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속의 모과나무
El sol del membrillo
1992 · 다큐멘터리/전기 · 스페인
2시간 13분

스페인의 화가 안토니오 로페즈는 자신의 집에 있는 모과나무를 화폭에 담고 싶어 한다. 그는 자신만의 리얼리즘 화풍도 고수하지 않고 작품을 완성하겠다는 의도도 없이 매해 가을만 되면 작업에 몰두 한다. 표면적으로 그가 작업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부서지기 쉬운 나무와 좀 더 친밀한 시간을 보내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모과열매에 비치는 한줄기 빛을 잡게 되는데...
Jay Oh
4.5
예술이라는 황금빛 과정. 온전히 담지 못하는 것들임에도 담아보려 하는 것, 숭고하다. The fruits of art are at their most golden during the journey.
다솜땅
4.0
모과나무에 깃드는 정성어린 그림 그리고 집렴! 위대한 작가는 시간까지 그려내는 듯, 이 모과나무는 주인의 사랑까지 머금는다 #22.8.1 (857)
MayDay
4.5
“변해가는 시간 아래 그려보는 예술의 가치” ‘빅토르 에리세’감독님의 영화들은 볼 때마다 유화로 그린 한 폭의 그림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햇빛 속의 모과나무>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통해 예술에 대한 가치성을 알린다. 화가의 집은 내부 공사를 하는 듯 점점 내부가 변해가는 동시에 세워놓은 모과나무가 점점 시들어 가며 떨어지는 열매 역시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정확한 각도에서 바라보기 위한 못 박음질과 수직계, 점점 익으며 고개를 숙이는 모과에 흰 물감으로 표시할 정도로 그림을 완성시키려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화가는 안다. 이 그림은 완성시킬 수 없다는 것을 관객인 우리 또한 스스로 알게 된다. 거센 비가 오고 바람도 불고 시시때때로 바뀌는 햇빛의 위치는 막을 수 없는 자연, 연속적인 시간 앞에서 비록 보이는 형태는 달라질지언정 화가가 담으려 했던 그것의 제일 아름다운 모습과 또 담으려고 했던 그 행위의 예술적 가치조차는 변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그렇기에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완성시키지 못한 똑같은 그림만을 계속 그리는 그에게 누군가들은 와서 격려의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겠나. 영화도 그림도 완성된 작품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겠으나 ‘예술’이라는 것 앞에서 만들어가는 과정을 누군가와 함께 공유하고 바라보는 것 역시 ‘예술가’가 가질 수 있는 자부심과 또 다른 가치라 생각한다. 화가는 마지막에 자신이 모델이 된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슬퍼할 필요는 없다. 혹여나 후에 그가 그 침대에 누워있지 않았더라도 그림으로 그의 모습은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과나무(=예술) 역시 그렇다. 시간이 흐르고 열매가 바닥에 떨어져 썩어가더라도 프레임안에 담아놓았기 때문에 여전히 햇빛을 받은 황금빛의 모과나무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Hoon
4.0
집을 짓고 있다. 그것은 은유로 칠한 집. 단어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따사로운 집. 서로를 식사삼아 만찬을 즐기고 있고. 햇볕은 쨍하게 내리쬔다. 서로를 꿈꾸다 서로 앓고마는. 정답고 따사로운 집. 작가는 그곳에서 한명의 불청객. 철거하는 몸짓으로 난장판을 피운다. 죽고 썩어지는 것들. 하나의 모과나무 같아. 다시금 서롤 포갠다. 터를 잃은 곳에 단 하나의 빛만 내리쬐고 있다.
주방장의 잡기술
3.0
과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지만 누군가에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
상맹
4.5
오브제가 삶에 대한 은유가 되고 그 삶이 또 다시 누군가의 오브제가 되고, 결국 마지막 영원한 꿈에 각인될 때. 시간이라는 커다란 영화의 매체적 요소이자 막을 수 없는 힘이 만들어주는 연출. 역시 에리세 감독님답게 한 편의 겸손하고 정갈한 시를 마주할 때의 기쁨.
샌드
4.5
예술 작업 과정을 담아낸 한 예술가에 대한 다큐멘터리면서, 제게는 그림과 영화란 예술이 각기 시간을 담아내는 서로 다른 방법에서 한 예술가가 다른 사람의 예술가의 모습을 담아내는 방식을 통해 두 가지의 서로 다른 특성이 교묘하게 맞물리면서 가장 아름답고 어쩌면 숭고하게까지 느껴지는 지점을 만날 수 있는 무척이나 매력적이고 걸출한 다큐멘터리 영화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있는 그대로를 담아내는 것만이 아니라 이야기를 넣거나 직접 개입하는 식으로 대상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지점도 있습니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한 사람이 걸어오는 장면과 함께 당시 날짜를 요일까지 상세히 기록한 자막도 제시합니다. 이는 이 영화가 단지 예술가에 대한 영화일 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인물과 함께 시간을 중요하게 담겠다는 것을 선언하듯 보여주는 오프닝인지라 관객이 자연스레 그를 의식하고 인지하도록 만드는 지점이 처음부터 있습니다. 그러면서 영화의 분기마다 계속 자막을 통해 날짜를 알려주면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를 직접적으로 체감하게끔 만드는데, 있는 그대로 흘러가도록 만드는 것과 함께 이렇게 편집이나 자막을 통해 감독이 직접 개입하면서 시간을 인식하도록 만드는 지점이 흥미롭습니다. 영화가 예술을 작업하는 예술가에 대한 걸 그리는 것을 통해 궁극적으론 보는 것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에 대한 지점을 말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이렇게 대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직접적인 개입을 하는 연출은, 결국 이 영화 속의 화가가 대상을 바라보는 지점과 같다는 점에서 구조로나 구상으로나 절묘한 면이 있습니다. 안토니오 로페즈가 나무를 바라보는 것과 빅토르 에리세가 안토니오 로페즈를 바라보는 것이 제게는 같아 보이는데, 그러면서도 예술이 가진 특성의 차이에서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간을 포착해야 하는 그림이라는 예술을, 한 사람의 이야기에서 오랜 시간의 흐름을 포착할 수 있다는 영화의 특성으로 보완하며 양쪽에서 모두 빛나는 지점을 만들었습니다.
혁민
3.5
완벽주의 예술가에게 떠나가는 계절이 선사하는 ‘끝‘이라는 구원. 에리세 특유의 미감은 여전하지만 <벌집의 정령>이나 <남쪽>에 비해 다소 지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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