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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이즈 어프레이드
Beau Is Afraid
2023 · 코미디/드라마/공포 · 미국, 영국, 핀란드,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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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증을 앓는 ‘보’와 그를 집착적으로 사랑하는 엄마 ‘모나’. 엄마를 무조건 만나러 가야 하는 보의 기억과 환상, 현실이 뒤섞인 공포를 경험하게 되는 기이한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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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환
5.0
"이 영화는 트루먼 쇼에 더 가깝다. 다만, 모든 사실을 깨닫고 문을 나서는 데에 끝나는 것이 아닐 뿐이다." Always be my baby. . . 영화 속 이들은 '보'가 모르는 어떠한 사실들을 알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모든 이상한 여정 시작과 끝에는 '보'의 엄마, '모나'가 있다. '모나'는 '보'에 대한 사랑이 괴이한 집착이 되었고, '보'에게 베풀었던 것만큼 돌려받길 원했다. '모나'가 원한 것은 절대, 나만의 세상이 아닌 다른 사람의 세상에서 '보'를 살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아들을 자신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모나'는 '보'를 위한 작은 세상을 구축한다. 그의 모든 것들을 통제하고 감시할 수 있는 세상. 즉, '보'는 지금껏 엄마가 만든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니 이 영화는 <트루먼 쇼>에 더 가깝다. 다만, 이 영화는 사실을 깨닫고 문을 열고 나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뿐이다. "그녀는 안다. 너의 고통, 너의 꿈, 너의 가능성까지." 보는 지나온 모든 날들을 '모나'의 계획 아래 살아왔다. 매 순간의 결정을 엄마에게 묻곤 했다. '모나'는 좋은 결정을 하라고 말한다. '모나'는 '보'가 내릴 모든 가능성, 결정들까지 모두 자기가 세뇌시켜온 대로, 본인이 조종해온 대로 움직일 것을 알고 있기에, 결국 그녀가 말한 좋은 결정들은 곧 자신의 결정대로 하길 원함을 뜻한다. 1. MW와 돌발 상황 사실 이 모든 것들은 '모나'가 계획한 것들이다. '모나'는 MW라는 회사의 ceo로 그녀는 성공한 사업가다. MW의 제품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 영화의 배급사, 나체 살인마 뉴스를 보도하던 방송사를 포함해 보의 TV속 모든 채널도 MW) 전자레인지, 그 전자레인지로 돌리는 냉동 식품들도 MW의 제품이다. 집 밖을 나서게 하지 못한 탓에 제대로 된 직업이 없지만, '보'는 엄마의 제품들 덕에 잘 살고 있었다. 아마 '모나'가 '보' 모르게 끊임없이 물자들을 배급했을 것이다. 집 앞 편의점도 MW 편의점이다. 급하게 집을 나서기 전, 깜빡하고 챙기지 못해 다시 돌아가 가져갔던 치실도 MW의 제품이다. 그 치실은 높은 빌딩의 커다란 전광판으로 광고하고 있었으며, 그 광고 모델은 욕조 앞에서 엄마와 함께 있던 꿈 속 아이, 즉 아주 어린 날의 자신의 얼굴과 같다. 그 외에도 그녀는 각각 유년 시절들을 보낸 '보'의 얼굴들을 그녀의 제품에 광고했다. 그녀는 '보'를 평생 두려움에 떨게 만들며 엄마 없인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아들로 만들었다. '보'가 지금껏 정신과 상담을 해오던 상담가 역시 '모나'와 함께 일하는 직원이었다. '보'가 소통하는 사람은 상담가와 엄마 뿐이다. 그들은 그들의 말에 '보'가 전적으로 따르게 만든다. 상담가는 '보'에게 약을 처방하며 무조건 물과 함께 마시라며 경고를 한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보'의 집 안에 있는 모든 꼭지를 틀어봐도 물은 나오지 않는다. '모나'는 '보'의 모든 순간들을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다. 모든 곳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건물만큼은 통제할 수 있었다. '모나'의 집 지하실에는 완공된 '보'의 아파트 건물의 사진과 함께 그녀의 회사 슬로건이 있었다. 물을 잠그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그 모든 집시들이 비어버린 '보'의 집에 들어가 난리쳤던 와중에도 집주인이 물을 고쳐놨다는 것도 가능했던 이유) '보'를 죽일 듯이 쫓아오던 문신 남자의 역할은 그저 '보'가 집에 들어가기까지만 쫓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보'가 현관에 들어서면 그 행위를 곧바로 멈춘 것. 동네 집시들이 그의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것은 그가 집을 비웠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를 그에게 알려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는 겨우 집을 잠굴 열쇠가 없어서 집 밖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보'가 이런 사람이 된 건, 그의 잘못이 아니다. 