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연인들

프랑수아 데르비외는 1968년 5월, 이제 막 스무살이 된 젊은이다. 시인이 되고픈 그는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 시를 웅얼거리면서, 파리 시내에서 벌어지는 바리케이드 시위에 참가한다. 경찰기동대를 향해 돌과 화염병을 던지면서, 자동차를 이용해서 장벽을 만들어 방어하면서, 그가 속한 무리는 다른 시위대들과 어울려 라틴 거리를 행진한다. 그러던 어느 저녁, 프랑수아는 손에 상처를 입는다. 그날의 시위에서 경찰기동대에 뒤쫓기면서 그는 과거의 혁명에 관해 꿈을 꾼다. 1789년의 ‘프랑스 시민혁명’, 그리고 1848년의 ‘프랑스 2월혁명’에 관한 꿈 말이다. 이후 프랑수아의 친구들이 한 아파트로 모여든다. 그 집의 주인인 앙투안은 아버지의 유산으로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 아버지는 죽었지만, 그 아버지 대신 자본이 그 빈자리를 메운다. 친구들은 앙투안을 부르주아라 부르지만, 돈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때문에 그는 마약에 빠진다. 함께 아편을 피우며, 그룹의 젊은이들은 세상을 바꾸는 꿈을 꾸면서 잠을 청한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수아가 릴리를 만나게 된다. 이미 시위현장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 그들은 파티장에서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조각가이며, 예술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작업실에 다니고 있다. 이 젊은 연인은 함께 앙투안의 집에서 생활한다. 그들은 다 같이 아편을 피우며 그해 5월에 대한 환멸에 사로잡힌다. 그렇지만 릴리는 점차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자문하게 된다. 그녀가 다니는 작업장의 상사가 마침 릴리에게 모델을 제안하고, 이후 미국으로 떠나자는 이야기를 한다. 그녀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프랑수아는 홀로 남는다. 그리고 영원한 잠을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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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
4.0
혼란스런 어둠이 내려앉은 파리, 환상과 환멸 사이를 오가는 패잔병들 #찌꺼기
윤경아 한 편을 봐도 잘 봐야지
3.5
순수한 것을 보고 지루해하는 오늘의 우리가 아프다.
chan
5.0
필립 가렐은 <몽상가들>에 어떻게 응답하는가. . (스포일러) 영화의 중반부, 릴리는 프레임 정면을 응시하며 외친다. “베르톨루치”. 구태여 제4의 벽을 허물며 프레임 밖의 이들에게 말을 거는 릴리의 대사가 품은 작의는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필립 가렐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68혁명을 다룬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이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당신의 영화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일갈의 제츠처로 받아들여야할지는 모르겠다만 분명한 건 필립 가렐에게 있어 68혁명은 베르톨루치가 했던 것처럼 마냥 낭만화 할 수 만은 없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 <몽상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평범한 연인들>에서 역시 집이라는 공간은 방황하던 당대 청춘들을 품어주는 아지트로서 자리한다. 허나 넓은 화면 아래 3명의 주인공 모두가 프레임 내에 배치되어 서로의 낭만을 공유하던 <몽상가들>에서의 집과 달리 본 영화의 집에는 저마다의 공허함과 황폐함만이 부유할 뿐이며 그들을 옥죄는 1.33:1의 좁은 화면비는 마치 이들 모두가 서로에게 있어 유리된 존재임을 명시하는 듯 보인다. 그들이 아편을 태울 때마다 그들 주변을 좌우로 패닝하는 영화의 카메라는, 하나의 프레임에 둘 이상의 인물이 입장하는 것을 불허한다.