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영화많이보는사람4.0재밌다. 총 세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1부는 클라우디오 게랭(1939년생)이, 2부는 호세 루이스 에게아(1940년생)가, 3부는 빅토르 에리세(1940년생)가 만들었다. 1부의 경우 미군이 스페인의 한 가정집에 찾아와 딸을 탐하고 아내를 탐하며 남편과 부딪히는 내용이다. 특히나 미군 역을 맡은 '딘 셀미어'가 상당히 섹시한 역할로 나온다. 내내 삼각 수영복을 입으며 그 위에 에이프런을 걸친 모습까지. 종종 행하는 섹스 어필적인 모습은 에로틱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초기 작품의 느낌도 언뜻 느껴진다. 이것이 스페인...? 2부는 미국인 커플이 어느 스페인 부부의 농장에 찾아와 또 성적인 의미로(..) 분란을 일으키는 내용이고, 3부는 미국 출신 찰리와 세 명의 스페인 친구들, 그리고 침팬지 핑키가 사람 하나 없는 도시에서 지내며 일어나는 일들을 다룬다. 빅토르 에리세의 작품이다 보니 가장 할말이 많아 마지막에 따로 조금 더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이 세 편의 단편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일단 모두 미국인이 나온다. 단편마다 전부 다른 배우들이 나오지만 미국인 남성의 역할만은 '딘 셀미어'가 공통으로 맡으며, 이 미국인은 표현상 '성적'으로 계속 분란을 조장한다. 스페인 남성의 여자를 빼앗거나 추근덕거리는 역할로 나오며 결말에선 모두 끔찍한 꼴을 당한다. (단순하게만 보면 미국이 스페인을 괴롭혀서, 스페인은 미국을 응징하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여기부터는 역사나 외교에는 과문한지라 추측의 영역이긴 한데, 이 세 감독은 공통적으로 어떠한 미국과 스페인의 관계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미국인 남성 캐릭터는 모두 '딘 셀미어'인 것만으로 어떤 뚜렷한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미국인 캐릭터의 결말이나 행동으로 보건데 분명히 악당의 역할이므로 외교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부정적인 감정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특히나 1부에서 무례한 태도로 까불거리는 모습이나, 2부에서 부부를 농락한 후 미국 국가까지 부르는 모습을 보며 더욱더 확실해졌다. 그 후 결말까지 고려해본다면... 다만 짧은 지식으로 간단하게나마 관련 내용들을 찾아보니 두 나라의 관계에서 키워드라고 할만한 것은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시작된 스페인의 혼란스러운 정세 정도이다. 먼로 독트린을 무시하고 미국이 팽창주의적 야욕을 드러낸 미서전쟁에서 스페인 제국은 패배하여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이후 계속 국내외적으로 분쟁이 지속되다가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 정권이 승리하며 스페인의 혼란에 마침내 어두운 마침표가 찍혀버리고 말았다. 프랑코 정권에 적대적이었던 미국은 마셜 플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을 원조해주는 계획)에서 스페인을 제외했으나 이후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다시 외교관계를 회복했다곤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스페인의 신인 감독들이 미국에 악감정을 가질만한 맥락은 잘 모르겠다. 3부에서의 '찰리 고 홈'을 본다면 뭔가 미국의 개입이 과했던 부분이 분명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폭력성에 대한 영화라는 설명이 있다보니 스페인의 외부를 향한 폭력에 대한 이야기(사실 1,2부에서 가장 폭력적인 건 스페인인들이다.)일 수도 있으나 사실 이 관점도 납득은 잘 가지 않는다. '클라우디오 게랭' 감독은 69년에 이 작품을 발표하고 4년 후인 73년에 세상을 떠났고 '호세 루이스 에게아'의 경우는 국내에서 자료를 찾기가 어려우며 '빅토르 에리세'는 이후 영화들에서 타국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현재 읽고 있는 에리세와 관련된 책에서도 이런 맥락의 이야기는 없기 때문에 나로서는 이 감독들의 의중을 알 길이 없다. 일단 생각나는 대로 브레인 스토밍을 해보았으니 혹시 배경을 아시는 분들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빅토르 에리세'의 3부는 꽤나 흥미로운 지점들이 있다. 