정신과 상담을 지속적으로 받도록 밤새 이웃의 쪽지로 시달리게 만들었을테니까. '모나'는 '보'를 그런 새장 안에 가둔 것. 살인, 자살, 시체 등 어디에나 죽음이 널려있는 새장. '모나'는 '보'가 세상을 두려워하길 원했을 것이다. 그래야만 엄마를 향한 의존도가 높아질테니. 천장에 메달려 있던 한 남자는, 동네 이웃들이 그의 집에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을 때, 제때 나오지 못했던 노숙자였다. '보'는 물론, 어쩌면 이를 기획한 감시자인 '모나'에게도 들켜선 안된다. 그래서 숨죽여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보'도 그를 보아선 안됐다. 이는 NG, 돌발 상황이니까. 집 안을 돌아다니던 거미가 천장에 매달린 이의 얼굴에 달라붙어 결국 '보'가 있던 욕조로 떨어지고 만다. (혹은 거미를 피해 올라갔을 수도 있다. 문 앞에는 목에 거미에 물려 죽은 문신남이 있었다. 영화가 거미를 등장시킨 첫 장면은 천장이 아닌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었으므로. 한편, 거미는 모성을 상징한다. 그것이 그릇된 모성의 형태던. 프로이트가 거미를 모성으로 해석한 것도, 현대 미술가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 '마망'(엄마를 뜻하는 불어)도 거대한 거미 조형물이다.) 돌발 상황은 '보'가 나체로 뛰쳐나와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것까지 이어진다. 어떻게 대처할 지 몰랐던 경찰은 '보'에게 움직이지 말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경찰 역시 엄마 '모나'가 고용한 사람일 것이다.) '보'는 결국 '그레이스'가 운전하던 차에 치인다. (이때 '그레이스'는 남편인 '로저'와 차를 몰던 것이 아니다. 조수석에 있던 사람은 시지프로 보인다. 그들은 ‘보’의 집 근처에 있는 거리에서 푸드트럭을 운영했다.) 다친 '보'는 '그레이스'와 '로저'의 저택에서 친절한 보살핌을 받는다. 엄마의 사진에 붙여진 수많은 직원 사진들 속, 문신한 남자 뿐만 아니라 '보'를 데려가 치료했던 '로저'의 사진도 있었다. '로저'도 엄마의 직원이다. 2. 그레이스 가족, 채널 78번과 전복된 장난감 보트 '그레이스'는 잠에서 깨어난 '보'에게 나체의 노인에게 칼부림을 당했다고 말해주지만, 우리는 그것이 사실인지 알 수 없다. '보'가 칼에 찔리는 장면이 플래시백으로 나오지만, 오히려 상상에 가깝다. (이 상상은 문을 제대로 잠구질 못하는 상황에서 길거리의 살인마가 집으로 들이닥치는 것을 상상하여 소파로 문을 막았던 것과 같다.) '로저'는 의사가 아닐 것이다. '보'의 상처가 벌어졌어도 괜찮을 거라며 자리를 피했을 때부터 깨달았어야 했다. '그레이스'가 의도적으로 '보'를 차에 쳤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기획 너머 돌발 상황들의 연속이었다. '모나'는 ‘로저’의 가족에게 그 책임을 물으며 ‘보’의 테스트 및 트루먼 쇼에 참여하게 된다. 교통사고를 냈지만, 이는 아들의 부재를 채워줄 운명적 계기처럼 느꼈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같은 개념으로 아들의 전장에 함께 있었던 '시지프'로 부재를 채웠었다. ('토니'가 '시지프'에게 속삭였던 말들은 '보'가 아들의 자리를 대신하려 한다는 것이었을지도.) '그레이스'는 유일하게 '보'가 진실을 깨닫게 도와주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레이스'는 트루먼 쇼에서 유일하게 진실을 알려 추방 당했던 '실비아'와도 같은 역할이다. 아들의 부재를 겪은 '그레이스'는 '보'에게 연민을 느낀다. 사실을 알려주려 하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그녀는 '보'에게 죄가 지을 짓을 그만하라는 쪽지를 주었는데, 이는 훗날 '보'에게 있을 재판을 위한 경고이기도 하다. ('보'의 트루먼 쇼에 가담한 이들은 '보'의 재판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그리고 78번 채널을 틀어보라며 이 모든 것들을 감시하고 있는 세력의 존재를 알려준다. 시간이 되감기고 일어나지도 않은 결말까지 미리 보여주는 이 채널은 아리 애스터 영화의 결정론적 특징,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 거스를 수 없는 인물의 운명이 설정되고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영화를 보다보면 감독이 건넨 힌트들을 찾아볼 수 있다. 영화의 극 초반, 장난감 보트를 갖고 노는 아이에게 엄마는 시야에 안 보일 땐 제발 말 좀 들으라며 꾸짖었고, 그 장난감 보트는 전복되었다. '토니'는 자꾸 동영상을 퍼뜨리겠며 '보'를 협박한다. '토니'가 올리려고 했던 영상은 아마 보를 내내 감시하고 있던 영상이었을 것이다. '모나'의 직원인 '로저', 그리고 '그레이스'는 '토니'에게 상황을 미리 설명했겠으나, 그녀에게 '보'는 그저 자신의 방을 침범한 이방인일 뿐이다. 죽은 오빠의 빈자리만도 못한 그녀는 모든 관심을 독차지한 '보'를 꺼내준다며 차에 태웠지만 그녀는 '보'를 멀리 데려다 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토니'가 선택한 일은 '보'를 망가뜨리는 것이었다. '토니'는 '보'에게 마약과 페인트를 권한다. '보'를 그곳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 집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건, ‘보’ 뿐만 아니라 ‘토니’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보’에게 권한 것들은 본인이 하던 것, 하려던 것이다. '토니'는 '보'에게 어쩌면 동정과 연민을 느꼈을까. 