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르듯)저마다의 이상향에 근거하여 혁명을 달리 해석하는 이들이 한 프레임 내에 동시에 입장하는 순간은 아편을 태울 때 서로가 서로에게 불을 붙여주는 무의미한 순간을 제외하면 거의 찾기가 힘들다. 그 말인즉슨 그들은 고작 덧없는 서로의 허무에 의해서만 느슨히 연대할 수 있는 인물들이라는 말과 다름 아닐 것이다. . <몽상가들>의 인물들 역시 저마다의 가치관이나 예술관이 크게 충돌하는 양상을 보였지만 이는 당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이 예술과 사회이슈에 관해 첨예하게 대립하는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는 비교적 건강한 논쟁으로 비쳐진 경향이 강했다. 허나 <평범한 연인들>속 인물들은 서로의 주장만 할 뿐 생산적인 논쟁을 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한 명이 낭만을 논하고 있을 때 이를 경청하는 역숏에 배치된 인물의 얼굴엔 허무함만이 역력해 보인다. 그곳엔 누군가 a를 주장할 때 a’로 되받아치며 이를 공동의 의제로 확장시키려드는 인물이 아닌 되려 생뚱맞은 b를 주장하며 공허한 주장의 평행선을 구획하는 인물만이 있을 뿐이다. . 68혁명 당시를 다룬 <몽상가들>에서, 인물들은 자신들이 머무는 그 집이라는 공간이 의미로 가득 찬 공간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자신들의 현실을 몽상으로 둔갑시킨 채 그 꿈결 같은 나날들에 취해 있었다. 그것이 설령 한 순간에 스러질 허깨비였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평범한 연인들>은 영화의 초반부부터 이렇게 단언하는 것만 같다. 혁명은 끝났으니 이제 그만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본 영화 속 이들은 그들이 머무는 집에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이나 특정한 의미 따위는 없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무의미를 망각하기 위해 몽상에 취해야만 한다. 이는 맨 정신으로 불가하기에 그들은 아편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 <평범한 연인들>은 혁명의 거리에서 조차 낭만에 젖은 시선을 경계한다. 망설임 없이 화염병을 투척하던 <몽상가들>에서의 테오와 달리, 같은 배우가 분한 <평범한 연인들>의 프랑수아는 혁명의 거리에서 주저한다. 그리고 이때의 카메라는 특정 앵글에 위치하여 이들의 투쟁에 조소어린 태도를 취하거나 혹은 반대로 우러러 보는 시도를 취하지도 않는다. 그저 이들의 후일을 염려하는 듯, 한 발짝 뒤에 위치하여 낭만으로 위장한 그들의 공허함을 관조할 뿐이다. 경찰들에 쫓기던 프랑수아는 (자신 보다 한 세대 위로 보이는)이웃에게 도움을 청하나 매몰차게 거절당한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자신을 저지하는 할아버지의 단호한 주장을 무력하게 경청한다. 영화는 기성세대와 청춘세대 간의 또렷한 연대단절을 명시함으로서 혁명의 나날들에서 조차 그 근간엔 이들을 잠식할 허무가 도사리고 있었음을 방증했던 것이다. . 그것이 유의미든 무의미든, 그 의미 탐색의 과정 자체를 우상화하고 낭만화 했던 베르톨루치와 달리 68혁명 당시 철저히 내부자였던 필립 가렐의 시선은 절대로 그의 것과 동일시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의미와 온갖 부조리가 내재화된 채 의미를 찾아 허덕이다 고독에 죽어갔던 혁명 이후의 그날들. 필립 가렐은 생기 넘치는 청춘들에 덧씌워진 낭만을 걷어내고 허무를 등에 업은 유령들의 맨얼굴을 직시하려한다. . <평범한 연인들>속 인물들의 공허함은 마냥 희망의 부재에 기인하지 않는다. 되려 신기루마냥 어렴풋이 잔존하던 그것이 제 발로 찾아왔다 이내 떠나가 버리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비참하다. 그들에게 희망은 어떻게 다가왔다 사라지는가. 영화의 초반부에서 희망은 비가시적 영역, 예술의 매커니즘 내지는 몽상의 형태로 표상된다. 법정에 출두한 프랑수아는 그를 옭아매는 기성세대에 굴하지 않으며 당당히 본인을 예술가라 소개한다. 그에게 시는 덧없는 일상에서 기어이 의의를 건져내려는 발악의 산물이며 이에 근거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아이덴티티(시인)를 확립하는 것 그 자체 역시 곧 희망의 소산이다. 