 하고, 그 장면의 종착에 다다러서야 그것이 전화벨이라는 것을 알았다. 물론 이것이 허울좋은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언제든지 경제적인 쇼트의 방식으로 끊어칠 수 있는 장면의 시간을 늘여놓았다는 데서 이만희 감독의 시네마틱한 장난을 느낄 수 있었다. 13. 이만희도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혹은 의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만희 감독이 육체를 다루는 방식은 채플린의 방식처럼 뒤엉켜있기는 하지만 더 가혹하다. 이만희에게서 육체란 일그러진 영혼을 표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재료였던 것 같다. 물론 그런 방향으로 육체를 일그러트리는 감독은 적지 않다. 하지만 이만희의 영화에선 그것이 어떠한 기준없이 펼쳐져 있는 것 같다. 많은 감독들이 인물의 육체가 일그러질 때도 일정 이상의 '당위'를 필요로 하지만, 이만희는 영화로 육체를 땡겨오는 것이 아니라 그 육체로 영화를 데려간다. 그리고 좀 더 가혹하다. 육체의 '클래식'이 아니라, 육체의 '재즈'. 바흐가 아니라 쇤베르크. 계단을 수없이 고쳐도 결국 '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4. 이 영화는 '유성'영화다. 소리는 육체를 뒤따른다. 그리고 이 소리는 이 육체의 모양과 닮아있다. 하지만 '발성'은 '후시녹음'이다. / 영화에서 장소가(공간이) 가지고 있는 핍진성은 소리가 결정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오가와 신스케의 시행착오. 하지만 수많은 한국영화들은 '소리(A)'와의 결별을 '소리(B)'로 채워야만 했다. 한국영화 100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이것은 오랜 시간의 지분을 차지하는 극복대상이었다. 영화현장에 '모니터'가 존재하기 시작한 것도 한국영화에서 그렇게 오래된 전통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영화현장에서 어떤 화면이 찍히는지, 어떤 소리가 침입할지를 감각으로 상상하며 영화를 찍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건 or이 아니라 and다. 당신이 타임머신을 타고 한국의 영화감독이 되었을때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 밖에 없는 문제. 이 감각을 '단련'하지 않고서는 감독이 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던 시대. 물론 그렇기 때문에 '위대하다'라고 이야기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환경을 전제로 하지 않고 그 시대의 영화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21세기에 20세기 영화의 평이 새로 적혀져야 한다는 것과는 별개로 무언가 중요한 '감각'을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이만희 감독의 시네마틱 센스라는 것은, 당신이 태어나서 보아온 영화사 안에서의 센스이기도 하지만, 정확히는 20세기 한국영화가 끌어안았던 실패 안에서의 센스이기 때문이다. 14. "20일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 하십니까?" 재난'영화'에서 기다림의 시간이란 어떻게 연출하더라도 고립된 개인이 겪는 시간의 고통에 비례할 수 없다. 아예 <127시간>처럼 연출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여백을 채우는 방식을 '현실'에서부터 보고, 느끼고, 배웠다. 아마 당신이 즉각 떠올리는 '이미지'가, '시간'이 존재할 것이다. 부디 벌어지지 않았었기를 간청하는 사고(들). 그 기억의 파편속에서도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시간',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15. <생명>은 새롭게 만들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건, 누구도 '탄광매몰사고'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누구도 김창선의 생존'기'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재현'해야 하는데, 이미지의 레퍼런스가 존재하지 않을 때. 그러니까 이만희가, 영화가, 밀폐된 공간으로 들어가서 새로운 방식으로 동작의 패턴과 표정을 창조해야 할 때. 물론 '살인'을 본 사람만이 '살인장면'을 잘 찍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쪽은 오시마 나기사,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처럼 결국 '살인'까지 이르는 과정 혹은 '살인'으로부터 시작되는 은폐의 과정을 찍는 것이기 때문에 영화가 '공간'을 선택할 수 있지만, <생명>은 공간을 선택할 수 없는 영화다. 