이런 '토니'의 방법들은 그녀의 의도대로는 아니었겠지만, '보'를 '모나'가 기획한 트루먼 쇼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준 셈이다. '그레이스'가 '토니'의 죽음을 발견했을 때, 그녀도 '보'가 직접적으로 죽인 것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레이스'는 '보'를 돕고 싶었지만,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채 딸이 죽었다. '보'가 그 집에 없었다면, '토니'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보’는 아들의 부재를 채우긴 커녕, 또 다른 자식의 목숨을 앗아간 악마의 존재가 된 것. 이성을 잃은 그녀는 '시지프'에게 '보'를 죽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모나'의 기획과는 전혀 다른 시나리오다. '로저'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로저'와 '그레이스'는 등장하지 않는다. 3. 테스트 '보'는 그 집으로부터 도망쳐 숲 속으로 달려간다. 그곳에서 부모로부터 버려진 집단으로 구성된 떠돌이 유랑단을 만난다. 그곳에서 연극을 보게 되는데, '보'는 그가 본 연극이 어떻게 자신의 이야기와 똑같을 수가 있냐고 생각한다. 실은 당연하게도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이야기가 맞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가족을 향해, 혹은 한 줌의 물을 마시기 위해 여정을 떠났지만, 끝내 상봉한 아들들마저 그럴 일은 일어날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보'가 가진 모든 꿈들, 가능성들은 모두 엄마 '모나'가 조종해온 대로, 새장에 갇혀 살아온 만큼,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숲 속에서 널 안다며 아버지는 죽지 않았다고 말해준 사람은 '보'의 트루먼쇼의 존재를 알고 있는 관객 중 한 명이었다. 아마도 오래전부터 '모나'와 일했던 직원이었고, 보를 속이는 기획에도 가담했던 경험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은퇴한 사람이다. 오랜만에 '보'를 만나 사실을 알려주고픈 윤리적인 갈등이 잠시 그 노인에게 있었다. 평생을 조종당하고 감시당하며 살아온 그가 진실을 깨닫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엄마의 집에 가는 것이다. ‘모나'는 오랜 세월 자신의 집에서 근무했었던 '마사'를 대신 자신의 죽음으로 꾸며내었던 것도 '보'를 위한 테스트였다. 엄마의 기획은 엄마의 집에 끝내 오지 못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들이 와주길 바라는 양가적인 마음. ‘모나’는 그 마음마저 아들의 몫으로 돌린다. (위기에 도달한 연인들이 때로는 아주 극단적인 방법들로 서로의 마음을 시험하는 것처럼.) '모나'가 이 테스트를 기획한 시점은 비행기를 놓쳤던 시점이다. (엄마를 보러 가지 못했던 날 신용카드가 정지됐던 건 우연이 아니다.) 그 날 ‘보’는 이미 오후 3시가 넘어서 일어났다. 항상 그를 지켜봤던 '모나'는 '보'가 오지 못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계획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시간을, '보'의 캐리어와 열쇠를 뺏는 것으로 벌었을 것이다. ('모나'는 아들을 케어하는 것보다 자신의 커리어에 집중하길 원했다. 그를 방해된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직원은 캐리어와 열쇠를 찾는 '보'에게 넌 이제 x됐다고 말한다.) 어떻게 할까요라는 질문부터 '모나’의 아들을 위한 테스트는 시작한다. "옳은 결정을 할 거라고 믿어." '모나'의 테스트는 내가 만든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보'가 살 수 있을까에 관한 것이다. 물론, '모나'는 그러지 않기를 줄곧 바래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른 세상이라 함은, '보'가 다른 여자,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구축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보'에게 사정을 하면 죽는 유전병이 있다는 거짓말로 한평생 그를 세뇌시켰다. 아버지는 물론, 그의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도 그렇게 죽지 않았을 것이다. ’보'가 사랑을 함으로 관계를 구축할 가장 가능성이 높았던 여자는 '일레인'이다. 어느 시점부터 '모나'의 밑에서 일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보'가 '일레인'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날 '일레인'을 배에서 내리게 만들었고, 평생을 '일레인'을 기다리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리고 자신의 직원으로 만들어 평생 '보'가 '일레인'을 만날 일이 없게끔. 