이후 영화인 <벌집의 정령>과 <남쪽>에서도 전쟁(스페인 내전) 이야기를 했던 에리세답게 이 단편도 전쟁 이야기이다. 하지만 <벌집의 정령>과 <남쪽>에서의 고립된 전원적인 분위기와는 다르게 은근히 분위기가 밝고 심지어 코믹하기까지 하다. (물론 배경은 누가 봐도 전쟁을 겪은 듯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텅 빈 폐허 도시이다.)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신나는 음악도 나오며 뭔가 젊은 감독의 패기가 느껴진달까. 하지만 <남쪽>에서의 희망적인 엔딩과는 달리, 이 단편은 분위기는 가장 밝지만 엔딩은 가장 음울하다. 속은 썩어들어가는데 겉으론 밝게 웃는 척하는 그런 느낌. <벌집의 정령>과 <남쪽>에서의 주인공 소녀들은 '프랑코의 아이들'이며 곧 '빅토르 에리세' 그 자체인데 이 프랑코 독재 정권 하에서 자란 아이들의 트라우마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어두운 듯하다. 다만 이 단편과 <벌집의 정령>, <남쪽>의 엔딩을 순차적으로 비교해봤을 때 빅토르 에리세의 마음의 상처도 점점 희망적으로 치유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안심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을 비아냥 거리는 듯한 침팬지 핑키는, 다른 진지한 에리세의 영화에선 볼 수 없었던 그만의 위트가 보여 정말 영화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좋아요6댓글4
박상민3.51. 최근에 본 <더 킬러스> 생각이 많이 났다. <더 킬러스>는 헤밍웨이의 단편, 호퍼의 그림, 심은경을 공통 주제로 만든 4편의 단편을 엮은 영화다. <더 챌린지스>는 스페인인들과 미국인의 만남, 폭력과 미국인의 죽음, 그리고 딘 셀미어를 주제로 만들어진 단편들의 집합이다. 세 단편 모두에서 딘 셀미어가 연기하는 미국인 청년은 스페인 사람들과 다른 외부인이며, 결말에서는 죽음을 맞는다. 기존의 가정 혹은 마을을 뒤흔드는 미국인의 등장과 이를 불편하게 여기는 스페인 사람(특히 중년 남성들)은 계속 대립한다. 이 대립은 아마도 전후 유럽과 미국 간의 관계(특히 할리우드 영화의 진출과 그 영향)에 대한 신예 감독들의 코멘트가 아니었을까. 2. 그러나 세 편 중 마지막 작품인 빅토르 에리세의 단편은 꽤 독특하다. 앞선 두 편이 노골적으로 스페인인과 미국인 사이의 갈등(민족, 국가간 갈등인 동시에 세대 갈등)을 그려낸다면, 에리세의 단편은 스페인인들과 미국인 딘 셀미어를 같은 집단으로 묶는다. 오히려 이들은 함께 스페인을 여행하는 동료들이며 서로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게다가 앞선 두 편은 한 집만을 배경으로 하거나(게렝), 넓지만 다른 사람들이 없는 벌판을 배경으로 하며(에게아) 텅 빈 배경이 아니라 인물들에게 시선을 돌리게끔 한다. 그러나 에리세는 인물들의 시선을 다시 텅 빈 마을로 돌리며 관객들이 주민 없는 마을을 함께 응시토록 한다. 딘 셀미어가 죽음을 맞는 방식도 에리세의 영화에선 다르다. 앞선 두 편에서 셀미어는 스페인 남성의 폭력에 의해 죽임 당한다. 반면에 에리세의 영화에서 셀미어는 스스로 다이너마이트에 불을 붙이며 여행 동료들과 스스로 최후를 맞는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이 최후를 맞은 이후에 강 건너편에서 등장한다.(그들이 외부에서 마을로 돌아온 것인지, 이미 죽은 유령들인지는 알 턱이 없지만.) 에리세는 그 외에도 침팬지나 돼지 같은 동물들을 적극적으로 등장시킨다든지 여러 차이를 만들고 있다. 이 차이는 미국 영화나 문화를 수용하는 방식, 영화가 사회와 역사를 반영하는 방식, 폭력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 에리세가 게렝이나 에게아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것이 어떤 형태로 <벌집의 정령>과 <남쪽>으로 이어지는지도 함께 생각해본다. (실제로 두 편은 각각 <프랑켄슈타인>과 히치콕을 소환하지 않던가.) 3. 이 영화가 제작되던 60년대에는 이런 시도가 꽤 있었던건지 모르겠으나, 딘 셀미어를 비롯한 미국 배우들의 연기는 스페인어 더빙이 되어있어 입모양이 목소리와 맞지 않는다. 거의 유일하게 셀미어의 목소리가 드러나는 부분은 에게아의 단편에서 그가 미국 국가를 부르는 장면이다. 영어 대사에서 드러나는 실제 목소리와 스페인어 대사에서 가려지는 그의 목소리. 폭력으로 미국인을 응징하던 방식은 스페인어 더빙이라는 제작 방식으로 재차 실현된다.가장 먼저 좋아요를 누르세요댓글0
그냥영화많이보는사람
4.0