허나 공교롭게도 그는 혁명의 거리에서 손을 다쳐 시를 쓰지 못할 처지에 놓인다. 도식화를 무릅써야겠지만 이는 곧 일차적으로 희망의 소실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 혁명의 전선에서 도망친 프랑수아가 욕조에 누어 잠에 들 때, 이어서 처음 아편을 태운 뒤 다시 한 번 잠에 들 때. 영화는 아이리스 기법(화면 중앙의 한 점에서부터 원형으로 이미지가 퍼져 나가 장면이 전환되는 기법)을 통해 그의 잠과 혁명의 정의로운 순간을 교차하며 예술이란 비가시적 희망으로 도피할 수 없는 인물에게 꿈을 매개삼아 또 다른 비가시적 희망을 영화적인 언어로 선물한다. 약의 몽롱한 기운에 찌들어 덧없는 공상을 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던 그때 릴리가 등장한다. 그녀가 처음 등장하는 파트의 부제가 ‘새로운 희망’인 까닭은 그녀가 그 자체로 이전과 다른 가시적 희망의 현현이기 때문이다. 프랑수아가 그 이후로 시에 집착하지 않는 까닭 역시 그 연장에서 충분히 추론해볼만 한 것이다. . 릴리를 희망이란 하나의 관념으로서 조명하는 이후의 연출은 다른 이들을 담아내는 방식들과 극명히 대조되어 있다. 프랑수아의 친구이자 극중 이들이 머물 집을 제공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앙투안이 댄스클럽에서 춤을 추는 대목을 보자. 이때의 카메라는 그의 집에서와 달리 흥에 겨워 이곳저곳을 누비며 춤을 추는 앙투안의 움직임에 맞춰 그와 함께 그 공간에 있는 모두를 담아낸다. 곧이어 이전과 달리 한 프레임 내에 다수가 속해 있는 그 흥겨운 롱테이크가 갑자기 뚝 끊어진다. 그리고 이어서 모두가 흥에 젖어있는 그 상황을 턱을 괸 채 무뚝뚝하게 응시하고 있는 프랑수아가 역숏에 제시된다. 프랑수아의 프레임엔 앙투안의 프레임과 달리 그 자신만이 존재하고 있다. 이 짧은 숏-리버스 숏의 관계에서 우리는 희망에 대한 두 인물의 상반되는 가치관을 확인한다. 앙투안에게 그 공간이 잠시나마 일상의 공허를 탈피시켜줄 희망으로 해석되는 것과는 달리 프랑수아에게 댄스클럽은 그저 방종을 일삼는 몸짓으로 가득 찬 공간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그 직후의 집에는, 앙투안의 외도로 인해 희망을 잃어버린 그의 여자친구와 아직 혁명을 포기하지 않은 앙투안의 친구가 있다. 실연의 상처에 빠진 그녀를 그가 위무해보지만 그때의 그는 울고 있는 그녀의 프레임에 들어오지 못한 채 프레임 밖에서 형식적인 위로만을 건네고 있을 뿐이다. 둘은 결국에 서로를 새로운 희망으로 인지하고 그 집을 떠나간다. 허나 그 찰나의 순간에서 조차 한 프레임에 동화될 수 없었던 이들의 도피는 곧 또 다른 프레임으로부터의 감금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를 방증하듯 극의 중반부에 앙투안을 비난하는 편지를 보내고 당차게 집을 떠났던 앙투안의 친구는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다시금 등장하며 이는 그가 또 다시 극중 허무의 프레임으로 회귀했음을 알리는 바다. 재등장했을 때 그의 얼굴에 배어있는 짙은 한숨과 찌든 피로감은 그의 도피생활이 순탄치 않았음을 부언하는 제스처인 듯하다. . 이처럼 흑백의 칙칙하고 좁은 사각의 프레임에서 영화의 인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닿지 못하며 저마다의 고독을 품은 채 유리된 존재로 자리매김 된다. 헌데 릴리만은 영화의 카메라의 의해 다르게 해석된다. 그녀는 대부분의 장면에서 어두컴컴한 앙투안의 거처가 아닌 그 외부의 공간에서 존재하고, 카메라는 그 곳에서 손을 맞잡은 채 걸어가는 프랑수아와 릴리를 롱숏의 앵글을 통해 한 프레임에 담아낸다. 아울러 외화면의 음악까지 삽입함으로서 영화는 릴리라는 인물의 존재를 이전에 등장한 인물들과 다른 층위에서 해석되도록 인물을 하나의 관념으로 탈바꿈시킨다. (릴리의 입장에서 볼 시엔 프랑수아 역시 그녀에게 마찬가지의 맥락으로 해석된다.) . 근방에 있는 인물조차 한 화면에 담기를 거부하며 시종 좌우로 카메라를 움직여 대화의 엇갈림을 포착했던 영화는 프랑수아와 릴리의 대화 장면에서는 이전과 달리 오버 더 숄더 숏을 사용하여 누군가 말할 때 듣는 이의 주관을 개입시킴으로서 이들이 서로에 고무되어 서로간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앞서 줄곧 등장한 대화 장면에서의 지독한 전제는 이 사소한 필치를 곧 영화적 희망으로 변모시킨다. 허나 단시간에 끝을 보였던 지난해의 혁명처럼, ‘해산’이라는 앙투안의 말 한마디에 와해된 그들의 조직처럼, 영원할 것 같았던 그들의 관계 역시 프레임에서 종말을 맞이한다. . 