사정을 하면 죽는다는 사실로 '보'를 지금껏 홀로 살게 만들었지만, 그 평생의 조종과 세뇌에도 불구하고 첫사랑 '일레인'을 이겨내지 못해 관계를 가져 마침내 첫 사정을 해버렸던 '보'는 결국 엄마의 최종 테스트를 실패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관계를 구축한 것이다. 그 모든 거짓들로 구성된 세상으로 아들을 가두었어도 '보'는 끊임없이 가족을 구성하길 원했다. 엄마는 결국 사정을 했을 때, 평생의 사랑이었던 '일레인'을 죽이게 만들어 그간의 정반대의 방법으로 바꿨다. (단지 테스트였을 뿐, 역시 일레인이 죽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혹은 거대한 메타포일까.) 4. 지금까지 내가 바랐던 아들의 삶의 종지부, 그리고 재판. '모나'는 '보'에게 평생을 도망다니고 피해다니며 살아온 겁쟁이라며 세뇌시켰지만, 자신도 모르게 '보'는 본인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관계를 가지기를 멈추지 않았다. 엄마는 평생을 심었었던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진 '보'에게 다시 다락방을 보여준다. 다락방은 어린 날들을 비롯해 지금까지 엄마에 의해 쌓아온 '보'의 트라우마로 가득찬 곳이다. 그가 아빠에 대한 의문과 호기심을 가질 때마다 다락방에 데려가 가뒀다. 족쇄를 풀지 못해 늙어가는 아버지(혹은 자기 자신), 그리고 거대한 성기 괴물(혹은 아버지)이 있다. 지금껏 엄마는 '보'에게 남성성에 대한 공포를 심어왔던 것이다. 다락방에서 내려온 '보'는 엄마에게 죄송하다며 울부짖는다. '모나'는 다시 남성성에 대한 공포심에 지배당한 나약한 아들로 돌아왔다고 믿었다. 그러나 '보'는 그 깊은 무의식에서도 끝내 엄마가 심었던 공포에 반항하며 그녀의 목을 조른다. ‘보'는 그렇게 '모나'가 심었던 모든 공포로부터 벗어났다. (엄마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보'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매번 그래왔듯. 그리고 거대한 재판장으로 간다. 트루먼 쇼를 시청하던 관객들은 트루먼의 탈출을 응원했지만, '보'의 지난날들을 지켜보던 이들은 '보'를 응원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조차, '보'가 겪고 있는 일들이 현실이 아니라며 의심했었으니까. 그러나 '보'의 재판은 무엇을 판결하기 위한 재판이었을까. '보'는 엄마를 목 졸랐던 것으로 심판을 받은 것은 아니다. '보'는 지금껏 엄마로부터 거짓으로 만들어낸 두려움의 세상에서 살았다. (때문이지 라푼젤이 떠오르기도 한다.) '보'는 항상 도망쳤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오로지 '모나'의 의견일 뿐이다. '모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즉 도망쳐왔던 '보'는 끊임없이 반항을 하고 있었다. (시야 밖으로 사라져버린 그녀의 통제권, 속옷과 관련된 행위는 엄마가 버리길 원했던 남성성) 그 모든 '모나'의 사랑과 노력(극단적인 집착)에도 불구하고 '보'는 죽음의 두려움을 무릅써서라도 관계를 만들기를 꿈꿔왔고 트라우마의 재목격에도 남성성에 대한 공포는 깨졌으며, 급기야 '모나'의 목을 조르며 죽이기까지 했다. 재판에서는 '모나'를 피해자, 신고자처럼 표현한다. 피고인은 지금껏 조종당해왔고 감시당해왔던 '보'다. ’보'는 지금껏 '모나'에게 피해를 준 나쁜 아들로 몰아간다. '보'는 두려워서 생긴 일이라며 목놓아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선고를 받은 그는 보트에 발이 붙어 나갈 수 없다. '모나'는 왜 '보'를 나쁜 아들로 몰아 넣어 그를 죽이려 하는 걸까. 그러나 내게 이 재판은 ’보'의 독립을 위한 재판처럼 보인다. 내가 바라던 아들의 죽음, 그렇게 떠나보낸 아들이 독립하는 주체로서의 재탄생처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좋던 싫던 결국 독립을 해야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특히 '모나'처럼 자식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하는 이들에게는 결코 오고 싶지 않았던 순간이다.(혹은 그 반대의 상황에서도) ‘모나'는 이 재판을 하기 싫었다. 그래서 '보'를 지금껏 이상하고도 위험한 새장에 가두려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이제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모나'는 알게 된다. '보'가 '일레인'과 관계를 가졌을 때, 그 두려움 많던 애가 자신의 목을 졸랐을 때. '모나'는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재판장에 들어선다. 아들을 더이상 내 새장 안에 가둘 순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5. 죽음은 끝일까 혹은 새로운 시작일까 아리 애스터의 장편 영화들이 그래왔듯, 이 영화 역시 아무리 몸부림쳐봐도 거부할 수 없는 족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여정과 그리고 모든 여정을 계획한 거대한 존재(플래너, 절대자)가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미지의 공포와 알고 있지만 피할 수 없음을 깨닫는 허무의 공포들은 오히려 어렸을 때보다 머리가 더 큰 어른이 되어 더 와닿는 것들이었다. 