물론 많은 부분을 생존자의 증언에서부터 '가져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표정을 메꿔야 하는 건 오롯이 영화를 만드는 쪽의 몫이다. 무엇보다 그 동작이 취해지고 나서의 그 '여분의 시간'을 얼마만큼, 어떻게 채울 것인가의 문제. '컬러-볼륨'의 문제. 어떤 색깔의 표정을, 어떤 볼륨의 소리로 집어넣을 것인가. 그리고 동선의 문제. 육체를 어떻게 뒹굴게 만들 것인가라는 불편한 전제조건이 이 문제에 도사리고 있다. 16. 시놉시스에는 '지하 250미터'라고 적혀져 있지만, 김창선이 고립된 공간의 높이는 '지하 125미터'다. 그 밑으로 225미터를 더 내려갈 수 있으며 전체 길이는 350미터다. 즉, 김창선은 층으로 친다면 가장 아랫층에 갇힌 것은 아닌 셈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김창선이 고립된 '지하 125미터'라는 '기호'는 적지 않게 계속 언급된다. 이만희 감독은 김창선이 고립된 환경을 극적인 이유로 훨씬 과장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이만희에겐 그 '중간'에 가까운 위치라는 것이 더 무시무시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하'라는 공간을 생각할 때 추락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이만희에게 중요한 것은 '추락'이 아니라 '고립'이라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마의 계단>에서도 굳이 사고가 터지는 지점은 (애초에 계단이 그렇게 높은 곳으로 세팅되지는 않았지만) 계단의 '중간'지점에 가깝다. 즉, 장르가 호소하는 감정은 꼭 극단적인 물리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라는 어떤 창작자로서의 자신감 같은 것이 엿보인다면 너무 멀리 나간 것일까. 17. 김창선의 '환청'에 개입하는 것은 한국전쟁의 잔상이다. 물론 이것은 <귀로>에서 들은바 있다. 여기서 감안해야하는 것은, <생명>이 만들어진 1969년은 한국전쟁이 휴전한지 고작 16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는 것이다. 한국영화에서 한국전쟁은 끊임없이 개입한다. 물론 2021년의 한국영화가 한국전쟁을 이야기한다면, 그건 어떤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1969년의 한국영화에서 한국전쟁을 개입시키는 것은 '리얼리즘'이다. '역사(기록)'와 '리얼리즘'의 간극. '역사가'와 '그 시대의 영화감독' 사이의 간극. 그 시대의 영화들이 만들어내는 '증후'를 소중하게 받아들일때에만 영화가 '거대담론'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18. '구봉차집'에서의 에피소드는 <비장의 술수>로부터 '빌려온' 것이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이 시끌벅적한 무드와 차집주인의 세속적 욕망은 <생명>에선 중심으로 상승하지 못한다. 하지만 <비장의 술수>에선 거의 영화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생명>이 <비장의 술수>와 흡사한 영화라고 결론적으로 말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두가지 점을 짚고 싶다. 하나는, 차집주인(생명)과 로레인(비장의 술수)이 각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서다. 단지 조연과 주연의 차이라고 할 수 없는 세계관의 차이가 보인다. 차집주인과 로레인은 비중은 차이나지만 하고자 하는 말은 같다.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쉽지 않다. 그러던 와중에 예기치 못한 사고는 조그마한 로컬의 한동네를 시끌벅적한 사교계의 한복판처럼 만들었다. 만약 <생명>이라는 영화가 '픽션'을 기반으로 했다면 이만희는 이 지점을 파고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영화는 로컬에 갇힌 여성의 삶에 무신경하다고 섣부른 판단을 해선 안된다. 그런 주제의 영화는 한국고전영화의 카테고리 안에서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 영화들의 'PC함'을 재단하는 것과, '관심이 없었다'는 사료적 표현은 구분되어야 한다. 여기서 두번째 점을 지적하고 싶은데, 그렇다면 왜 <생명>은 <비장의 술수>처럼 빠져나가지 못했냐는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와 한국 영화 사이에 놓인 '환경'의 차이. 