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클럽
台風クラブ
1985 · 드라마 · 일본
1시간 55분 · 1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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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하던 동네에 거대한 태풍이 몰려온다. 거친 비바람이 부는 어느 밤, 학교에 남은 학생들은 억눌렸던 본성을 서서히 분출한다. 소녀들이 키스하고 소년은 짝사랑했던 소녀에게 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하나 둘 태풍 속에서 미친 듯 춤을 춘다. 학생들의 혼란과 광기를 과감하게 그린 작품. 1986년 낭트영화제 감독상 수상.
쾌감폭발 완벽 필승 조합
크리스 헴스워스 VS 마크 러팔로
크라임 101 · 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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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z
1.5
남성 청소년 호모소셜에서 향유되는 강간문화를 미숙하고 불안한 청춘의 성장과정쯤으로 이해해주지 말라. 남성 청소년의 또래 여성에 대한 극도의 폭력과 위악을 엄마 없이 자란 불쌍한 아이의 발악 정도로 미화해주지 말라. 또래 남성 앞에서 옷 벗고 춤추고, 자기들끼리 어설프게 입술 부비고, 성인 남자와 원조교제하려 드는 여성 청소년의 자학적 섹슈얼리티를 전시하면서, 시골에 유폐된 소녀들이 성적 억압을 스스로 해소하려는 건강한 해방처럼 호도하지 말라. 모든 씬이 분절적이고 산만하게 연출되는 이 영화에서 오로지 켄이 미츠코의 옷을 벗기려고 쫓아다니는 시퀀스만이 매우 길고 연속적이고 자세히 펼쳐지는데 거기서 소마이 신지 감독의 둔감함과 음험함이 여실히 느껴져 괴로웠다. 남은 평생 그 하루를 잊지 못할 미츠코의 트라우마가 상상되어 참담했다. 옷이 찢기고 우는 미츠코를 보고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하는 멍청한 미카미는 (감독이 의도한 대로)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소년 장첸과 같은 어둠 속의 민감한 관찰자가 아니라 폭력을 모른 체하고 묵인하는 방조자일 뿐이다 에드워드 양 고령가소년 같은 섬세함을 기대했더니 이건 뭐 릴리 슈슈만도 못하네. 이딴 걸 그 시절엔 몬트리올이니 동경 영화제에서 상 줬다 한다면.. 아마 야만과 혼란의 시대에 대한 니맘내맘적 동조가 있었기 때문으로 예상되나, 현대의 관객이 어떤 것을 정전 삼고 어떤 것을 버릴 지는 좀 더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하지 않나. 뭘 리마스터링하고 재개봉해서 홍보할지에 관해 분별력을 갖자 제발
뱀과전갈
5.0
이창동은 '청춘'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고 했다. 푸를 청에 봄 춘,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 어린 나이를 그런 아름다운 명사로 부르기엔 그 시기는 너무나도 가혹하다고, 이창동은 말했다. 외부의 세계은 휘몰아치고, 내부의 소우주는 끓어오른다. 이 모든 것은 이유도 없이, 단지 젊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에게 불쑥 찾아온다. 이른 나이에 내면의 혼돈과 외부의 압박을 오롯이 홀로 견뎌내는데, 거기에다 대고 푸른 새싹이 돋아날 시기라며 기성세대가 무책임하게 일컬을 수 있겠는가. 이창동의 논점은 - 젊은 세대는 아무래도 돌아갈 수 없는 시기를 향한 기성세대의 동경에 의해 지나친 낭만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창동의 그런 언급이 있기도 훨씬 전에, 1985년 일본에서 중년의 감독이 청소년들을 향해 영화로써 비슷한 화두를 건넸다. 그 영화는 일부 장면만 따서 얼핏 봤을 때는 ‘젊음 찬가’로 오인할 수도 있다. 전방위로 뿜어대는 에너지에 취한 사춘기 아이들의 왕성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는 영화인가? 