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환5.0영화와 관객은 과거의 비극으로부터 무심하다. 내내 들끓어놓고 한 번도 뜨거웠던 적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무섭게 다뤄놓고 정작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서늘하리만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과거의 비극을 유흥으로 소비하는 과정에서 피로 물든 부끄러운 역사와 이를 유희하는 현 세대를 향한 자조적 조롱(그리고 사과). . .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의 연출 감각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 말도 안 된다. 본인의 가장 최신작이 어떻게 이렇게 고전적이면서, 가장 세련될 수가 있을까. 어떻게 자신의 색채를 잊지 않으면서 동시에 가장 실험적이고 독창적이라는 이 문장이 성립하게 된 걸까. 3시간 반이 넘는 러닝타임 속에서 그간 스콜세지 영화에서 잘 경험하지 못했던 강렬한 몇몇의 이미지들도 인상적이었지만, 이상한 눈썰미를 지닌 건지, (물론 엔딩을 제외하자면) 처음 몰리의 집에 방문했을 때 책상에 널브러진 퍼즐들이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다. 단언하건대 이 퍼즐엔 어떤 숨겨진 의도조차 없겠지만. 퍼즐이 가장 먼저 생각난 김에 첫 문단으로 적어본다. 모든 퍼즐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액자를 완성하는 영화라고 표현해 보자. 그 그림은 과연 누가 늑대인지를 찾아보는 그림일 것이다. 퍼즐은 테두리부터 맞춰져있다. 이제 조금 바꿔서 표현하자면, 퍼즐은 비극을 다룬다. 흩어져있던 사건과 피의 살점들이 하나씩 맞춰지면서 그때의 비극을 프레임 안으로 박제한다. 영화의 프레임은 스크린이 될 것이다. 이제 와서는 겨우 우리들의 유희거리가 되어버린 모든 과거의 비극들을 다루는 소비는 너무 멀리 와 버린 탓에 끊을 수도 없다. 마치 더 먹으면 안 될 것을 이미 알면서도 끊을 수 없는 설탕처럼. 비극을 유흥으로 소비하는 동안, 관객과 비극과의 심리적 거리는 스크린과 무대로부터 몇 발자국 떨어진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안심하며 감상한다. 매체와 관객이 비극을 다루는 그 자리에서 이 영화는 특히 “무심함”을 조명한다. 영화는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 현 세대의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심문한다. 어떤 피를 바쳐 이 땅을 기름지게 만들었는가. 영화는 폭력을 무심하게 다룬다. 술집에서 술을 주문하고, 술잔을 건네받는 것 정도의 무심함. 역겨울 정도로 끔찍한 일들을 수행하는 이와, 이를 명령하는 사람이나, 그에 희생당하는 사람에게 너무도 무심하다. 조사는 없었다.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거대한 태풍 앞에서 고요히 숨죽일 수밖에 없다는 것처럼, 분노도, 복수도, 포용과 용서마저도 무심하고 고요하다. 총소리는 내내 울리는 북소리와도 비슷했고, 죽음엔 비명조차 없다. 아무리 울부짖어도 벌레 소리만큼 다루겠다는 영화의 고집이다. 털사(tulsa)인종 학살(이를 다루는 방식도 무심한 조롱과도 같이 느껴진다.)과 KKK의 언급들은 영화가 다루는 오세이지족 연쇄 살인사건과 같이 폭력으로 일궈냈던 이 커다란 땅의 근본 중 일부에 불과하다. 결국 영화가 마지막까지 무심하게 그려내는 것 역시 우리(현 시대, 혹은 관객)의 무심함 그 자체였다. 무심함은 무책임함을 뜻하지 않는다. 다만, 다 함께 분노하고 안타까워하지만, 그 비극의 자리에서부터 조금 떨어진 카메라나, 스크린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관객의 거리에 있어서 무심함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슬픈 것도 한순간이면 되지 않느냐. 분노하는 것도 한 장면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내내 들끓어놓고 한 번도 뜨거웠던 적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무섭게 다뤄놓고 정작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서늘하리만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부와 권력을 위해 끊을 수 없는 과욕과 결국은 소비할 수밖에 없는 우리 세대의 매체로 인해 누가 과연 스스로 당뇨에 걸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절대로 좁힐 수 없는 이 거리를 거부할 수 없다면 적어도 의식(인식)이라도 하라며 끝이 난다. 