여기서 '자본'의 논리를 끌어오는 것은 굉장히 쉬운 방식의 해결법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나는 그 차이가 '논픽션'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1969년-대한민국-제3공화국-박정희정부 시절의 '논픽션'. 그 시대에 '실화'를 '불온'하지 않게 다루는 것. 이 무언의 강박이 <생명>이 갈 수도 있었던 복잡한 감정선의 세계를 거기서 끊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단지 <비장의 술수>가 걸작이며, <생명>이 그것을 얼마만큼 잘 베껴내는지 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생명>이 탄광 밖으로 벗어났을 때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남궁원(홍기자)의 웃음처럼, 겸연쩍게 웃으며 '픽션'의 말꼬리를 잡지 않는다. 19. "그의 의지가 끊기지 않는 한 그는 살아날 겁니다." 갱도 바깥의 누구도 김창선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는 걸 전제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재난영화이며 김창선은 스스로 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립된 갱도 안에서 (스스로)와 ()는 어떤 차이를 가지는가.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신 뿐이다. 혹은, 관객. 20. 기자(홍기자)들이 자신의 신문사에 정보를 전달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은 영화 전반부, 김창선의 외침과 닮아있다. "살아야 한다!" - "도와주세요!" 21. 김창선의 '유언'은 복제되어 '판매'된다. 기술복제시대의 유언장. 잠시 우회해보겠다. 1926년,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으로인해 영화산업이 본격적으로 활로에 들어섰던 그 해에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발매된다. 한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복제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아이덴티티를 통해 한국대중음악의 역사가 되어버린 그 이름. 강헌 선생 같은 분은 '기획살인'이라고 보고 있지만, 이 자리는 그것의 진위여부를 가리는 자리는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음'이라는 것을 자본주의가 판매하는 방식의 신파성이다. 22. "하루 밖엔 더 못 살 것 같소." 김창선의 힘빠진 목소리 뒤에 곧바로 광부 동료들의 필사적인 구출작업 쇼트가 따라붙는다. 이보다 더 좋은 연결을 찾기 힘든 편집의 감각. 그 순간, 이 영화에서 상기되지 않았던 '시간'의 촉박함이 비주얼로 표현된다. 물론 그 쇼트 자체만으로는 훌륭한 장면이라 할 수 없지만 '연결'로 그 미완을 완성한 쇼트. 23. 지금도 그렇지만, '아이의 눈물'은 한국영화에서 고결한 전통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최근의 <담보>가 그럴 것이고,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선 전통의 극점을 보여준다. 물론 반문도 가능하다. '아이의 눈물'이 어른들의 세계에서 어떤 작동의 계기로 작용한다는 것은, 결국 어른들의 세상이 실패했다는 반증아닌가. 눈물 대신에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시스템의 부재. 아이의 자리를 빼고나면 그곳엔 무엇이 남아있을까. 아직 이혜영의 나이가 8살이던 1969년. 이만희는 기어코 아이의 눈물을 찍어낸다. 이것이 구원의 기도인지, 결자해지할 수 없다는 무언의 고백인지 알 길은 없다. 24. 아이의 눈물을 보고 회심한 동료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지하로 내려간다. 그리고 5분. 김창선에게 근접해가는 동료들의 이 5분간의 진행은 아마 <생명>이라는 영화의 최고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론 <원점>도 있고, <암살자>도 있었다. 그 영화들 역시 어느 지점에서 마치 제의를 지내듯이 그 행위를 영화가 기다려준다. 하지만 역시 으뜸은 <생명>의 5분이다. 이 5분 동안 동료들은 블랙홀로 기꺼이 빨려들어간다. 갱도에 잡아먹힌다. '희생'이라는 알레고리에 대한 영화적인 대답. 죽음의 서사없이 죽음을 그려내는 방식. 25. 김창선과 동료들의 재회는 잠시, 그들은 왔던 곳을 복기하며 거슬러 오른다. 그때 이 일그러진 육체의 형체는 어떤 기묘한 아우라를 띄기 시작한다. 지옥에서부터 기어올라와 지상으로 생환하기 위한 사투. 그 과정에서 구원받는 육체. 소노 시온의 '달리기'와는 다른 방식의 구원. 또는 <프릭스>(1932, 토드 브라우닝)의 역발상. 26. 엘리베이터가 동료들과 김창선을 데리고 상승하는 순간(이 장면의 구도는 앞에서 반복된바 있다), 윤전기가 돌아가는 것 같은 착시를 보았다.
