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잎
ხმელი ფოთოლი
2025 · 드라마 · 독일, 조지아
3시간 7분

두 편의 사랑 이야기 다음으로 코베리제는 딸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아버지를 그린다. 사라진 자의 뒤를 밟는 길의 동행은 (문자 그대로) 보이지 않는 존재이고, 질문에 답하는 시골 사람도 종종 시야에 잡히지 않는다. 유령의 로드무비 같지만, 선을 따라 앞으로 나아간 이는 결국 큰 원을 그리며 제자리로 돌아온다. 풍경이 도시에서 시골로 바뀌면서 나무, 풀, 동물은 더 자주 등장하는데, 데뷔작으로 돌아가 핸드폰으로 찍은 저해상도 이미지에 당황할지도 모른다. 디지털의 파편은 화가가 손에 쥔 붓의 터치와 같아서, 고유한 빛과 속도를 지닌 <마른 잎>엔 ‘인상주의 영화’란 표현을 붙일 만하다. 대상을 지긋이 바라보는 태도나 유머에선 조지아의 위대한 선현 오타르 이오셀리아니를 닮았다. 코베리제는 3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의 영화가 시가 될 수 있음을 두 번이나 증명했다. (이용철)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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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태
4.5
선명한 현실을 뭉뚱그려놓으니 그림 속에서 여행을 다니고 있었다
Jay Oh
4.5
의미요? 저 길로 쭉 가다 보면 금방 나올 거예요! 보면 아실 거예요. (주의: 안 보일 수 있음) Have you seen all the monuments of life? Keep going that way, can't miss them!
무비남
5.0
빛과 선과 운동, 한없이 겸허해지는 시각. 진정으로 보기 위한 고행, 회복되는 시력.
오세일
4.5
21세기, 그것도 2025년에서 144p 화질의 영화를 만드는 행위에 대한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 요즘 시대에서는ㅡ극단적으로 말하자면ㅡ720p 이하의 품질로 재생되는 영상을 '불량'으로 여긴다. 1080p가 화질의 기본 수치로 자리 잡았으며, 유튜브 등에서는 이미 4k(2160p)의 세밀한 이미지를 자랑하는 품질을 무료로 제공한다. 하지만 <마른 잎>은 그런 세계를 향해 144p의 화질로 대항한다. 선명한 화질 속에서 대부분의 관객은 중앙의 피사체에 시선을 투자한다. 중앙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프레임의 외곽에 존재하던 풍경은 미처 그들의 안구에 새겨질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휘발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관객은 영상의 품질이 좋아질수록 프레임 주변의 것들을 놓치게 된다. 끝내 관객에게 닿지 못해 떠나가 버린 프레임 속의 유령들. <마른 잎>은 그런 프레임의 유령성을 탐구한다. <마른 잎>에는 서사가 있다. 말없이 집을 떠나버린 딸을 찾기 위해 조지아의 일대를 누비는 아버지와 그의 동행자에 관한 이야기. 하지만 144p의 화질에서는 중앙의 피사체인 아버지조차 시야에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심지어 그의 동행은 프레임 내에서 목소리로만 존재한다. 그렇게 아버지의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 눈을 찌푸리며 스크린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관객은, 이내 노력을 잠시 미뤄두고 아버지의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관객의 안구에는 비로소 시선을 돌렸을 때 마주할 수 있는 일상(혹은 풍경)의 아름다움이 새겨진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 한 송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 푸른 하늘에 걸려 있는 구름 등. 딸의 행적을 뒤쫓던 아버지의 모험에 흐린 눈으로 동참한 관객은, 딸을 제외한 프레임의 모든 순간을 안구에 새긴다. 딸을 찾는 아버지라는 영화의 토대는 리산드로 알론소의 <도원경>을, 동일하게 '누군가를 찾는다'라는 개념과 여러 풍경의 이미지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를 떠올리게 한다. 다만 <마른 잎>이 찾는 것은 그보다 더 영화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딸이 최근까지 업무를 보았던 신축 축구 경기장을 찾는 과정에서 발견한 여러 축구 골대들. 그 골대들은 모두 하나같이 어설프게 세워진 두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4k를 갈망하던 관객의 앞에 놓인 144p의 이 영화처럼 말이다. 골대의 모습은 마치 영화의 사각 프레임을 닮아 있다. 수많은 골대를 경유하는 것은 곧 영화의 프레임을 통과하는 과정처럼도 보이며, 그런 과정을 거치고 끝내 도달한 목적지에는 <마른 잎>의 순수함이 있다. 영화를 보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모든 풍경적 조연들에 대한 헌사. 나에게 <마른 잎>은 4k보다 더 투명한 프레임의 결정체이다.