우리는 매번 바꿔보려 하고, 도망치려고 하지만 끝내 벗어나지 못한 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며 아리 애스터의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이를 세 번이나 반복하니 그제서야 깨닫는 것이 있다면, 당신이 느끼는 모든 두려움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럼 두려울 게 없어질 거라면서. (지난 두 편의 느낌과는 결이 완전히 달랐다. 정말이지 이번만큼은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했다. 왜냐면, '보'는 아리 애스터 영화의 처음으로 절대자가 계획한 운명을 바꾼 사람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의심하고 질타했던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내게 심어진 이 공포가 누구, 무엇에 의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 공포를 완전히 벗어나진 못 하겠다는 진실을 마주하는 것. '보'의 재판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만일 '보'의 재판을 독립을 위한 재판과도 같다면, 우리의 독립 역시 공포로부터의 자립하는 순간부터 이뤄진다는 뜻이겠다. 두려움으로 만들어진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했을 때, 이 지독한 트루먼 쇼를 벗어나기 위해선 공포를 인정하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보'는 이미 그 공포를 받아들인 적이 있다. '일레인'과 관계를 가졌을 때처럼. '보'는 더이상 살려달라는 말을 멈춘다. 그저 받아들인 것. 인생에서 가장 큰 두려움인 죽음을. 그렇게 거짓된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엄마로부터 벗어난 그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 독립했을 거라는 결론을 내리며 나의 해석을 마무리하겠다. 다행이라면, 영화 속 몇몇 죽음은 실은 죽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머리에 샹들리에를 꽂힌 채 죽었다는 엄마나, 사정한 동시에 죽었다던 아빠처럼, 애초에 인물의 죽음을 목격해도 다시금 살아 돌아오는 이들(시지프까지) 덕에 곧대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어려워 보인다. 페인트를 마셨던 '토니'도, '일레인'도, '마사'도 모두 죽지 않았길 바란다. 이 모두 자신의 아들을 위해 꾸며낸 '모나'의 거짓이었다고 생각하련다. 그러니, 이를 최후의 심판이 아닌 독립을 위한 재판으로 본다면 '보'도 마찬가지로 죽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태어났을 때의 울음이 영화의 마지막 다시금 들리는 것의 의미를 단순한 수미상관의 구조 때문이 아닌, '보'는 그제서야 다시 태어났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하니까. 두려움을 받아들여 세상의 문을 나선 '보'의 모습을 본 관객들은 그제야 하나둘씩 재판장, 영화관 밖을 나선다. 저마다 받아들이기를 다르게 할 테지만 모든 두려움들을 극복하지 못한 '보'의 허무함보다는, 새롭게 진실한 세상을 마주하는 첫걸음으로 받아들이겠다. 많은 이들에게 이 영화가 결코 허무한 결말이 아닌 두려움을 받아들일 용기를 얻어 극장 밖을 나설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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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평론가
4.0
"나의 삶은 태어남에 대한 망설임."(프란츠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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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
4.5
엄마 미안, 그래도 사랑하는 거 알지? Make Home “Unhomelike”. . . 둔탁한 울림과 먼발치에서 들려오는 비명. 아리 애스터 감독의 신작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어딘가 불쾌한 사운드로 막을 올린다. 암전을 유지하던 카메라가 이내 자그마한 빛을 마주하자, 관객들은 기이한 소리의 정체가 출산 과정임을 깨닫게 된다. 한 아이가 어머니의 양수를 벗어날 때가 임박한 것이다. 바다(mer)는 어머니(mere) 안에 포함되기도, 때로는 어머니(母)가 바다(海)에 포함되기도 한다. 닭과 달걀의 순서는 중요치 않다. 주인공이 러닝타임 내내 갈구하는 ‘물’이 모성/여성성을 내포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어머니의 뱃속을 헤엄치던 보는 세상 빛을 마주했지만, 여전히 모체와 완전한 분리를 이루지 못한 것처럼 묘사된다. 잘리다 만 탯줄 양쪽에서 팽팽한 줄다리기를 이어나가는 모자는 전작들의 기이한 가족상을 계승한다. 가족은 <유전>과 <미드소마>에서 각각 ‘끝내 벗어던지지 못한 족쇄’거나 ‘폭력이 일상화된 전체주의적 집단’이었다. 원작인 <Beau>(2011)를 제외하더라도, 감독의 과거 단편들은 이번 작품과 조금 더 직접적인 연관을 보인다. <뮌하우젠> 속 어머니는 아들에게 광적인 집착을 보였고, <The Strange Thing About the Johnsons>는 가족 내 부적절한 성관계를 다루었다. 