프랑수아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파졸리니를 닮았다 말하는 그때의 집에서 서로는 같은 옷에 대한 의견을 달리 말하는 데 이때의 카메라는 이질적이게도 갑자기 이들을 갈라놓는다. 이어서 릴리의 심리에 큰 작용을 가할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릴리는 고된 지난날을 뒤로한 채 결혼이라는 안정적 삶의 가도에 진입한 그녀의 친구와 더불어 자신에게 미국에서의 일자리를 제안하는 한 남성을 연이어 만나게 된다. 혁명의 활기가 지나고 그 이후 찾아온 희망의 유통기한마저 다할 무렵 그녀는 프랑수아와의 관계가 담보할 수 없는 세속적 삶에 유혹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앞서 그들을 뚝 떼어놓았던 카메라는 인물의 내적 흔들림에 대한 전조였던 걸까. 자신에게 일자리를 제안한 남성의 작업실 쇼파에 앉아 릴리는 오랫동안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그 순간 영화는 프랑수아와의 희망을 암시할 때 줄곧 사용됐던 ost를 흘려보낸다. 그 때의 음악은 프랑수아가 그녀에게 선사한 낭만적 희망의 종결과 더불어 일자리를 제안하는 남성이 가져올 세속적 희망의 시작을 동시에 알리며 그 순간 릴리의 눈물은 그 사이에서 고뇌하는 이의 딜레마를 표상한다. . 앞서 언급한 프레임의 분할은 프랑수아에게 역시 불안의 전조였을까? 릴리와의 잠자리에서 갑자기 깨어난 프랑수아는 격한 감정을 보이며 릴리에게 그녀가 자신을 떠나가는 꿈을 꾸었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우리가 이전과 달리 프랑수아의 꿈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대신 우리는 릴리의 속내가 보다 더 명확히 들어나는 프레임을 마주한다. 그 순간의 릴리는 악몽에 깨어나 눈물을 흘리는 프랑수아를 달래고 있지만 그녀는 프랑수아와 한 프레임 내에 존재하지 않으며 영화는 오로지 그녀의 얼굴만을 클로즈업한다. 심지어 한 침대에 누워 얼굴을 맞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 될 수 없는 존재가 된 셈이다. . 앙투안이 모로코로 떠날 것을 선포한 뒤 프랑수아와 릴리는 새로운 거처를 찾아 떠난다. 그때의 영화는 꿈의 시제가 아니라 현실의 시제임에도 불구하고 뜬금없이 그 순간 이전에 프랑수아가 꿈을 꿀 때 사용했던 아이리스 기법을 다시금 사용하기에 이른다. 이는 릴리와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에 들뜬 프랑수아의 내면이 말 그대로 ‘꿈결 같다는 것’을 들어내는 장치인 것인가? 허나 우리는 곧이어 릴리가 프랑수아에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을 마주한다. 우리는 앞서 보지 못했던 프랑수아의 꿈(릴리가 자신을 떠나는 악몽)을 그제야 현실의 자리에서 보게 된다. 프랑수아는 몽상이라는 비가시적 희망과 릴리라는 가시적 희망 모두에게 배반당한다. . 세상은 시인에게 소재를 주지 못하며 아편은 찰나의 쾌락 그 이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희망을 주던 몽상은 악몽의 형태로 전환된 뒤 마침내 생명력을 얻어 현실에서의 이별로 구현된다. 이제 그는 도대체 어디로 나아가야하는가. 갈 곳 없는 유령에게 남은 건 제 무덤을 찾아가는 죽음의 여정뿐이 아닐까. . 경찰이 집에 들어와 죽은 프랑수아를 발견할 때 영화는 시체가 돼버린 그를 보여주지 않는다. 자신이 제 스스로를 프레임에서 지워내는 자살의 과정을 거쳐야만 그는 허무와 고독의 프레임에서 탈출할 수 있다. 이는 영화의 불굴의 의지가 투영된 저항인 걸까 아니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음에 대한 탄식인걸까. 혹은 무덤으로의 회귀란 필수불가결의 전철을 밟은 당대의 유령들에 대한 예의인 걸까.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앙투안의 집에 경찰이 방문하자 프랑수아는 이전의 호기롭던 태도가 무색하게도 자신을 예술가가 아닌 보통의 학생이라 소개한다. <평범한 연인들>은 시인의 패기를 앗아간 그 시대를 낭만적으로 바라보기란 도저히 불가능함을 말한다. <몽상가들>의 대책 없는 자아도취를 지지하는 한 명의 관객임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더욱 동하는 건 <평범한 연인들>이 끄집어낸 유령들의 맨얼굴이다.