아니다.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젊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냐고 말하는, 그 영화는 바로 <태풍 클럽>이다. <태풍 클럽>을 오인하면 안 되는 게, 이 영화는 청춘 영화가 아니다. (필자의 생각은 그러하다.) 안티-청춘, 反 청춘 영화다. 빛나는 젊은 시절?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사춘기는 고통의 연속이고, 우리는 결국 파국으로 치닫고 말 거야.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꽤나 냉소적인 영화다. 즉 <썸머 필름을 타고!>의 감성을 기대하고 가면 큰코다친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태풍 클럽>은 청소년기에 겪는 모든 종류의 고통과 수난을 추상으로써 그려내는 영화다. 그 고통을 소마이 신지는 여러 방면으로 그리지만 아주 과격한 화법으로도 표현하기에, 이 지점에서 관객은 당연히 거북함을 느낄 것이고 - 감독은 이 거북함 마저도 당연히 의도했을 것이다. 이 거북감에서 1차원적으로 '영화가 불쾌하다'라며 평가를 거부하거나 혹평을 내리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을 것이고 그런 평가도 물론 이해한다. 하지만 필자는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이는 유효한 연출이라 주장하고 싶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에서 주인공의 관음 행위가 윤리적으로 옳지 못하다고 해서 영화의 작품성을 비판하는 건 좋은 태도인가?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사랑을 추상으로써 표현하기 위해 관음증이라는 표현 수단을 택한 것이다. <태풍 클럽>도 같은 맥락이다. 사춘기라는 고통과 거북감을 추상으로써 표현하기 위해 하나의 표현 수단을 택한 것이다. <태풍 클럽>으로 돌아와서, 이 영화에서 거북함을 탁월하게 묘사한 몇 개의 장면을 언급하겠다. 카츠에의 등에 남겨진 상처를 본 켄이 책상 위 물건을 뒤엎고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을 비추는 장면. 이 장면은 정말 기이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과장이 아니라, 이 장면을 통해 나는 '영화'의 순기능을 목도했다. 구두로 설명할 수도, 글로도 묘사할 수도, 행동으로 표현할 수도 없고 절대로 형언할 수도 없는 감정선. 우리가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하고 속으로만 느낄 수 있는 거북함과 불편함, 그리고 이상야릇한, 이러면 안 될 것 같지만 불가피하게 피어오르는 연민의 감정마저도, '하나의 연출'만으로 끌어낼 수 있는 예술 매체는 영화뿐일 것이다. 이것이 시네마의 힘이다. 이것이 시네마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고 직감했다.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 리에가 이불 속에 속옷 차림으로 들어가 엄마를 부르짖는 장면에서 분출되는 불쾌하고도 이상한 파토스는 여타 문학이나 연극에선 절대 하지 못하는, 오직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언어라고 언급하고 싶다. 오직 영화만이, 영화만이 정립 가능한. 이런 장면들을 통해 소마이 신지는 청소년기를 지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탁월하게 - 영화적으로 - 묘사했다. 영화 속 청소년들은 내부의 혼돈과 더불어 외부의 태풍을 견뎌낸다. 내부, 학교 안에서의 그들은 정돈되지 못하고 불안정하다. 외부인과의 접촉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연락이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 내부적으론 갈등이 일어나며 연신 부딪히고 만다. 그럴 때마다 그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로 귀결되는 지점이 있다. 