마찬가지로 이번 영화에서도 거듭된 ‘어머니의 집착’과 ‘성적 금기’는 보의 여정에 크나큰 장애물로 작용한다. “어머님이 죽기를 바란 적이 있나요?” 상담사의 물음에 보는 애써 감춰왔던 적개심을 마주한다. 그는 엄마가 “죽기를 바라는 동시에 죽지 않았으면 하는” 애증을 느낀 이후부터 줄곧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이가 어머니의 죽음을 바란 이유는 그에게 어머니의 헌신에 보답할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아들의 검은 속내를 알고 있다는 듯 끊임없는 전화 벨소리가 어머니의 건재함을 알린다. 더는 어머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소년은 만남을 거부한다. 보는 자신을 낳은 바다를 떠나고 싶지만, 인생의 가장 작은 허들조차 넘어서지 못한 소년은 영원히 어항 속에 갇힐 수밖에 없다. 주인공의 유아 퇴행적 행동은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회귀하지도” 못하는 스스로의 상황을 반영한다. 양수에서 갓 나온 아들은 마실 ‘물’을 구하지 못해 괴로워한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유아기에 머무르는 주인공에게 편집증이라는 성격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관객은 보가 정신병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주인공의 시점에서 펼쳐지는 세상과 관객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거리감이 형성된다. 스크린에 나타나는 그 무엇도 함부로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관객의 불신을 알고 있다는 듯 영화는 연신 과잉(나체의 살인마, 신체 변형을 거친 노숙자, 미치광이 이웃)을 내뿜어댄다. 악몽들이 아무리 점프컷으로 휘몰아쳐도, 관객은 모든 상황을 환각으로 여기며 무난히 받아들일 수 있다. 주인공이 우연히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 뒤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된다. 충격에 빠진 채 마리아상을 손에 쥐고 목욕물에 잠긴 주인공의 모습은 돌아갈 수 없는 품을 그리워하는 아기와 같다. 따라서 교통사고 이후 그가 그레이스, 로저 부부를 부모처럼 따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부부와 주인공의 만남은 언뜻 서로의 부재를 채워주는 구원의 과정처럼 보인다. 그러나 죽은 아들의 사진을 함께 퍼즐로 맞추는 새로운 ‘가족’의 섬뜩한 모습은 불길함을 지울 수 없다. 깊은 상심에 빠진 부부에게 보는 지브스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대체품, 혹은 수집품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때 로저의 대사를 통해 주인공의 성기가 과부하 상태(중증 고환염)임이 언급된다. 어른의 몸을 가진 아이에게 성관계 경험이 없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서사가 전개되며 보의 비정상적인 성기 너머에 두 명의 여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어머니와 첫사랑 일레인이다. 어머니에 따르면 주인공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성관계 도중 사망하였다. 복상사라는 끔찍한 유전병에 아이의 사정, 성관계는 터부시된다. 일레인의 사연은 그나마 로맨틱하다. 어린 시절 소년과 소녀는 먼 훗날을 기약했고, 보는 그녀를 위해 자신의 순결을 지켜왔다. 새로운 여성을 만나는 행위는 아이가 자신을 낳아준 태초의 바다를 떠나 새로운 물을 향하는 것과 같다. 결국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한 공간에서 연인은 재회에 성공한다. 이제 아이가 성관계라는 통과 의례를 거쳐 남성으로 거듭나고, 주체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해피엔딩만이 남은 듯 보인다. 하지만 아리 애스터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감독이 아니다. 등장인물은 물론 관객의 멘탈까지 너덜너덜하게 물어뜯는 짐승 같은 연출가 아닌가. 절정의 순간과 함께 죽음이 찾아온다. 예언과 달리 죽음을 맞이한 것은 일레인이다. 최악의 첫 경험 이후 어머니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냉소를 보이며 재림한다. 파국은 이전 시퀀스에서 ‘숲의 고아들’의 연극을 통해 예고되었다. 평생 새로운 가족을 찾아 헤맨 노년의 보는 죽을 때조차 외로이 홀로 남게 된 자기 자신을 목격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는 진실을 고백하면 흙이 마실 ‘물’로 변하고, 영원한 고향을 되찾게 되리라 예언한다. 그러나 결국 뜨거운 재회에 성공한 아들들마저 허상이었음이 밝혀지고, 보는 자신을 뒤쫓는 어머니의 하수인들로부터 도망칠 뿐이다. 보가 끝내 어머니의 집을 방문했을 때, 마치 방금까지 누군가 누워있었던 듯 쿠션이 눌려있다. 눌린 자국에 주인공이 머리를 갖다 대자 원래 자리를 되찾은 듯 꼭 알맞게 들어맞는다. 아들이 뛰쳐나온 어머니의 품은 아들의 부피만큼 비어있었다. 