김병석
4.5
영화의 중간, 주인공이 종종 꾸던 꿈의 배경에 우연히 방문하게 된 언덕에는 녹슨 골대가 서 있다. 갑자기 카메라는 골대 뒤 풀숲으로 광학 줌을 당긴다. 안 그래도 열화된 이미지는 풀숲의 윤곽을 잃고, 어떤 인영을 닮은 색 무더기로, 끝내 알아볼 수 없는 픽셀로 변한다. 이게 뭔가 하며 짐짓 지켜보고 있는 그 순간, 픽셀은 아예 다른 장소의 일부가 된다. 해석 불가능의 지지부진한 이미지가 공간적 한계를 초월하는 디졸브의 초석이 된 셈이다. 철 지난 휴대폰 카메라 푸티지의 비디오 퀄리티가 가지는 미적 역량은 이런 부분에서 드러난다. 또 예를 들어, (카메라가 자동노출로 맞춰져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영화 곳곳에는 이미지의 전경과 후경의 광량 차이 때문에 그저 어두운 곳으로 보였던 부분이 사실은 벽돌 벽이라거나 숲의 일부라거나 하는 식으로 관객의 판단을 유보하는 샷들이 있다. 여기서 기술적 미완성도는 오히려 별것 아니라며 넘겼던 하찮은 순간의 일부가 사실은 어떤 기억의 흔적, 다양한 행위자들의 삶으로 가득한 장이라는 것을 은유하는 시적 이미지의 연료가 된다. 이 영화는 이렇게 사라져가는 생과 죽어가는 공간에 대한 사랑을 외친다. 경제적 진보와 역사적 사건이란 파고에 곧 잊힐 운명인 순간들, 낡은 이미지에 단순한 네러티브를 덧대는 방식으로 감독은 기억을 천명한다. (마치 벤야민식의 매체 이론이 주장하듯) 쇠퇴하는 테크놀로지가 과거의 편린들을 망각에서 해방한다. (과장 조금 보태 모네나 터너의 회화를 보는 것과 같은) 연기 같은 인상으로 뭉개진 풍경 속 칩거하는 존재들은 쉬이 알아볼 수 없기에 오히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 된다. 이야기의 앞과 뒤에 마치 버려지듯 흩뿌려진 풍경 인서트들은 관객들에게 모종의 순간들을 이어 붙일 수 있는 역량을 제공하며 영화가 행하는 기억 행위에 초대한다. 빈사 상태로 비척거리는 시간과 숱하게 스쳐 지나간 장소들을 돌아보게 한다. 그렇게 영화는 인식 너머 어딘가에 가라앉고 있을 순간들을 건져 올린다. 가만 잊혀지게 두지 않는다. (영화 내내 반복되는 골대 혹은 나무 울타리, 창문 등의 프레임 속 프레임 모티프처럼) 결과에 상관없이 카메라의 프레임으로 품는 것이 영화가 고수할 수 있는 기억법임을 이야기한다. 그게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감동을 몰고 온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음악이 작품을 감상주의적으로 몰고 가는 경향이 못내 아쉽긴 하지만, 그마저도 한없이 달콤하게 보이게 하는 낭만적인 작품. 이 영화의 후기와는 다른 이야기지만, 오늘도 영화가 죽지 않았음을 확인해서 참 다행이다.