재밌다. 총 세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1부는 클라우디오 게랭(1939년생)이, 2부는 호세 루이스 에게아(1940년생)가, 3부는 빅토르 에리세(1940년생)가 만들었다. 1부의 경우 미군이 스페인의 한 가정집에 찾아와 딸을 탐하고 아내를 탐하며 남편과 부딪히는 내용이다. 특히나 미군 역을 맡은 '딘 셀미어'가 상당히 섹시한 역할로 나온다. 내내 삼각 수영복을 입으며 그 위에 에이프런을 걸친 모습까지. 종종 행하는 섹스 어필적인 모습은 에로틱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초기 작품의 느낌도 언뜻 느껴진다. 이것이 스페인...? 2부는 미국인 커플이 어느 스페인 부부의 농장에 찾아와 또 성적인 의미로(..) 분란을 일으키는 내용이고, 3부는 미국 출신 찰리와 세 명의 스페인 친구들, 그리고 침팬지 핑키가 사람 하나 없는 도시에서 지내며 일어나는 일들을 다룬다. 빅토르 에리세의 작품이다 보니 가장 할말이 많아 마지막에 따로 조금 더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이 세 편의 단편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일단 모두 미국인이 나온다. 단편마다 전부 다른 배우들이 나오지만 미국인 남성의 역할만은 '딘 셀미어'가 공통으로 맡으며, 이 미국인은 표현상 '성적'으로 계속 분란을 조장한다. 스페인 남성의 여자를 빼앗거나 추근덕거리는 역할로 나오며 결말에선 모두 끔찍한 꼴을 당한다. (단순하게만 보면 미국이 스페인을 괴롭혀서, 스페인은 미국을 응징하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여기부터는 역사나 외교에는 과문한지라 추측의 영역이긴 한데, 이 세 감독은 공통적으로 어떠한 미국과 스페인의 관계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미국인 남성 캐릭터는 모두 '딘 셀미어'인 것만으로 어떤 뚜렷한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미국인 캐릭터의 결말이나 행동으로 보건데 분명히 악당의 역할이므로 외교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부정적인 감정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특히나 1부에서 무례한 태도로 까불거리는 모습이나, 2부에서 부부를 농락한 후 미국 국가까지 부르는 모습을 보며 더욱더 확실해졌다. 그 후 결말까지 고려해본다면... 다만 짧은 지식으로 간단하게나마 관련 내용들을 찾아보니 두 나라의 관계에서 키워드라고 할만한 것은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시작된 스페인의 혼란스러운 정세 정도이다. 먼로 독트린을 무시하고 미국이 팽창주의적 야욕을 드러낸 미서전쟁에서 스페인 제국은 패배하여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이후 계속 국내외적으로 분쟁이 지속되다가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 정권이 승리하며 스페인의 혼란에 마침내 어두운 마침표가 찍혀버리고 말았다. 프랑코 정권에 적대적이었던 미국은 마셜 플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을 원조해주는 계획)에서 스페인을 제외했으나 이후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다시 외교관계를 회복했다곤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스페인의 신인 감독들이 미국에 악감정을 가질만한 맥락은 잘 모르겠다. 3부에서의 '찰리 고 홈'을 본다면 뭔가 미국의 개입이 과했던 부분이 분명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폭력성에 대한 영화라는 설명이 있다보니 스페인의 외부를 향한 폭력에 대한 이야기(사실 1,2부에서 가장 폭력적인 건 스페인인들이다.)일 수도 있으나 사실 이 관점도 납득은 잘 가지 않는다. '클라우디오 게랭' 감독은 69년에 이 작품을 발표하고 4년 후인 73년에 세상을 떠났고 '호세 루이스 에게아'의 경우는 국내에서 자료를 찾기가 어려우며 '빅토르 에리세'는 이후 영화들에서 타국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현재 읽고 있는 에리세와 관련된 책에서도 이런 맥락의 이야기는 없기 때문에 나로서는 이 감독들의 의중을 알 길이 없다. 일단 생각나는 대로 브레인 스토밍을 해보았으니 혹시 배경을 아시는 분들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빅토르 에리세'의 3부는 꽤나 흥미로운 지점들이 있다. 이후 영화인 <벌집의 정령>과 <남쪽>에서도 전쟁(스페인 내전) 이야기를 했던 에리세답게 이 단편도 전쟁 이야기이다. 