바로 음악이다. 그들을 하나로 묶는 연대의 원천이 바로 음악이다. 어라, 이럴 때마다 영화를 보고 있던 나의 입에선 '그러면 안 되는데', 소리가 절로 나온다. 왜 그랬을까? - 이는 영화 연출적인 부분, 즉 영화 외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영화에 음악을 쓰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그건 아니다. 왕가위의 <화양연화>처럼 음악을 끝내주게 잘 사용하여 걸작의 반열에 오른 영화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음악의 남용은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음악을 남용해버리면 영화와 음악이 주객전도되어 관객에게 '뮤직비디오'로 인식되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태풍 클럽>은 이 위험성을 무시하고 음악을 남용한다. 그러나 이것이 궁극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는가? 아니다. <태풍 클럽>은 이 잘못된 선택을 역으로 활용하는 아주 현명한 수를 썼다. 필자는 이 연출점이 바로 <태풍 클럽>이 걸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음악과 함께 연대하면서 관계를 서서히 정돈하는 듯 '보이고', 그들의 끈끈해 '보이는' 연대는 학교 외부를 향하게 된다. 태풍의 비바람을 맞으며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어 낭만을 누리는 것처럼 관객으로 하여금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다소 충격적인 결말을 통해 감독은 음악으로 이루어진 어설픈 연대는 처연하게 해체될 뿐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자살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고, 그들에게 있어 사춘기 속 하나의 인격은 거세된다. 태풍이 완전히 지나간 줄 알았는데 태풍의 중간에 잠시 정착했던 것처럼, 그들의 연대는 깨져 다시 혼돈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질 것임을 암시하고, 그 이후는 철저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은 참혹한 청년기를 관객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겨두고픈 소마이 신지의 욕구가 드러난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그 아무것도 모르는 두 학생의 순수한 뒷모습에서 감독은 다소 악의적인 미래를 꿈꾸며 영화를 마친다. '청춘'은 아무리 생각해도 잔인한 단어다. 아무래도 소마이 신지 또한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태풍 클럽>은 사춘기의 맨살을 보여주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안의 내장마저도 철저히 해부하여 보여주는, 잔혹한 걸작이다. 현재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극강의 영화 중 한 편이니 반드시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24.06.26. CGV 서면 18:30 관람)
지윤
1.5
불안한 시기라는건 알겠으나 좀 작작하길 바랍니다
이동진 평론가
4.0
생의 그 어떤 울타리에도 가둬지지 않는 원시적 에너지의 분출을 그저 바라보았다.
지용
4.0