손이상
5.0
몽상가(MSG)들 같은 맛은 없으나 맑고 시원한 국물이다.
Indigo Jay
4.0
68 혁명의 불씨가 식어가는 시기에 두 젊은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사회적 멜로.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과 비교도 흥미로움. *2011. 9 영자원에서 첫 감상, 2012.11 서울아트시네마 '우리 시대의 프랑스 영화 특별전'에서 재감상
양기연
5.0
(2016.2.28) . <평범한 연인들>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이 나온 이후 똑같이 68 혁명 당시의 청년들을 소재로 제작된 영화이다. 배우 루이 가렐이 양쪽 모두 출연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평범한 연인들>은 <몽상가들>과 비교해 볼 만한 구석이 꽤 있는 영화이다. 두 작품의 주 무대가 되는 공간은 모두 부르주아의 고급스런 집이며, 두 영화 모두 그 집에 젊은이들이 모여 쾌락을 탐닉하는 모습들이 러닝타임 대부분을 차지한다. . 그러나 <몽상가들>의 젊은이들은 68 혁명이 태동하는 시점에 부르주아의 집으로 모였다가 혁명의 물살과 함께 집을 나와 거리로 향한다면, <평범한 연인들>의 젊은이들은 혁명이 실패한 뒤 부르주아의 집으로 모인다. <몽상가들>에서 루이 가렐은 영화 말미에 에바 그린과 마이클 피트에게 당장 거리로 나가야 한다고 일갈하는 혁명가가 되지만, <평범한 연인들>에서 루이 가렐은 혁명이 실패한 뒤 환멸에 빠져 자신의 시조차 저버리려 하며 약을 빨아대는 예술가이다. <몽상가들>은 예술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낭만을 곧바로 혁명의 열기와 맞붙여 두어 68년이라는 과거를 예쁘게 포장하지만, <평범한 연인들>은 오히려 혁명이 스러진 시점에 초점을 맞추고 68년의 맨얼굴을 보려는 영화이다. . (스포일러) . <몽상가들>의 말미에서 젊은이들이 전의를 불태우며 혁명의 거리로 뛰쳐나간 것과 달리, <평범한 연인들>에서 묘사되는 혁명은 조금 이상해 보인다. 후경에서 바리케이드를 쌓거나 무언가를 던져대는 이들의 모습은 전혀 포커스가 맞춰지지 않는다. 정작 카메라가 포커스를 맞추는, 영화의 주요 인물들이 될 젊은이들은 그저 멀뚱멀뚱 서서 이따금 소리를 질러댈 뿐이다. 결국 공권력 앞에 너무나도 쉽게 분쇄되고 마는 그들은 혁명의 실패 역시 노조의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패배감과 환멸에 젖은 채로 부르주아 앙트완의 저택 안으로 모이는 것이다. 대부분 부모가 이미 죽었거나 자진해서 부모의 집을 떠나 돌아가지 않거나 부모를 없는 셈 치는 모습에서 드러나듯 그들은 스스로 뿌리를 도려낸 채 부유하는 존재들이다. 시인인 주인공 프랑소와가 마지막 시위에서 하필이면 손을 다친다는 점, 그 뒤로도 한 동안 시를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이듯 그들에게는 더 이상 예술도 낭만의 대상 혹은 도피처가 되어주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무력감을 지우기 위해 쾌락에 몸을 던질 뿐이다. . 결국 <몽상가들>에서 주 무대가 되는 남매의 집이 68년의 씨네필들의 새로운 극장과 같은 곳이고, 그 안에서 그려지는 쾌락의 탐닉이 그들이 찍는 한 편의 낭만적인 영화라면, <평범한 연인들>에서 앙트완의 집은 실패에 뒤이은 환멸과 무력감으로 가득한 공간이며, 그 안에서 그려지는 쾌락의 탐닉은 그 부정적인 심사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몸부림에 가깝다. 1.85:1의 화면비율로 컬러 화면 안에 담긴 <몽상가들>의 집과 달리, 1.33:1의 화면비율로 흑백 화면 안에 담긴 <평범한 연인들>의 집은 화면을 집어삼킬 듯한 클로즈업 숏들의 쇄도 속에서 폐소공포증을 유발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공간이다. . 