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브 마이 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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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아름다운 부부 가후쿠와 오토. 우연히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가후쿠는 이유를 묻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2년 후 히로시마의 연극제에 초청되어 작품의 연출을 하게 된 가후쿠.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전속 드라이버 미사키를 만나게 된다. 말없이 묵묵히 가후쿠의 차를 운전하는 미사키와 오래된 습관인 아내가 녹음한 테이프를 들으며 대사를 연습하는 가후쿠. 조용한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점점 마음을 열게 되고, 서로가 과거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눈 덮인 홋카이도에서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은 서로의 슬픔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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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Live Through the Long, Long Days, and Through the Long Nights (Oto)

Rondo in D Major, K. 485 (Live)

We'll Live Through the Long, Long Days, and Through the Long Nights (Oto)

We'll live through the long, long days, and through the longnights (SAAB 900)

Drive My Car (Hiroshima)

Drive My Car (Cassette)



chan
4.5
스포일러가 있어요!!
이동진 평론가
5.0
치유도 창작도 그 핵심은 어디에 어떻게 귀기울일 것인가의 문제라는 경청의 걸작.
성유
4.5
어쩌겠어요. 또 살아가는 수밖에.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Cinephile
4.0
각자의 언어 같은 자기 이야기만을 연기할 뿐인 게 삶이라면, 허구와 현실을 불문한 미지의 기원에서 흐르는 이야기도 신비 그 자체로서만 수용되어야 한다. 희곡 '바냐 삼촌'을 해체해 재조립한 서사를 작중 연극 안팎의 이중 서사로 구성시킨 각본 역량이 좋다.
뭅먼트
4.5
무엇이 떠오르는지도 무엇이 가라앉는지도 모르지만, 끊임없이 일렁여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저 바다와 같이.
재원
4.5
예고 없는 작별의 상실감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 영화는 끝내 특별한 답을 알려주진 않았지만,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나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됐다, 그거면 됐다. 살짝 머금은 그녀의 미소가 햇살 같은 여운을 남겨줬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손정빈 기자
5.0
살기 위해서 그 폐허를 노려보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의 러닝 타임은 180분이다. 영화 내에서 벌어진 사건의 총량이 많아 과도하게 시간을 들인 게 아니다. 사건이 모두 끝난 자리에서 시작된 고통을 응시하고, 그 아픔의 실체에 다가가려면 그만큼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했을 뿐이다. 영화는 시간을 신중히 쓴다. 3시간을 1시간 같이 느끼게 하는 눈요기는 없다. 오히려 상영 시간이 실제보다 더 길다는 실감을 준다. 그렇게 해야만 이 시간을 함께 견딘 관객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말 하나를 남길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살아야 한다.'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라는 남자가 있다. 연극 배우이자 연출가인 그는 아내가 외도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하지만 모른 척했다. 그러고나서 얼마 뒤 아내는 급사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났고, 그는 여전히 연극을 만들고 있으며, 연출을 제안받아 히로시마로 간다.