1. 미카미와 닭들 이 기이한 소동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영화의 주인공 격 인물인 미카미의 관점을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미카미는 학업과 교내 활동(야구)에 충실하며 늘 일찍 (리에를 기다리며) 등교하는 성실한 학생이다. 그의 주변인들 - 어머니의 부재와 알콜 중독 아버지에게 고통받는 켄, 강한 성적 호기심에 휘말린 리에, 금기시된 사랑(동성애) 중인 야스코 커플 - 이 저마다의 이유로 불안과 혼돈에 휩싸여있지만 미카미는 극 중 대부분의 장면에서 체제에 순종적인 캐릭터로 묘사된다. 하지만 미카미의 고통은 또래 친구들의 그것보다 더 광범위한 차원의 것이였으니, 바로 어른(성체)에 대한 불신과 인류(종)에 대한 회의감이다. '개체가 종을 초월할 수 있을까' 라는 중2병 말기 환자스러운 그의 물음에 그의 형은 닭과 달걀의 예시를 들며, "'닭은 날지 못한다'는 명제는 달걀에서부터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라는 모호한 대답을 한다. 미카미의 형은 이어 설명하려 하지만 리에의 등장으로 형제의 대화는 중단된다. 미카미 형의 입을 빌려 표현하긴 했지만 이 장면은 곧 미카미가 세상(어른 사회)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을 대변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단순하고 직관적인 정의와 순수함으로 가득 찬 미카미 자신에 비해 어른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무책임하고 비도덕적이다. 그의 기준에 따르면 우메미야 선생을 제외한 그의 주변 어른들은 이미 모종의 이유로 탈락한 상태고 그 선생조차 마지막 순간에 기회를 잃는다. 태풍에 갇힌 미카미와 술에 취한 선생이 전화하는 장면에서 선생은 미카미의 구조 요청에 잠시 고민에 빠지지만, 이윽고 그의 시점 숏에 나타난 문신 가득한 야쿠자의 위압적인 모습에 짓눌려 요청을 거절한다. 미카미에게 전한 "15년 후엔 너도 나처럼 될 거야" 라는 선생의 말은, 곧 15년 전엔 자신도 미카미와 같았다는 말이 될 수도 있기에 우메미야 선생은 타락한 현재의 자신을 책망 혹은 위로하듯 창문을 열고 폭우를 맞으며 노래를 부른다. 이를테면 미카미의 시선 속 어른들은 이미 날지 못하게 된 닭이며, 아직 병아리인 미카미는 여전히 비상을 꿈꾼다. 자신이 종을 초월한 개체가 되길 바라며 - 2. 아키라와 태풍 태풍에 의해 학교 안에 고립되지 않은 학생은 둘이다. 아키라와 리에. 성숙해질수록 타락한다는 미카미적 관점에 의하면, 결론적으로 아키라는 아직 <태풍 클럽>에 참여할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고 리에는 또래보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버렸다. 아키라는 다른 여자애들에게 동급 이성으로 취급받지 못한다. 수영복 차림의 춤을 염탐하다 걸려도, 그들의 은밀한 관계를 들켜도 소녀들은 그를 위협적인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취급은 연출적으로도 묘사되는데, 오프닝 시퀀스에서 소녀들을 훔쳐보다 들켜서 죽은 개구리 마냥 물에 떠있는 그의 모습 직후 전환되는 씬은 미카미와 켄의 등장이다. 정지된 아키라에 대비해 야구부 복장을 하고 러닝을 하는 그 둘을 트럭킹숏으로 활기차고 속도감있게 담아냄으로써 미카미와 켄 / 아키라 사이 발달적 선을 긋는다. 이후 아키라가 콧구멍에 볼펜을 최대한 많이 집어넣으며 철지난 이홍렬식 코메디를 하는 유아퇴행적 장면은 덤이다. 아키라는 왜 또래보다 신체,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캐릭터가 되어야 했을까? 첫째로 동급생이라는 일종의 군집 안에 그러한 캐릭터가 존재하는 것이 보편적 현실이기 때문이고, 둘째로 태풍에서 의도적으로 격리시키기 위함이다. (세번째 이유는 아래에서) 태풍이 들이닥친 날, 미츠코가 우메미야 선생에게 해명을 요구하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나는 이 장면이 유난히 인상 깊었는데, 그 소동의 촉발 묘사가 잘 짜인 연극처럼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랬다. 감정의 고조는 개인마다 시차가 있기 마련인데, 이 장면에선 미카미를 제외한 학급 전원이 소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마치 출발 신호 총성이 울리자 질주하는 스플린터들처럼 일제히 벌어진 이 소동은 태풍이 학교를 뒤덮는 것과 동일한 시점을 가진다. 태풍이 아이들의 억압되어있던 에너지를 발산하는 트리거가 된 걸까? 소동의 직접 원인은 미츠코의 요구였지만 그것은 단지 계기일 뿐이며, 아이들이 진짜 원한 것은 일상성의 파괴와 혼돈이었다. 