영화는 역사의 실패를 인정한다. 그리고 영화의 실패(한계) 역시 인정한다. 영화 스스로가 모든 백인 남성과 영화를 대표하여 사과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어떠한 교훈 대신, 피로 물든 부끄러운 역사와 이를 유희하는 현 세대를 향한 조롱인 셈이다. 영화를 찍고 있는 본인이나, 이를 보고 있을 우리에게 말이다. 영화와 관객의 한계를 영화 본인이 스스로 인정하며 그렇게 영화의 커다란 퍼즐이 완성되었다. 늑대는 그 그림, 프레임, 스크린뿐만 아니라 그 밖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는 점에서 굉장한 영화였다. at Scotiabank Cinema Montreal IMAX좋아요415댓글7
신상훈남5.0어니스트가 증오했던 건, 굶주림이 아니라, 굶주린 늑대가 되어버린 자기 자신이었다. 평생을 배회하다 결국은 정착하게 되는 오클라호마처럼. “말을 안 한다고 해서 뭘 모르는 게 아니거든.” . “달면 달수록 좋지 않아요?” “난 달면 안 돼요.” . “흔들리지 마요. 옳은 길은 좁아요.” . “몇 번이고 울었다. 몇 번이고 내 눈을 둘러싼 악이 흘러나온다. 난 마음을 닫고 선함을 남겨둔다.” . “제겐 후회밖에 없어요. 이미 지옥이에요. 더는 안 돼요. 끝났어요.” “절대 포기하지 마. 널 사랑해.” . “꿈을 꿨어. 당신이 비밀을 다 말해줬고 난 상자에 그것을 담았어. 그러고는 강가에다 던졌어. 꿈에서 우린 행복했어.”좋아요280댓글1
손정빈 기자4.5거장은 아직도 뜨겁고 여전히 서늘하다 (스포 있을 수 있음) 러닝 타임 206분.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신작 '플라워 킬링 문'(원제:Killers of the Flower Moon)의 길고 긴 상영 시간은 곧 이 작품의 정체다. 이 거장은 자신이 풀어내는 이야기를 관객이 3시간26분 간 꼼짝 않고 보기를 요청한다. 어떤 끊어짐도 없이 영화의 페이스에 발을 맞춰 가야 이 작품에 담아낸 것들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래서 '플라워 킬링 문'은 시리즈가 되지 않고 시네마가 돼야 한다. 이 영화가 도전하는 건 미국이라는 나라의 기반과 미국을 떠받치는 멘탈리티에 대한 코멘트. 이런 거대 담론을 제대로 논의하고 이해하려면 이 정도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고, 이 시간과 함께 영화 속 세월을 오롯이 경험해야 한다는 게 스코세이지 감독의 판단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애플TV+라는 플랫폼을 선택하면서 동시에 극장 개봉을 관철했다. 데이비드 그랜 작가가 2017년에 내놓은 동명 논픽션을 영화로 만든 '플라워 킬링 문'은 역시나 스코세이지스럽다. 1920년대 오클라호마를 배경으로 원주민 오세이지 부족이 막대한 오일머니를 벌게 된 뒤 이 돈을 노리고 접근해 충분히 시간을 들여가며 이들을 하나 둘 제거해가는 백인 집단의 이야기는 탐욕-범죄-권력-전락으로 이어지는 그의 갱스터 영화를 닮아 있다. 스코세이지 감독의 두 파트너 로버트 드 니로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등장 역시 이것이 '스코세이지식(式) 영화'라는 걸 명확히 한다. 원작에 담긴 방대한 이야기를 치밀하고 유려하게 풀어내는 거장의 솜씨는 이번에도 긴 러닝 타임을 너끈히 감당해낸다. 스코세이지 감독이 만든 영화 중 가장 큰 제작비인 2억 달러(약 2700억원)를 쏟아 부었다는 게 방증하듯 역작이며 노작이다. '플라워 오브 킬링 문'의 텍스트는 '비열한 거리' '좋은 친구들' '카지노' '아이리시맨' 등과 유사하지만, 콘텍스트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와 맞닿아 있다. 조던 벨퍼트가 저지른 천문학적인 규모의 주식 사기 실화로 월가의 탐욕을 넘어 미국 사회를 좀먹는 병폐를 지적했던 스코세이지 감독은 약 100년 전 오일 머니를 둘러싸고 벌어진 오세이지족 살인 사건을 통해 미국 주류 사회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유한 패악의 역사를 상기한다.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어니스트(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끝내 고백하지 못한 한 가지 진실에 불을 들이밀어 기어코 밝혀냄으로써 그때 그 비극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실토한다. 