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3.5부모 자식 간의 분열, 그 너머의 찢어짐에 대한 영화. . (스포일러) 부모와 바보라는, 좀체 어울리지 않는 제목의 단어 조합을 보고 있으면 마치 천륜을 저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단어의 어감이 마냥 그렇게 심각하게 들리진 않고 귀엽게 느껴지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된다. 이 기묘한 뉘앙스처럼 영화는 부모 세대와 심각한 불화를 빚는 인물들의 퍽퍽한 인생사를 괴상하고 통통튀는 유머를 섞어 냉소적으로 풀어낸다. 세대갈등과 삶의 고됨이라는 진부한 테마에 천착했다는 지적을 피하긴 힘들겠으나 이 영화가 그 세대의 찢어짐을 보여주는 방식은 주목할 만 하다. . 극중 백대리는 특유의 시니컬한 톤으로 덤덤하게 동생을 상실한 경험을 영진에게 토로한다. 그리고 그가 영화광이었다는 사실을 말하자 마침내 영진은 그의 말에 귀를 귀울이며 영화는 영진의 사연을 플래시백의 형태로 공개한다. 이전까지 백대리와 영진은 좀처럼 원만한 소통을 하지 못했으며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자신의 기구한 사연을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백대리의 모습은 의아해 보일 정도였다. . 하지만 그의 냉소적인 태도 아래에서 엿보이는 상처로 말미암아, 백대리는 작위적인 방식으로라도 영진과 유사 형제관계를 형성하려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진은 본인의 가정사로부터 연유된 정신적 상흔에 사로잡힌 탓에 백대리와 좀체 화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영화는 잠에 빠지는 영진의 모습을 통해 가정으로부터 쫓겨난 그가 입은 피해와 더불어 백대리와 영진의 소통불능을 줄곧 묘사해왔다. . 그러던 중 백대리가 자신의 아픈 가정사를 공개함과 동시에 타인의 삶을 관음하는 영화 매체의 매혹에 대해 설명하자 비로소 가정 밖으로 내쳐져 먼발치서 카메라로 피사체를 관망하는 취미를 가진 영진과 그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영진이 백대리에게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는 대목을 단순 대화가 아니라 플래시백이라는 시청각적 형태로 제시하며 둘의 일시적 화합을 보여준다. . 이후 백대리와 불화하는 할머니의 플래시백 에피소드는 이와 대조적이라 볼 수 있다. 전화 상으로 아들에게 버림받는 할머니의 에피소드에서, 그녀의 아들의 음성과 시각적 정보는 일체 제시되지 않는다. 아울러 그와 갈등을 겪는 백대리는 그 플래시백에 담긴 할머니의 기구한 사연을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알지 못한다. 앞서 유사한 세대로 묶일 수 있는 백대리와 영진이 플래시백의 형태로 절절한 개인사를 공유했던 것과 달리 영화는 시청각적 정보를 부러 전달하지 않으며 부모 자식 세대간의 단절을 드러낸다.(극중 백대리가 할머니의 아들과 동갑인 이유다.) . 하지만 <부모바보>는 부모 자식간의 멀어짐을 형제간의 화합으로 흐지부지 봉합하지 않는다. 일시적 화합을 보인 백대리와 영진의 관계는 같은 조직 내에서 계급이라는 폭력적인 수직관계에 의해 균열을 보이게 되는데, 이러한 갈등은 상사의 지시로 백대리가 영진의 카메라를 규제하게 됨으로써 더욱이 선명해진다. . 청년의 복지에 무관심한 아이러니한 복지관이 영화 내내 하나의 은유처럼 활용된 영진의 '카메라'를 규제하고 구태여 그 규제를 백대리가 직접 하도록 상부에서 명령이 하달되는 순간, 타인의 시선을 앗아가는 그 상징적 행위 속에서 순간의 화합은 무화되고 만다. 영화의 후반부, 라면 부스러기를 바닥에 흘린 채 밖에서 멍하니 서성이는 영진을 백대리가 베란다에서 뚫어지랴 쳐다보는 시점 숏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대로 고정된 카메라 앵글에서 백대리가 영진을 데려오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가자 백대리가 자신의 시점 숏 안으로 들어오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다. 백대리가 프레임 인 하는 순간 그의 주관적 시점 숏은 객관적 시점을 드러내는 숏으로 전환되며 백대리 역시 카메라를 통제당한 영진처럼 자신의 시점을 뺏기고 만다. . 이어지는 영화는 잠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유사 형제의 분열을 보여준다. 