우메미야 선생은 학생들을 다그치며 말한다. "너희들 오늘 좀 이상한데??" 소동 직후 창밖을 바라보며 아키라는 '아마도 내가 제일 먼저 비를 봤다' 고 읊조리곤 영화에서 잠시 퇴장한다. 태풍이 반복되는 일상성의 파괴를 상징하고, <태풍 클럽> 멤버들이 그 파괴와 일상이 공존하는 회색지대에 표류하게 되었다면 아키라는 태풍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인 그의 집으로 돌아가 그의 일상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태풍을 감내하기엔 그는 아직 그들보다 어리니까. - 3. 3가지 거짓 진득한 롱숏과 롱테이크, 분절된 숏들로 리얼리즘을 고수하는 이 영화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만화적으로 느껴지는 장면이 3가지 있다. 첫 장면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아키라가 물고문을 당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기절했던 아키라가 정신을 차린 뒤, 그 경위를 묻는 선생에게 들려주는 아키라의 대답이다. 부러 요일과 시각을 자막으로 명시하며 선형적인 시간 구조를 강조하는 이 영화에서 플래시백 사용은 단 두 번 있었는데, 그건 모두 아키라의 증언이었다. 객관과 실재의 영역을 관망하던 카메라가 잠시 아키라 주관의 영역을 포착한 셈인데,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이 장면은 완전한 허구다. 연출적으로 신뢰도가 떨어질 뿐 아니라 여학생들이 깔깔대며 목을 조르고 물로 고문하는 것 자체가 현실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좀 더 그럴듯한 가정은 여학생들에게 발각되자 물속에 숨으려던 아키라는 곧 기절했고(미카미와 켄 등장 직전 숏) 해당 플래시백은 그의 무의식중 떠올린 상상과 어른에게 둘러댈 자기방어적 변명이 만든 거짓말이 아니었나 싶다. 마치 부끄러운 행동을 들킨 어린아이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이것이 위에 언급한 아키라가 상대적으로 미성숙하게 묘사된 세 번째 이유가 된다. 리에는 아키라와 정반대의 이유로 학교에 있지 않았다. 태풍이 불어닥친 그날, 지각한 리에는 세 갈래의 갈림길 -아마도 걸어온 길, 학교가는 길, 도쿄가는 길- 의 부감숏에 이어지는 숏에서 들판에 주저앉아 정체 모를 미소를 짓고 있다. 인근 대마밭을 덮친 태풍을 타고 온 대마향이 그녀의 정신을 취하게라도 한 걸까? 음산하게 쪼개는 그녀의 표정은 이전과는 사뭇 다를 듯한 그녀의 행보를 암시한다. 그 선택은 바로 태풍 속으로 뛰어드는 것. 그녀는 어른의 세계를 직접 경험하고자 한다. 도쿄에서 그녀는 원조교제를 시도하지만 이내 탈주하고 일상으로 복귀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이 시퀀스에서 리에가 골목에서 마주친 오카리나 듀오가 내가 느낀 영화의 두 번째 만화적 연출, 즉 허구다. 이 장면을 허구로 단정지은 이유는 간단하다. 실재하지 않을 법한 캐릭터(난장이 대머리 듀오)가 인위적인 기괴한 움직임(돌리에 탄 듯한 좌우 횡단 운동)을 어울리지 않는 상황(폭우가 쏟아지는 대도시의 밤)에서 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프레임 안에서 그것을 목격한 유일한 자가 불안정한 정신상태의 리에이기 때문이다. 잠시 미카미 형제가 인간 달걀론을 논하던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그 대화의 끝 부분에서 미카미의 형은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냐 물었고 미카미는 에조섬의 염소, 리에는 바다새가 되고 싶다고 대답한다. 오카리나는 '작은 거위'를 뜻하는 이탈리아 지방의 방언으로 마치 아침에 새가 지저귀는 듯한 소리를 내는 것으로 유명한 악기다. 유행가 가사처럼 낭만적인 어른의 사랑을 기대한 리에가 마주한 건 차가운 현실이었고, 좌절한 그녀의 소망이 실재처럼 발현된 것이 바로 오카리나다. 그녀는 그것을 연주함으로써 도시의 바다새가 되길 희망하지만 "오카리나는 아침 악기라서" 라는 모호한 이유로 거절당한다. 