스코세이지 영화 세계를 성실히 복습해온 관객에겐 이 스토리와 연출 방식에 일부 기시감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이 웬만한 영화가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있다는 건 명백하다. 스코세이지 감독 영화가 으레 그렇듯 이 작품 역시 배우 보는 맛이 있다. '플라워 킬링 문'에서 드 니로와 디캐프리오가 보여준 연기를 그들이 해낼 수 있는 최고 수준의 퍼포먼스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 명배우들의 클래스는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브렌던 프레이저, 제시 플레먼스 등의 연기 역시 뛰어나다(드 니로·디캐프리오·프레이저는 오스카 남우주연상 수상자다). 그래도 가장 눈에 띄는 배우는 몰리를 연기한 릴리 글래드스톤이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글래드스톤과 줌미팅으로 만나 뒤 곧바로 그를 낙점한 것으로 알려졌다. 컴퓨터 화면을 넘어서 느껴지는 눈빛에서 본능적으로 글래드스톤이 몰리를 해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스코세이지 감독의 결정에 화답하듯 이 배우는 자신의 가문과 오세이지족이 맞닥뜨린 비극을 그 강렬한 눈에 모두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 작품에서 능동적인 범죄자는 사실상 드 니로가 연기한 윌리엄 헤일 한 명 뿐이다. 디캐프리오가 맡은 어니스트를 포함해 헤일의 범죄 행각에 얽힌 이들은 대개 헤일과 그가 내린 명령에 복무하며 푼돈을 받아 챙기는 수동적인 인물들이다. 말하자면 '플라워 킬링 문'이 더 부각하려는 미국의 폭력의 역사는 어니스트처럼 사는대로 생각하는 성찰 없는 자들이 저지른 만행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시키는 자, 시키는대로 하는 자, 방관하는 자 모두를 공동정범으로 보는 것 같다. '플라워 킬링 문'은 1942년생 80대 노장이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뜨겁고, 여든이 넘어서도 현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만이 해낼 수 있을 정도로 서늘하다.좋아요209댓글2
뭅먼트4.0광기를 넘어서는 역겨움과 축복을 넘나드는 저주, 그 속에선 고요를 찢어발기는 비명들이 넘실댄다. 그들의 통한한 북소리는 백 년이 지난 지금도 널리 울려 퍼지고 있다, 이 영화는 그 소리의 일부분이 되었다.좋아요174댓글0
정환
5.0
영화와 관객은 과거의 비극으로부터 무심하다. 내내 들끓어놓고 한 번도 뜨거웠던 적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무섭게 다뤄놓고 정작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서늘하리만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과거의 비극을 유흥으로 소비하는 과정에서 피로 물든 부끄러운 역사와 이를 유희하는 현 세대를 향한 자조적 조롱(그리고 사과). . .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의 연출 감각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 말도 안 된다. 본인의 가장 최신작이 어떻게 이렇게 고전적이면서, 가장 세련될 수가 있을까. 어떻게 자신의 색채를 잊지 않으면서 동시에 가장 실험적이고 독창적이라는 이 문장이 성립하게 된 걸까. 3시간 반이 넘는 러닝타임 속에서 그간 스콜세지 영화에서 잘 경험하지 못했던 강렬한 몇몇의 이미지들도 인상적이었지만, 이상한 눈썰미를 지닌 건지, (물론 엔딩을 제외하자면) 처음 몰리의 집에 방문했을 때 책상에 널브러진 퍼즐들이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다. 단언하건대 이 퍼즐엔 어떤 숨겨진 의도조차 없겠지만. 퍼즐이 가장 먼저 생각난 김에 첫 문단으로 적어본다. 모든 퍼즐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액자를 완성하는 영화라고 표현해 보자. 그 그림은 과연 누가 늑대인지를 찾아보는 그림일 것이다. 퍼즐은 테두리부터 맞춰져있다. 이제 조금 바꿔서 표현하자면, 퍼즐은 비극을 다룬다. 흩어져있던 사건과 피의 살점들이 하나씩 맞춰지면서 그때의 비극을 프레임 안으로 박제한다. 영화의 프레임은 스크린이 될 것이다. 이제 와서는 겨우 우리들의 유희거리가 되어버린 모든 과거의 비극들을 다루는 소비는 너무 멀리 와 버린 탓에 끊을 수도 없다. 마치 더 먹으면 안 될 것을 이미 알면서도 끊을 수 없는 설탕처럼. 