보가 일레인과 관계를 맺지 않았다면 비록 새로운 가족 찾기는 실패했을지라도, 아들은 그리운 어머니의 품을 되찾았을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모든 일을 벌인 이유는 텅 빈 둥지에서 비롯된 공허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들은 어머니의 품에서 금기를 어기는 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넌 아기 때부터 젖 무는 걸 거부했어!” 아들의 일탈을 목격한 어머니는 분노를 터트린다.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그녀는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자신을 쥐어짜” 아이에게 모든 걸 헌신한 어머니에게 돌아온 것은 아들의 무관심과 외면뿐이다. 심지어 아들이 집을 찾아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목을 조른다.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 어머니에겐 일말의 미운 정조차 남지 않는다. 그렇다면 보는 어머니의 헌신을 배신한 못된 아들인가? 아들에게 과한 집착을 보인 어머니가 파국의 모든 원인일 수는 없는 것일까? 다시 보의 여정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초반 시퀀스에서 나타난 보의 ‘환상’은 깊은 사유를 요구하지 않는다. 영화가 주인공을 편집증 환자라는 ‘믿을 수 없는 화자’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개연성을 잃어 ‘환상적’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각각의 사건은 이상하리만치 모든 상황이 실제임을 암시하는 증거를 갖고 있다. 노숙자들의 점거로 모니터와 집이 산산조각난다. 수도꼭지 사건 이후 단수를 해결했다는 집주인의 메시지가 드러난다. 나체로 살인을 저지르는 ‘엽기’ 살인마는 애초부터 뉴스의 영상을 통해 등장했다. 그렇다면 진실로 드러나지 않은 것은 오직 어머니에 의해 고용된 상담사뿐이다. 물론 일련의 끔찍한 사건들을 주인공을 겨냥한 하나의 ‘트루먼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정환님의 명쾌한 코멘트처럼). 하지만 폭력이 난무하고 ‘junky’가 길바닥에 죽어있는 상황을 실제로 받아들여도 논리적으로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렇다면 수많은 ‘결말 해석’을 낳은 <곡성>이 그러했듯, 모든 가능성은 열려있는 셈이다. 심지어 보의 여정 전체가 어머니에 짓눌린 한 편집증 환자의 환상일 가능성조차 배제할 수 없다. ‘78번 채널’ 또한 마찬가지다. 보는 리모컨으로 지금까지 자신을 감시하던 카메라의 시선을 훑는다. 이때 놀랍게도 영상에는 과거는 물론 미래의 행동까지도 녹화되어 있다. 또 하나의 비개연성, 환상적 사건의 발생이다. 결말에 다가갈수록 영화의 환상성은 더욱 짙어진다. 대표적으로 다락방에 돌연히 나타난 비대한 남근 괴물은 모든 이야기를 하나의 거대한 알레고리로 전환하는 듯하다. 이에 조응하듯 영화의 마지막 공간(심판의 장)은 비현실적인 감각을 이끌어낸다. 어머니의 목을 조른 ‘보’는 다시 바다 끝을 향하지만, 안개 너머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구원이 아닌 최후의 심판장이다. 자신의 장례식까지 거짓으로 꾸며가며 아이에 집착하는 어머니는 진절머리를 나게 한다. 그러나 영화는 곧 아들과 어머니 사이에 균형을 유지한다. 검사가 어머니를 욕보인 아들의 과거를 낱낱이 고발하기 때문이다. 대체 이 지독한 알레고리가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용산 CGV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나는 감독에게 “모든 영화에 가족이 기이한 관계로 드러나는 이유”를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놀랍도록 단순했다. “Make home unhomelike”, 아리 애스터 감독은 가족을 가족답지 않게 그려낼 때 떠오르는 진실을 즐긴다. 그는 이어서 나에게 “그렇다면 전형적인 가족이란 무엇이냐”고 되묻고, “아무리 화목한 가정이라도 그 속의 관계는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모든 인물은 각자의 부재를 극복하지 못해 갈등을 일으키고 고통받는다. 그러나 가족 관계에서의 부재와 갈등은 결코 관객이 공감할 수 없는 정서가 아니다. 단지 영화가 제시한 사례가 극단적이었을 뿐, 우리는 모두 벗어날 수 없는 가족의 굴레에 답답함을 느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 내에서 가족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은 결코 일방향적이지 않다. 하지만 처벌은 오로지 주인공에게만 행해진다. 아들은 끝내 자신이 버려졌음을 깨닫고, 천천히 물에 잠긴다. 물에서 태어나 한 모금 물을 찾아 세상 곳곳을 헤매던 아이가 다시 물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셈이다. 감독도 어쩔 수 없는 한 명의 ‘못난’ 아들인가보다. /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는 이전의 단편을 연상시키는 몇몇 화면 구성이 있다. 주인공이 급하게 쫓기거나, 어머니의 시신을 바라보는 장면 등에서 카메라는 인물의 표정을 클로즈업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둘러싼 주변 공간의 모습을 강조한다. <베이시컬리>, <세라비> 등에서 두드러졌던 이러한 장면 연출은, 인물의 말과 행동을 무력화하고 오히려 그를 둘러싼 거대한 환경의 존재를 부각한다. 