리에의 아침은 이미 지난 걸까, 아직 오지 않은 걸까? 이번엔 미카미의 염소를 생각해보자. 성경에서 염소는 예수를 따르는 어린 양의 대척점으로, 어린 양이 순응과 복종을 의미한다면 염소는 저항, 반골의 상징이다. 특히 극동아시아의 염소는 산양(Mountain Goat)과 같이 묶여 불리는데, 양과 산양은 양이라는 종의 근원을 공유하지만 인간에 의해 순종적으로 개량된 가축 / 자유로운 야생 동물이라는 상이한 속성을 가지며, 이 대비를 통해 미카미 본인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교복(신분)을 벗고 자연인으로서 춤과 노래를 부르며 유대감과 해방감을 만끽하던 <태풍 클럽> 멤버들은 이내 하나 둘 잠에 들며 일상으로 복귀하려 하지만 미카미는 잠들지 못한다. 그는 귀환을 거부하고 그만의 성스러운 의식을 행한다. 그건 바로 찬란한 삶을 위한 찬란한 죽음 의식. 종을 구원하기 위한 자기 희생 선언. 그는 죽음으로서 GOAT(인류 역사상 최고, 월클)가 되려 하지만 소마이 신지는 소년이 신화가 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극 중 가장 우스꽝스러운 만화적 연출 -만화 속 캐릭터가 높은 곳에서 떨어졌을 때 상체는 지면에 박혀 보이지 않고 양다리는 V자로 뻗어 꿈틀거리는- 로 응답한다. 태풍 클럽 멤버 5인이 이를 목격하니 추락은 실재가 되지만 우린 앞서 두 장면을 통해 허구의 가능성을 목격했다. 이번엔 사건 자체가 아닌 사건의 상징(죽음)이 부정당한다. 아무래도 소마이 신지는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창작자로서 어린 미카미가 다윈상 후보에 오르는 것이 마음에 걸렸나보다. ... 농담이고, 비록 이 영화가 첫 만남이지만 내가 느낀 소마이 신지는 소년 미카미를 죽일 만큼 모진 사람은 못될 거 같다. 대신 치기 어린 무모한 선택을 꾸짖듯 조롱할 뿐. - 4. 태풍이 지나가고 화창한 월요일이 시작된다. 임시 휴일이지만 아키라와 리에는 친구들을 만나러 학교로 향한다. 어쩐지 아키라는 키가 좀 큰 것 같고 리에는 천진했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듯하다. 잠시 어긋났던 두 친구의 시차가 회복된 걸까? 허리 높이까지 깊게 파인 물웅덩이도 아랑곳하지 않고 넘어가는 두 친구의 모습에서, 나는 마치 <라쇼몽>의 마지막 장면처럼 예정된 좌절과 막연한 희망을 동시에 느낀다. 나는 선생도 아니고 그저 시간 강사 나부랭이였지만 잠시나마 이 나이대 아이들을 지도해 본 경험이 있다. 내가 경험한 사춘기 소년 소녀는 몬스터다. 소년은 속내를 알 수 없이 과묵하거나 천방지축이고 소녀는 두 얼굴의 마녀다. 떡볶이나 빵조가리를 사주면 천사의 미소를 짓다가도 잘못을 지적하거나 짓궂은 장난을 하면 세상 무너진 것처럼 슬퍼하거나 분노한다. 나는 이들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 언젠가 소년 시절 나를 겪었던 어른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실 내가 뭘 해줄 수 있겠나, 그들은 뭘 할 수 있을까. 그저 기댈 어깨가 필요하면 잠시 빌려주고, 부디 너무 아프진 않기를 바랄 뿐이지.
manam
1.0
감사합니다. 요즘 스트레스 받는일 있었는데 이거보고 정신병 걸렸습니다. 병원가기 애매했는데 이제 정신병원에 가야겠습니다
12
2.0
예상 평점 높은 것도 짜증남
P1
4.0
뭐가 뭔지 모르겠다만 한 순간 멀쩡한 책상에 커터칼로 흠집을 내고 있고, 책상에 책이 한 가득 쌓이면 마음 속에서 거센바람이 불 정도의 짜증이 걷잡을 수 없이 치밀다가도 설명은 하기 싫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태풍의 눈처럼 다시 잠잠해져 고요했다가도 다시금 창문을 열어재끼면 비바람이 몰아쳐, 정신없이 안정되지 못한 마음 속을 휘젓는 뭉클함. - 사춘기가 무엇이였든 잊어버린 지 오래다. 이해하기도 힘들지만 그걸 어렴풋이 환기시켜주는 사춘기 그 자체의 영화로써 만족한다. 다녀왔습니다 어서오렴 다녀왔습니다 어서오렴 다녀왔습니다 어서오렴 다녀왔습니다 어서오렴 인생의 현타는 어른도 지금도 앞으로도 진행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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