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이 작품은 아내가 죽었던 그 때 했던 바로 그 희곡이다. <바냐 아저씨>를 만들기 위해 간 곳에서 가후쿠는 뜻밖에 아내와 외도했던 남자를, 그리고 자신의 차를 대신 몰아준다는 운전기사를 만난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소설은 하루키의 단편답게 모호함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하마구치 감독은 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를 기둥으로 <바냐 아저씨>에 관한 분량을 늘리고(이 소설 속에 이미 <바냐 아저씨>에 관한 얘기가 있다), <여자 없는 남자들>의 다른 단편 속 내용을 차용해 각본을 완성했다. 그는 이 방법으로 원작의 빈 공간을 메우려 하고, 그렇게 관객과 함께 가후쿠라는 남자의 마음 속으로 서서히 접근하기 시작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이야기를 많이 담아놔 도무지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영화다. 애초에 이 영화는 소설과 희곡과 하마구치 감독이 직접 쓴 각본이 뒤섞인 채로 만들어졌고, 가후쿠의 여정과 아내 오토가 죽기 전에 풀어냈던 이야기, 그리고 가후쿠가 만들어가는 <바냐 아저씨>의 대사와 이 작품을 준비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혼재된 이야기가 아닌가. 게다가 이 영화 속 사건이라고 할 만한 건 짧게 보여지는 아내의 외도와 죽음이 전부. 나머지 긴 시간은 전부 가후쿠의 마음에 남겨져 있는 삶의 잔해를 들여다 보는 데 쓰인다. 말하자면 하마구치 감독은 '드라이브 마이 카'에 이야기를 많이 담아놓고도 그 이야기들이 보여주는 사건의 기승전결을 따라가지 않는다. 대신 사건의 파장이 한 인간의 내면에 남겨놓은 것만을 시종일관 노려본다. 그 속을 골똘히 응시하다보면, 이 짜깁기 된 영화 속 짜깁기 된 이야기들이 종국에 한 자리에 모여 회한과 고백과 변화로 나타나는 걸 목도하게 된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관객을 이해시키기보다 느낄 수밖에 없게 한다. 이 영화적 경험은 하마구치 감독이 왜 현재 세계 영화계가 가장 주목하는 예술가인지 알게 한다. 하마구치 감독은 "인간의 내면을 그리는 데는 영화보다 소설이 적합하다"고 했지만, 그는 어떤 경우엔 영화가 소설보다 사람의 마음을 더 잘 담아낼 수도 있다는 걸 증명한다. 그는 차를 함께 탄다는 것만으로도, 차에 탄 사람들의 위치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눈이 향한 방향으로, 말로, 침묵으로,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로 폐허가 된 한 남자의 속을 조심스레 드러내 보인다. 하마구치 감독은 영화라는 도구가 얼만큼이나 마음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담아낼 수 있을지 실험하는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움직임만이 운동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면, '드라이브 마이 카'를 결코 정적인 영화로 부를 순 없다. 이 영화는 어쩌면 아주 단순한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말하라, 그리고 들어라. 더 정확히 말하기 위해 애쓰고 더 똑바로 듣기 위해 노력하라.' 하마구치 감독에게 세계는 언제나 부조리하고, 인간은 모두가 수수께끼다(영화 초반 가후쿠는 대표적인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하고 있다). 어떤 것도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는 건, 우리가 마주한 비극적 숙명 같은 것이다. 나도 타인도 세상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인간은 살아있다고 할 수 없을 테니 살고싶다면 혹은 살기 위해서라면 말해야 하고, 들어야 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에필로그 시퀀스 직전에 <바냐 아저씨>의 마지막 대목을 공연하는 모습을 길게 보여준다. '소냐'는 '바냐 아저씨'에게 우리 삶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끝까지 살아보자고 말한다("사는 거예요. 길고 긴 낮과 오랜 밤들을 살아 나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주는 시련들을 참아내요."). 소냐를 연기하는 배우는 이 대사를 목소리를 통해 말하는 게 아니라 수화(手話)로 보여주고 있다. 이 연극 속 소냐의 말은 그렇게 어떻게든 말해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관객은 소냐의 수화를 어떻게든 듣고(보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우린 그 모습을 보고 끝내 무언가를 느끼고 있지 않은가.
케이크
2.0