허문영 평론가 봇
이 사람은 도대체 어디까지 갔던 것일까 이만희는 그의 영화를 보면 볼수록 더 말하기 힘든 감독이다. 이 말은 한 사람의 관객이자 평자로서 내가 한 감독에게 바칠 수 있는 최상의 찬사다. 이것은 그가 만든 모든 영화가 걸작이라는 뜻은 아니다. 실은 그렇다고 말할 자격도 없다. <만추>를 제외하고도 그의 영화 50편 가운데 우리는 반도 만나지 못했다. 이만희는 이제 막 말해지기 시작했고 앞으로 더 많이, 더 맹렬하게 말해져야 할 감독이다. 그의 작품들은 아예 행방조차 알 수 없거나(<만추> <시장> <7인의 여포로> 등등), 40년의 망각을 넘어 이제 막 도착했거나(<휴일>), 일부의 소리를 잃어버려 혹은 괴상한 계몽영화로 치부돼 창고에 처박혀 있었지만(<물레방아> <생명>), 그들을 한편씩 만날 때마다 보는 사람을 전율케 한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디까지 갔던 것일까. 이만희의 영화를 볼 때 우리는 1년이면 30여편에 출연하는 배우를 불러놓고 기껏해야 2주에 한편을 촬영하며 그렇게 1년에 대여섯편을 찍어댄, 그러고서도 검열과 삭제와 금지의 지옥을 경유해야 하는 끔찍한 제작환경을 감안해 가산점을 줄 필요가 없다(이 가산점은 실은 정당한 것이지만). 이 천재가 모든 걸 극복했다는 말이 아니며 지혜롭게 타협했다는 말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 저주받을 만한 존재 조건을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여 유의미한 상처로 만들어낸다. 이만희의 영화는 그 모든 악조건과 저주와 상처를 끌어안고, 영화를 사랑한 한 사내가 영화라는 매체의 심장에 기어이 이르려는 순간들의 숨막히는 기록이다. 여기선 다만 <생명>(1969)에 관해 말하고 싶다. <생명>은, 그의 영화 가운데 단 한편만 보기를 권해야 한다면, 가장 마지막에 권하고 싶은 영화다. 이 영화가 가장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한 시간 남짓한 짧은 영화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영화의 첫머리에 이런 구호가 떠오른다. “삼천만 한몸 되어 분쇄하자 북괴만행.” 이 영화는 탄광 매몰과 광부 구출 사건을 다루고 있으므로 ‘북괴만행’과는 무관하다. 그 구호 다음에는 이것이 ‘기록영화’라고 스스로 말한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픽션이므로 이것 역시 말이 안 된다. 이런 어이없는 자막이 들어간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이만희라는 인물이 당대의 질서와 맹렬하게 대립한 자취 혹은 그로 인한 상처의 흔적으로 읽힌다. <생명>은 한몸 되어 분쇄하자고 말해놓고 한몸이 되지 않는다. 기록영화라고 말해놓고 기록하지 않는다(여기선 기록영화라는 장르가 아니라 ‘기록’이라는 말이 함축하는 리얼리스트의 계율이 중요하다). 이만희는 자기가 가장 무관심하고 가장 끌어안기 싫은 표지를 내세우고 그 안에서 완전히 반대편으로 가버린다. 이 영화에서 갱도 붕괴는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게 아니라 “무너졌다”는 외침 하나로 처리된다. 곧이어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몰려드는 기자들, 슬퍼하는 매몰 광부의 가족 등등 이런 영화가 기록해야 할 대상들은 모두 등장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영화는 그 모든 걸 무성의하게 보일 만큼 간략히 처리한다. 이만희는 정말 기록에 무관심하다. 그러나 한 장면은 자꾸 변주되면서 반복된다. 무너진 갱도에 홀로 갇혀 죽어가는 사내(장민호)의 모습. 그는 갱도에 갇혀 반쯤 실신한 상태로 꿈을 꾼다. 