하지만 <벌집의 정령>과 <남쪽>에서의 고립된 전원적인 분위기와는 다르게 은근히 분위기가 밝고 심지어 코믹하기까지 하다. (물론 배경은 누가 봐도 전쟁을 겪은 듯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텅 빈 폐허 도시이다.)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신나는 음악도 나오며 뭔가 젊은 감독의 패기가 느껴진달까. 하지만 <남쪽>에서의 희망적인 엔딩과는 달리, 이 단편은 분위기는 가장 밝지만 엔딩은 가장 음울하다. 속은 썩어들어가는데 겉으론 밝게 웃는 척하는 그런 느낌. <벌집의 정령>과 <남쪽>에서의 주인공 소녀들은 '프랑코의 아이들'이며 곧 '빅토르 에리세' 그 자체인데 이 프랑코 독재 정권 하에서 자란 아이들의 트라우마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어두운 듯하다. 다만 이 단편과 <벌집의 정령>, <남쪽>의 엔딩을 순차적으로 비교해봤을 때 빅토르 에리세의 마음의 상처도 점점 희망적으로 치유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안심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을 비아냥 거리는 듯한 침팬지 핑키는, 다른 진지한 에리세의 영화에선 볼 수 없었던 그만의 위트가 보여 정말 영화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박상민
3.5
1. 최근에 본 <더 킬러스> 생각이 많이 났다. <더 킬러스>는 헤밍웨이의 단편, 호퍼의 그림, 심은경을 공통 주제로 만든 4편의 단편을 엮은 영화다. <더 챌린지스>는 스페인인들과 미국인의 만남, 폭력과 미국인의 죽음, 그리고 딘 셀미어를 주제로 만들어진 단편들의 집합이다. 세 단편 모두에서 딘 셀미어가 연기하는 미국인 청년은 스페인 사람들과 다른 외부인이며, 결말에서는 죽음을 맞는다. 기존의 가정 혹은 마을을 뒤흔드는 미국인의 등장과 이를 불편하게 여기는 스페인 사람(특히 중년 남성들)은 계속 대립한다. 이 대립은 아마도 전후 유럽과 미국 간의 관계(특히 할리우드 영화의 진출과 그 영향)에 대한 신예 감독들의 코멘트가 아니었을까. 2. 그러나 세 편 중 마지막 작품인 빅토르 에리세의 단편은 꽤 독특하다. 앞선 두 편이 노골적으로 스페인인과 미국인 사이의 갈등(민족, 국가간 갈등인 동시에 세대 갈등)을 그려낸다면, 에리세의 단편은 스페인인들과 미국인 딘 셀미어를 같은 집단으로 묶는다. 오히려 이들은 함께 스페인을 여행하는 동료들이며 서로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게다가 앞선 두 편은 한 집만을 배경으로 하거나(게렝), 넓지만 다른 사람들이 없는 벌판을 배경으로 하며(에게아) 텅 빈 배경이 아니라 인물들에게 시선을 돌리게끔 한다. 그러나 에리세는 인물들의 시선을 다시 텅 빈 마을로 돌리며 관객들이 주민 없는 마을을 함께 응시토록 한다. 딘 셀미어가 죽음을 맞는 방식도 에리세의 영화에선 다르다. 앞선 두 편에서 셀미어는 스페인 남성의 폭력에 의해 죽임 당한다. 반면에 에리세의 영화에서 셀미어는 스스로 다이너마이트에 불을 붙이며 여행 동료들과 스스로 최후를 맞는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이 최후를 맞은 이후에 강 건너편에서 등장한다.(그들이 외부에서 마을로 돌아온 것인지, 이미 죽은 유령들인지는 알 턱이 없지만.) 에리세는 그 외에도 침팬지나 돼지 같은 동물들을 적극적으로 등장시킨다든지 여러 차이를 만들고 있다. 이 차이는 미국 영화나 문화를 수용하는 방식, 영화가 사회와 역사를 반영하는 방식, 폭력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 에리세가 게렝이나 에게아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것이 어떤 형태로 <벌집의 정령>과 <남쪽>으로 이어지는지도 함께 생각해본다. (실제로 두 편은 각각 <프랑켄슈타인>과 히치콕을 소환하지 않던가.) 3. 이 영화가 제작되던 60년대에는 이런 시도가 꽤 있었던건지 모르겠으나, 딘 셀미어를 비롯한 미국 배우들의 연기는 스페인어 더빙이 되어있어 입모양이 목소리와 맞지 않는다. 거의 유일하게 셀미어의 목소리가 드러나는 부분은 에게아의 단편에서 그가 미국 국가를 부르는 장면이다. 영어 대사에서 드러나는 실제 목소리와 스페인어 대사에서 가려지는 그의 목소리. 폭력으로 미국인을 응징하던 방식은 스페인어 더빙이라는 제작 방식으로 재차 실현된다.
조성호
3.5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전 세계의 경찰이 되려고 노력을 했다. 빅토르 에리세 회고전 서울아트시네마
sentist
2.5
빅토르 에리세의 시선은 그래도 흥미로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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