조재훈
3.5
스크린/영화를 통해 생을 부여받은 유령들-, 움직이지 않으면 보이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즉 영화의 작동을 통해 숨 쉬는 이들을 찾아가는 불가해한 여정. /BIFF 2025
CineVet
4.5
<마른 잎>을 보았고... 정말 아름다운 영화였다... 이것밖에 말 못 하는 바보가 됐다는 뜻입니다만... 가장 좋았던 점은 이 영화가 숏을 대하는 방식? 태도?였다. 모든 숏이 무용하지만 그래서 동시에 모든 숏이 소중한 영화. 어떤 객체라고 할만한 것이 프레임 바깥으로 벗어나더라도 그 빈자리를 계속해서 응시하는 숏들, 일부 인물을 아예 등장시키지 않으면서 화면의 빈 자리에 무언가 존재하고 있을 것이란 감각을 만들고-동시에 외화면을 자꾸 인식하게 하고-그를 통해 계속 유지되는 긴장, 영화 초반에 등장한 선의 이미지가 계속 반복되는 것 & 여러 요소를 통해 이중 프레임을 만드는 것 등등... 계속해서 움직임이 존재하고, 외화면을 상상하게 만들며, 영화의 끝에 다다르면 모든 숏 하나하나가 소중했음을 상기시키는 <마른 잎>에 아름답다는 수사를 붙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화 내내 등장하는 동물 친구들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지는 건 덤. 영화 음악도 너무 좋았고. 나아가 모든 숏이 소중하다는 것, 그 사소한 감각이 인생에, 삶에 맞닿으면서 삶을 긍정하고, 위로하고, 평안을 준다는 점에서 더더욱 ′좋은′ 영화였다. 삶의 어느 순간에 문득 떠올릴 영화.
동구리
4.0
영화는 어느 날 편지를 남기고 사라진 사진기사 딸을 찾는 아버지 이라클리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이라클리는 레반이라는 남자와 함께 조지아 전역의 축구장을 돌며 딸을 찾는다. 하지만 우리는 186 분의 러닝타임 동안 레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단지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구형 소니 핸드폰으로 촬영된 이미지는 유튜브에서 360p로 화질을 설정한 것처럼 뭉개지고 픽셀화되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조지아의 풍경을 새로운 방식으로 감상하게 한다. 그렇다고 <마른 잎>의 배경이 과거인 것도 아니다. 이라클리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을 영화 내내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이 영화는 조지아를 그러한 방식으로 담아내길 결정했을 뿐이다. 어떤 면에서 코베리제의 선택은 저화질의 디지털 이미지가 8mm 필름이 특정한 감성을 갖는 것과 유사하다고 여기는 것만 같다. 노출도 제대로 맞춰지지 않으며 영화 내내 (감독의 형제인 데이비드 코베리제가 연기한) 이라클리의 얼굴조차 제대로 확인할 수 없지만, 반복되는 듯한 조지아의 풍경(숲, 도로, 그물 없는 골대 등)을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다. 딸이 들렀을 법한 축구장들을 찾아다니는 이라클리의 여정은 부재하는 대상을 뒤쫓는, 그야말로 유령을 뒤쫓아가는 로드무비나 다름없다. 동시에 그와 동행하는 레반 또한 모습 없이 목소리로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영화적 유령과 다름없다. 유령과 동행하며 유령적 존재를 뒤쫓는 로드무비, 저화질의 뭉개진 디지털 이미지는 조지아의 풍경을 노스탤직한 감상주의 속에서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경계 없이 풍경에 녹아드는, 그럼으로써 영화 내의 유령이나 다름없게 느껴지게끔 하는 촬영이랄까. 얼핏 홍상수의 <물안에서>가 그러했듯 후기 인상주의 회화의 방식을 영화에 끌어오는 시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마른 잎>을 바라본다면, 이 영화의 저화질은 고화질의 이미지가 갖는 투명성, 이미지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에 개입하고자 하는 관람자(혹은 목격자)의 욕망을 배제하고 이라클리의 시적인 여정에 동참하게끔 하는 시도로 바라보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 3시간 동안 한 편의 영화를 봤음에도 이라클리의 얼굴도, 그와 동행한 레반의 정체도, 그들이 찾던 딸의 정확한 모습도 확인할 수 없는 관객들에게 남는 것은 거대한 원을 그리며 조지아 곳곳의 풍경을 담아낸 하나의 긴 여정일 따름이다. 잘 보이지 않더라도, 스크린 너머의 대상과 우리 사이에 길이 있다는 것만 확신하면 된다, 라고 <마른 잎>은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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