다시금 집에 돌아와 이전처럼 컴퓨터 앞에 앉은 그들을 영화는 이전과 똑같은 구도로 보여주지만, 마치 공감능력이 결여된 듯한 이기적인 언사를 내뱉는 백대리에게 영진은 '잠자는 척'으로 그의 말을 차단한다. 그리고 혼자 출근한 뒤 그를 찾아 온 백대리 앞에서도 잠자는 시늉만을 한다. . 앞선 장면들에서 '잠'은 영진의 불우한 가정을 가늠하게 해준 수단인 동시에 그와 백대리의 불가피한 소통불능의 장치로서 기능했다. 하지만 종반부의 영진은 의도적으로 잠에 드는 척을 하며 백대리와 연대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함으로써 백대리와 영진의 세계엔 시차가 발생한다. 영진의 실종 소식을 들은 백대리는 부랴부랴 그의 아지트로 향해보지만 그가 뒤늦게 발견하게 되는 건 영진이 남기고 간 흔적일 뿐이다. 아지트의 쓰레기 봉투는 물론, 그가 아침에 쇼파에서 본 단정하게 갠 이불처럼 말이다. . 영화의 마지막, 다시금 일터에서 고역을 치르는 백대리에게 할머니가 찾아와 살가운 화해를 건네자 백대리는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는다. 마치 영진이 잠자는 척을 하며 의도적으로 자신을 밀어냈던 것처럼. 할머니가 백대리에게 주고 간 사탕봉지가 서로 엇갈리며 미묘한 잡음이 발생하자 영화는 영진이 찍은 푸티지를 보여주며 끝이 난다. 그 푸티지 속에서 의자를 간신히 떠받히고 있는 얼음은 몹시 불안해 보이는 동시에 앞서 미끄러진 백대리의 사탕봉지의 정서와 공명한다. 하지만 캠코더로 촬영된 그 푸티지는 앞선 장면과 전혀 다른 질감을 나타내며 그것들은 명백히 서로 다른 세계에 귀속돼 있음을 말하는 것 같다. 부모 자식은 물론 유사 형제까지 모조리 분열된 냉랭한 찢어짐의 순간이다.좋아요29댓글0
이동진 평론가
3.0
당겨보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스템의 성긴 틈 사이로 보이는 것들.
simple이스
3.5
쌓아 올린 것에 비해 현실은 초라한데, 그걸 곱씹다 보니 터지는 문제들을.
chan
3.5
부모 자식 간의 분열, 그 너머의 찢어짐에 대한 영화. . (스포일러) 부모와 바보라는, 좀체 어울리지 않는 제목의 단어 조합을 보고 있으면 마치 천륜을 저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단어의 어감이 마냥 그렇게 심각하게 들리진 않고 귀엽게 느껴지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된다. 이 기묘한 뉘앙스처럼 영화는 부모 세대와 심각한 불화를 빚는 인물들의 퍽퍽한 인생사를 괴상하고 통통튀는 유머를 섞어 냉소적으로 풀어낸다. 세대갈등과 삶의 고됨이라는 진부한 테마에 천착했다는 지적을 피하긴 힘들겠으나 이 영화가 그 세대의 찢어짐을 보여주는 방식은 주목할 만 하다. . 극중 백대리는 특유의 시니컬한 톤으로 덤덤하게 동생을 상실한 경험을 영진에게 토로한다. 그리고 그가 영화광이었다는 사실을 말하자 마침내 영진은 그의 말에 귀를 귀울이며 영화는 영진의 사연을 플래시백의 형태로 공개한다. 이전까지 백대리와 영진은 좀처럼 원만한 소통을 하지 못했으며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자신의 기구한 사연을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백대리의 모습은 의아해 보일 정도였다. . 하지만 그의 냉소적인 태도 아래에서 엿보이는 상처로 말미암아, 백대리는 작위적인 방식으로라도 영진과 유사 형제관계를 형성하려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진은 본인의 가정사로부터 연유된 정신적 상흔에 사로잡힌 탓에 백대리와 좀체 화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영화는 잠에 빠지는 영진의 모습을 통해 가정으로부터 쫓겨난 그가 입은 피해와 더불어 백대리와 영진의 소통불능을 줄곧 묘사해왔다. . 그러던 중 백대리가 자신의 아픈 가정사를 공개함과 동시에 타인의 삶을 관음하는 영화 매체의 매혹에 대해 설명하자 비로소 가정 밖으로 내쳐져 먼발치서 카메라로 피사체를 관망하는 취미를 가진 영진과 그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영진이 백대리에게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는 대목을 단순 대화가 아니라 플래시백이라는 시청각적 형태로 제시하며 둘의 일시적 화합을 보여준다. . 이후 백대리와 불화하는 할머니의 플래시백 에피소드는 이와 대조적이라 볼 수 있다. 