어쩌면 낭만에 젖은 <몽상가들>에서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태도가 필립 가렐에겐 조금 불편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중 인물 릴리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혁명 전야>(베르톨루치의 64년작)라는 영화 봤어?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라 말하는 장면은, 대놓고 <혁명 전야>에서 베르톨루치가 보였던 태도가 <몽상가들>에서처럼 변질된 것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 필립 가렐은 68년에 만든 단편 <혁명의 순간들>에서 '반복으로부터 도피하라', '전진하라'고 거듭 외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4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 <평범한 연인들>에서 <혁명의 순간들> 속 한 장면을 인용한다. <평범한 연인들>은 프랑소와의 꿈을 늘 아이리스 기법을 통해 표현하곤 하는데, <혁명의 순간들>의 장면이 바로 그 예 중 하나이다. 결국 열의로 가득한 혁명의 외침은 꿈속에서만 유효한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고백인 셈이다. 저택으로 온 젊은이들 중 유일하게 혁명을 포기하지 않았던 장 크리스토프마저도 자신의 연인과 함께 서점에서 책 몇 권을 훔쳐서는 집밖으로,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나머지 젊은이들은 '전진하'는 대신 그들은 부르주아의 집 안으로 후퇴하였고, '반복으로부터 도피하'는 대신 그들은 무기력하게 그림을 그리거나 마약을 하거나 노래를 듣고 춤을 추거나 섹스를 하며 반복된 일상에 젖고 만다. 영화는 이 반복되는 시간들을, 그리고 그 속에 푹 젖어버린 얼굴들의 클로즈업을 관객 앞에 진열하며, 관객에게도 환멸감과 무력감을 전이시키고자 한다. . 이 와중에 프랑소와가 릴리와 사랑에 빠지면서 영화는 조금 색다른 국면을 맞는다. 갑자기 음악이 적극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는 것도 노골적인 변화 중 하나이다. 시를 쓰지 않던 프랑소와 역시 서서히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다. 혁명의 희망이 스러진 뒤 프랑소와는 사랑에서 다시 희망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는 프랑소와가 갖는 이러한 희망 역시도 관객에게 전이시키려는 듯 보인다. 영화가 굳이 프랑소와의 꿈 장면들을 시각화하는 데서 볼 수 있듯, 영화가 주인공으로 삼고 관객과 가장 밀접한 관계로 설정하고 있는 인물은 단연 프랑소와이다. 그런데 정작 영화를 통틀어 제4의 벽을 깨고 관객에게 말을 걸어오는 유일한 인물은 프랑소와와 사랑을 나누는 릴리이다(그녀는 총 두 번 제4의 벽 너머로 말을 걸어 온다.). 결국 관객은 프랑소와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릴리와 가장 밀접하게 대화를 나누는 입장에 놓임으로써, 프랑소와가 릴리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유사하게나마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릴리가 자신의 친구에게 프랑소와에게서 진실한 사랑을 느끼고 있음을 고백할 때, 관객 역시도 그 고백을 순수한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 그러나 혁명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그 끝에 이르고, 사랑의 시간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그 위기는 음악의 변화와 함께 찾아온다. 영화는 프랑소와와 릴리가 함께 있는 대부분의 시간마다 음악을 삽입하는데, 늘 유사한 멜로디의 그 곡은 제대로 된 끝맺음 없이 뚝 끊기곤 한다. 이처럼 릴리가 프랑소와와 함께 있을 땐 늘 중간에 끊겨 버리던 그 멜로디가, 릴리가 장에게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함께 가자는 제안을 받는 장면에서는 끝까지 모두 흘러 나온다. 