포성과 총소리, 비명이 환청으로 들려온다. 잠에서 깨면 좁은 갱도에는 물 떨어지는 소리만 청명하게 울려퍼진다. 이 영화는 이상하게 조용하다. 울부짖음도 분노도 환호도 없다. 그저 광부는 갇혀 죽어가고 있고 그의 가냘픈 신음 소리와 맑은 물소리가 전쟁의 기억이 만들어낸 간헐적인 환청과 함께 폐쇄공간을 채운다. <생명>이란 영화는 놀랍게도 이것이 거의 전부다(구출 과정도 매몰과 마찬가지로 얼렁뚱땅 묘사된다). <생명>은 오직 갇혀서 죽어가는 사내의 형상에 관한 영화다. 이 영화의 가장 냉혹한 대사. 신문기자(허장강)가 몰려든 사람들로 바빠진 다방 종업원에게 묻는다. “살아날 것 같은가요?” 종업원이 대답한다. “관심 없어요. 다만 빨리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가장 놀라운 순간은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다. 매몰 사건이 일어난 첫 장면에서 갱도 아래로부터 지상으로 올라가던 카메라는, 광부가 구출된 뒤에 지상에서 갱도 아래로 수직 낙하한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저 카메라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이미 무너져버린 그 갱도로 다시 가서 우리에게 뭘 보여주려는 걸까. 이 기괴한 카메라의 움직임보다 더 가혹한 절망의 영화언어를 기억해내기 힘들다. 이렇게 엉성하고 절충적인 영화에서 이처럼 숭고한 영화적 순간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믿겨지지 않는다. 나는 이만희의 모든 영화가 그런 순간을 또 어디엔가 감추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겠다. 그의 영화를 자꾸만 보고 싶다.
물에빠진물고기
2.5
현장에서 작업복 입고 험한 일하는 노동자와 사무실에서 넥타이 매고 자판 치면서 일하는 노동자의 임금과 처우에 대한 격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배운 거 없고 능력도 없으니까 그런 일 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그 정도 대우받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게 정말 맞나? 누구나 다 존중 받아야하고 생명은 소중하다고 하면서 왜 일에 대해서는 여전히 계급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걸까.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자본주의 기본 이념을 따르지 않느냐는 것이다. 목숨 내놓고 일하는 노동자가 더 가난하고 천대받는 이유가 계급말고 또 뭐가 있는가. 배우고 못 배우고를 가지고 노동 계급을 나누는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리 없다. 어느 순간 붕괴될 것이고 힘없는 노동자에게만 희생을 강요할 것이다. 언론은 기득권 편에서 기업의 뼈를 깎는 고통이란 제목으로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기사를 배설하기 바쁠 것이다.
재혁짱
4.0
고독하게 죽어가는 한 생명, 가감없이 현장을 찍어내는 카메라, 그곳에 영영 새겨질 쓸쓸한 잔상과 소탈하기 그지없는 시선. 영화에 대한 투철한 애정 없이는 탄생할 수 없을 기적과도 같은 영화, 이만희가 파내려간 심연의 굴로 다시금 내려간 카메라가 찍어낼 것은 무엇이겠는가
이원일
4.0
다양한 장르를 섭렵한 이만희 감독의 전작엔 존엄한 생명의 가치란 공통된 테제가 관통한다.
유승헌
4.5
다시 또 소름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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