전화 상으로 아들에게 버림받는 할머니의 에피소드에서, 그녀의 아들의 음성과 시각적 정보는 일체 제시되지 않는다. 아울러 그와 갈등을 겪는 백대리는 그 플래시백에 담긴 할머니의 기구한 사연을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알지 못한다. 앞서 유사한 세대로 묶일 수 있는 백대리와 영진이 플래시백의 형태로 절절한 개인사를 공유했던 것과 달리 영화는 시청각적 정보를 부러 전달하지 않으며 부모 자식 세대간의 단절을 드러낸다.(극중 백대리가 할머니의 아들과 동갑인 이유다.) . 하지만 <부모바보>는 부모 자식간의 멀어짐을 형제간의 화합으로 흐지부지 봉합하지 않는다. 일시적 화합을 보인 백대리와 영진의 관계는 같은 조직 내에서 계급이라는 폭력적인 수직관계에 의해 균열을 보이게 되는데, 이러한 갈등은 상사의 지시로 백대리가 영진의 카메라를 규제하게 됨으로써 더욱이 선명해진다. . 청년의 복지에 무관심한 아이러니한 복지관이 영화 내내 하나의 은유처럼 활용된 영진의 '카메라'를 규제하고 구태여 그 규제를 백대리가 직접 하도록 상부에서 명령이 하달되는 순간, 타인의 시선을 앗아가는 그 상징적 행위 속에서 순간의 화합은 무화되고 만다. 영화의 후반부, 라면 부스러기를 바닥에 흘린 채 밖에서 멍하니 서성이는 영진을 백대리가 베란다에서 뚫어지랴 쳐다보는 시점 숏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대로 고정된 카메라 앵글에서 백대리가 영진을 데려오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가자 백대리가 자신의 시점 숏 안으로 들어오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다. 백대리가 프레임 인 하는 순간 그의 주관적 시점 숏은 객관적 시점을 드러내는 숏으로 전환되며 백대리 역시 카메라를 통제당한 영진처럼 자신의 시점을 뺏기고 만다. . 이어지는 영화는 잠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유사 형제의 분열을 보여준다. 다시금 집에 돌아와 이전처럼 컴퓨터 앞에 앉은 그들을 영화는 이전과 똑같은 구도로 보여주지만, 마치 공감능력이 결여된 듯한 이기적인 언사를 내뱉는 백대리에게 영진은 '잠자는 척'으로 그의 말을 차단한다. 그리고 혼자 출근한 뒤 그를 찾아 온 백대리 앞에서도 잠자는 시늉만을 한다. . 앞선 장면들에서 '잠'은 영진의 불우한 가정을 가늠하게 해준 수단인 동시에 그와 백대리의 불가피한 소통불능의 장치로서 기능했다. 하지만 종반부의 영진은 의도적으로 잠에 드는 척을 하며 백대리와 연대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함으로써 백대리와 영진의 세계엔 시차가 발생한다. 영진의 실종 소식을 들은 백대리는 부랴부랴 그의 아지트로 향해보지만 그가 뒤늦게 발견하게 되는 건 영진이 남기고 간 흔적일 뿐이다. 아지트의 쓰레기 봉투는 물론, 그가 아침에 쇼파에서 본 단정하게 갠 이불처럼 말이다. . 영화의 마지막, 다시금 일터에서 고역을 치르는 백대리에게 할머니가 찾아와 살가운 화해를 건네자 백대리는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는다. 마치 영진이 잠자는 척을 하며 의도적으로 자신을 밀어냈던 것처럼. 할머니가 백대리에게 주고 간 사탕봉지가 서로 엇갈리며 미묘한 잡음이 발생하자 영화는 영진이 찍은 푸티지를 보여주며 끝이 난다. 그 푸티지 속에서 의자를 간신히 떠받히고 있는 얼음은 몹시 불안해 보이는 동시에 앞서 미끄러진 백대리의 사탕봉지의 정서와 공명한다. 하지만 캠코더로 촬영된 그 푸티지는 앞선 장면과 전혀 다른 질감을 나타내며 그것들은 명백히 서로 다른 세계에 귀속돼 있음을 말하는 것 같다. 부모 자식은 물론 유사 형제까지 모조리 분열된 냉랭한 찢어짐의 순간이다.
RAW
2.5
어떤 꽃(꿈)도 피울 수 없는 길거리에 버려진 씨앗들의 이야기 2.6/5점
이승원
3.5
우리가 직접 보지 못한 상황은 생각한 것보다 최악일 수도 있다. 의자를 지탱하는 얼음은 언젠가 쓰러질 것이다. 서서히 녹아가면서 우리는 흘러내린다.
박상환
4.0
놓을듯 말듯 하다가도 붙잡고 가는, 그것이 사람 마음
kebab
3.0
영화의 호흡에 비해 내용이 많지는 않아도 전반적으로 가라앉은 톤이 맘에 들었다, 윤혁진 배우도 괜찮고 흡사 박혁권+최우식 같음. #서독제#231206
2.35:1 Cìnema Scope
3.5
바보처럼 끊지 못하는 천륜이 상처인 이들을 잘난 말로만 아우르는 시스템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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