<Drive My Car : 자폐적 내적 인간을 치료 캠프에 보내다.> 1. <Drive My Car>는 상당한 감동도 주었지만, 사실 그 감동은 영화가 아니라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에서 비롯하였다. 영화만 두고 봤을 때 <Drive My Car>는 실망스러웠다. 일본 근대 문학에서 많이 접했던, 과거의 상처와 내면의 고독으로 움츠려 들어,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한 자폐적인 인물들. 이러한 캐릭터를 비판적으로 보았던 가라타니 고진은 이를 '내적 인간'이라고 명명했다. 이 영화는 '내적 인간'들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그 '내적 인간'의 치유를 위해서 영화는 연극제라는 이름의 "극적인 (Theatical) 치료 캠프"를 제공한다. 그리고 PC하게도 그 치료 캠프는 외국인에 대한 차별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위계도 없다. 나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서사는 문제적 인물의 머리에 세뇌 기계를 씌우는 것과 다를 바없다고 생각한다. 광활한 설경의 아름다움은 그 세뇌 기계가 투사하는 VR이다. 세뇌 기계가 산출하는 메세지는,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에서 소냐의 마지막 대사이다. 연극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그 대사는 원래 <햄릿>에서 "사느냐 죽느냐" 대사만큼이나 유명하다. 그러니까, 메세지의 호소력은 원작에 의존하되, 그 메세지를 구현하는 구조는 시진핑핑핑이가 위구르에 운영하는 세뇌 캠프만큼 잘 못 만들어 졌다. 2. 그러나, 수화를 하는 소냐의 마지막 대사와, 연이어 덧붙여진 코시국의 일상의 모습이 강렬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3. <Drive My Car>의 주인공 가후쿠는 <바냐 아저씨>의 바냐에 대응된다. 그런데, 체호프의 원작 희곡에서 바냐는 소심하고 움츠려 있는 중년 남성이지만, 반사회적이고 폭력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극의 결정적인 순간에 폭발해서 총을 꺼내들어 쏴제끼기도 한다. 그러한 바냐 아저씨마저도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일상의 삶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라고 위로를 받는정 것이 체호프의 원작에서 마지막 소냐 대사의 의미이다. 그런데, <Drive My Car>에서 남자 주인공은 어떠한가? 단,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발산하지 않는다. 아내가 바람 피는 것을 목격한 순간에도 화를 낼 줄 모르며, 주변의 여성들의 접근도 전부 거절한다는 점에서, 그는 엘레나를 연모하는 <바냐 아저씨>의 바냐와 달리 남성성을 거세당한 일본식 '내적 인간'의 전형이다. 그리고, 그 폭력성을 대신 발휘하는 것은 연극 처음에 바냐 역할을 맡았던 젊은 배우 '미치코'이다. 이는 마치 '바냐'라는 캐릭터에서 폭력적이고 반사회적인 면은 뚝 잘라다가 다른 캐릭터에게 용역을 준 것처럼 보인다. "상처는 짊어졌지만 타인에게 피해주지 않는 순수하고 착한 나"라는 바냐의 속성만 주인공에게 계승한 것이다. 그리고 그 폭력성과 반사회성에 대해서 영화가 훈계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지점은 종종 눈에 띈다. '미치코'가 사회인으로써 부적격이라는 대사가 직접 돌출되며, 그는 연극 연습 도중 경찰에게 잡혀가는 것으로 서사적 징벌을 받는다. 그러니까, <Drive My Car>의 주인공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소냐의 대사로 위로를 받은 것은 그가 타인에게 피해 주지 않고, 자신의 사회적 역할에 충실하며, 차오르는 감정을 묵묵히 자신의 내면으로 억누르고 또 억누르는, 전형적인 일개미 같은 일본인이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에서 소냐의 위로가 무조건적이라면, <Drive My Car>에서 소냐의 위로는 조건적이다. (작가에 의해 작위적으로 구성된) 고통을 겪고도 엇나가지 않는 것에 대한 보상이다. 4. 일본이 유별나지만, 왜 동양인들은 자신의 감정을 발산하거나 화를 폭발하거나, 하는 상황을 적대시하는 걸까? 일본 영화에서 내키는 대로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들은 야쿠자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일본 야쿠자 영화가 생동감 있고 매력적인 것일까? 일본 애니메이션에서의 중2병스러울 정도로 과시적인 자기 표현은 일상에서의 대리 만족을 위한 과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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