그리고 그 씬 이후로 영화는 릴리가 말을 하는 모습을 클로즈업 숏으로 보여주면서도 정작 그녀의 목소리를 음소거하여 들을 수 없게 하는 등, 갑자기 관객으로부터 그녀의 존재를 멀찍이 떨어뜨리고 그녀를 다시 불가해한 존재로 탈바꿈시킨다. . 혁명 실패에 뒤따른 청년들의 무력감을 언제까지고 품어줄 것 같던 집은, 앙트완이 아무렇지도 않게 모로코로 떠나기로 결정함으로써 너무나도 쉽게 그들을 밀어내고 만다. 사실 이 점은 영화 2부(였는지 3부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마지막 숏에서 프랑소와와 뤽이 집밖에 앉아 있고 앙트완이 집안에 있는데 갑작스레 현관 문이 닫힐 때 예견된 바 있다. 그 집은 애초에 그들을 영원히 품어줄 곳이 아니었다. 이제 누군가는 갈 곳을 잃고, 누군가는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게 되고, 누군가는 미쳐 버리고, 누군가는 꾸역꾸역 취직 자리를 알아 보아야 한다. 그들이 무력한 나날을 보내는 순간은 그토록 반복적으로 지리하게 이어졌던 데 반해 그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과정은 한 순간에,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진다. 혁명의 시간은 앙트완이 웃음기 머금고 내뱉는 '해산'이라는 한 마디로 그렇게 쉽게 끝나 버린다. 사랑의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앙트완의 집을 떠난 프랑소와와 릴리가 새로 구한 집으로 짐을 옮길 때 프랑소와는 나름 행복해 보이나, 이때 뜬금없이 영화는 프랑소와의 꿈 장면에서만 등장시켰던 아이리스 기법을 사용한다. 결국 프랑소와가 새 집으로 이사하며 느끼는 행복감마저도 일말의 꿈이라는 듯. 그리고 결국 이사한 당일 릴리는 미국으로 떠날 것이라며 이별을 통보한다. 혁명의 시간이 끝날 때만큼이나 빠르게 사랑의 시간이 끝난다. . 프랑소와의 시는 다시 갈 곳을 잃는다. 프랑소와는 혁명이 실패한 뒤 혁명의 열기가 한창인 꿈을 꾸었던 것처럼, 사랑이 실패한 뒤 사랑의 열기가 한창인 꿈을 꾼다. 그리고 프랑소와는 단 한 숏만에 죽음을 맞는다. 혁명의 시간이, 사랑의 시간이 끝날 때 그러했듯, 그의 시간이 순식간에 끝날 때의 이루 말할 수 없는 허무감. 자신의 시간이 끝나는 그 순간조차 프랑소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사랑의 실패를 통보했던 릴리의 목소리를 통한 나레이션과 혁명의 실패를 상징하는 존재인 경찰관의 목소리를 통한 단 한 마디의 사망 확인으로 자신의 끝을 확인받아야 하는 그 무력감. 그토록 허무하게 그토록 무력하게 혁명은, 사랑은, 그리고 청년은 스러진다. . 영화는 혁명의 희망을 보던 한 청년이 혁명의 실패를 겪은 뒤 무력감에 시달리다 사랑에서 다시금 희망을 찾고 결국 또 한 번의 실패를 겪은 뒤 그 존재 자체가 무너지고 마는 과정을 쫓는다. 지나간 과거에 헛되이 낭만을 덧씌우는 대신 영화는 그 과거의 민낯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무력감과 희망이 자리를 바꾸는 순간마다 관객에게 이를 전이시키는 마술을 선보인다. 68년의 프랑스로부터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멀찍이 떨어진 2016년의 한국에서 단순히 극장 안에 앉아 영화 한 편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대의 공기가 느껴지도록 할 수 있다면, 한 편의 영화가 과연 이보다 더 탁월하게 과거를 반추할 수 있을까?
Eun Hye Choo
4.0
삶과 생활의 거리만큼. 우리는 삶을 살기 위해 시를 쓰고 사랑을 하고 혁명을 이야기하지만 언제나 일상의 유지라는 생활의 차원은 우리를 살지 못하게 한다. 함께 걷던 파리의 골목길들, 새벽의 거리들만 텅 빈 채로 남아있는.
동희
5.0
러브(가스파 노에) 이후에 본 최대의 허무 (소용돌이는 노인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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