이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가족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감독의 모든 캐릭터를 닮아있다. / 3시간의 러닝타임이 짧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든 장면에 시간을 여유롭게 사용하니 감독의 뛰어난 역량이 확연히 드러난다. 가령 같은 공간에서 음악 on/off를 통해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연출이 반복되는데, 참 영화적이다. / 기자 간담회 中 Q. 왜 감독님은 항상 영화에서 머리를 터트리십니까? A. 머리를 터트리는 건 언제나 즐겁습니다. 이 남자 정말 쉽지 않다.
스포일러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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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박
3.5
엄마를 사랑해.. 하지만! 엄마를 미워해.. 그러나! 엄마가 필요해.. however! 엄마가 싫어.. but! 엄마한테 미안해.. nevertheless! 엄마는 날 몰라줘.. 진짜.. 내 마음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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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영 (영화 담다)
3.0
결국은 세상의 무심함이 '보'를 집어삼킨것이 아닐까. 유일한 가족인 엄마까지 자기 편이 아닌 무심한 세상. 유일하게 보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묻어버리는 무섭고 두려운 세상. 기이한 여정, 혼란의 여정, 두려움의 여정 등 보의 정신상태를 대변하는 듯 한 어질어질하고 복잡한 플롯의 구성. 아리 에스터 작품답게 결코 평범하진 않을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대단히 비범하고 감독 자신의 자전적인 색채가 가장 뚜렷했던 작품. 엄마의 집착이 만들어 낸 나약하고 퇴행적인 어른 '보', 그의 두려움이 만들어 낸 어그러져버린 의식 속 세상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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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진심인 망고의 주관적인 리뷰
4.0
난잡한 퍼즐과 악취섞인 조롱으로 진을 빼놓는 악동의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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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NE
3.0
그동안 믿어왔던 것들이 모두 전복되는 순간, 다시 어머니의 뱃속으로
스포일러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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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원
4.0
주인공의 혼란과 고뇌에 감정이입하던 내게 영화가 되묻는 거 같다. 정말 쟤만 힘들었을까. 가시 돋친 뒷모습을 꼭 끌어안아야만 했던 누군가의 고통을 넌 헤아려 본 적 있느냐고. 변명 같은 그 질문에 난 왜 이리도 흔들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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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드벤처 극찬 리뷰 예고편
아리 에스터 감독 코멘터리 영상
마틴 스콜세지 감독 극찬 영상
1차 예고편
2차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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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쾌 독특 기괴 컬트적 판타스틱 매니악한 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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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24 Fil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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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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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 독립 영화의 핵, A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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