비극을 유흥으로 소비하는 동안, 관객과 비극과의 심리적 거리는 스크린과 무대로부터 몇 발자국 떨어진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안심하며 감상한다. 매체와 관객이 비극을 다루는 그 자리에서 이 영화는 특히 “무심함”을 조명한다. 영화는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 현 세대의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심문한다. 어떤 피를 바쳐 이 땅을 기름지게 만들었는가. 영화는 폭력을 무심하게 다룬다. 술집에서 술을 주문하고, 술잔을 건네받는 것 정도의 무심함. 역겨울 정도로 끔찍한 일들을 수행하는 이와, 이를 명령하는 사람이나, 그에 희생당하는 사람에게 너무도 무심하다. 조사는 없었다.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거대한 태풍 앞에서 고요히 숨죽일 수밖에 없다는 것처럼, 분노도, 복수도, 포용과 용서마저도 무심하고 고요하다. 총소리는 내내 울리는 북소리와도 비슷했고, 죽음엔 비명조차 없다. 아무리 울부짖어도 벌레 소리만큼 다루겠다는 영화의 고집이다. 털사(tulsa)인종 학살(이를 다루는 방식도 무심한 조롱과도 같이 느껴진다.)과 KKK의 언급들은 영화가 다루는 오세이지족 연쇄 살인사건과 같이 폭력으로 일궈냈던 이 커다란 땅의 근본 중 일부에 불과하다. 결국 영화가 마지막까지 무심하게 그려내는 것 역시 우리(현 시대, 혹은 관객)의 무심함 그 자체였다. 무심함은 무책임함을 뜻하지 않는다. 다만, 다 함께 분노하고 안타까워하지만, 그 비극의 자리에서부터 조금 떨어진 카메라나, 스크린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관객의 거리에 있어서 무심함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슬픈 것도 한순간이면 되지 않느냐. 분노하는 것도 한 장면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내내 들끓어놓고 한 번도 뜨거웠던 적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무섭게 다뤄놓고 정작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서늘하리만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부와 권력을 위해 끊을 수 없는 과욕과 결국은 소비할 수밖에 없는 우리 세대의 매체로 인해 누가 과연 스스로 당뇨에 걸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절대로 좁힐 수 없는 이 거리를 거부할 수 없다면 적어도 의식(인식)이라도 하라며 끝이 난다. 영화는 역사의 실패를 인정한다. 그리고 영화의 실패(한계) 역시 인정한다. 영화 스스로가 모든 백인 남성과 영화를 대표하여 사과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어떠한 교훈 대신, 피로 물든 부끄러운 역사와 이를 유희하는 현 세대를 향한 조롱인 셈이다. 영화를 찍고 있는 본인이나, 이를 보고 있을 우리에게 말이다. 영화와 관객의 한계를 영화 본인이 스스로 인정하며 그렇게 영화의 커다란 퍼즐이 완성되었다. 늑대는 그 그림, 프레임, 스크린뿐만 아니라 그 밖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는 점에서 굉장한 영화였다. at Scotiabank Cinema Montreal IMAX
이동진 평론가
4.0
진창에 빠진 채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자의 비밀과 거짓말.
신상훈남
5.0
어니스트가 증오했던 건, 굶주림이 아니라, 굶주린 늑대가 되어버린 자기 자신이었다. 평생을 배회하다 결국은 정착하게 되는 오클라호마처럼. “말을 안 한다고 해서 뭘 모르는 게 아니거든.” . “달면 달수록 좋지 않아요?” “난 달면 안 돼요.” . “흔들리지 마요. 옳은 길은 좁아요.” . “몇 번이고 울었다. 몇 번이고 내 눈을 둘러싼 악이 흘러나온다. 난 마음을 닫고 선함을 남겨둔다.” . “제겐 후회밖에 없어요. 이미 지옥이에요. 더는 안 돼요. 끝났어요.” “절대 포기하지 마. 널 사랑해.” . “꿈을 꿨어. 당신이 비밀을 다 말해줬고 난 상자에 그것을 담았어. 그러고는 강가에다 던졌어. 꿈에서 우린 행복했어.”
손정빈 기자
4.5
거장은 아직도 뜨겁고 여전히 서늘하다 (스포 있을 수 있음) 러닝 타임 206분.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신작 '플라워 킬링 문'(원제:Killers of the Flower Moon)의 길고 긴 상영 시간은 곧 이 작품의 정체다. 이 거장은 자신이 풀어내는 이야기를 관객이 3시간26분 간 꼼짝 않고 보기를 요청한다. 어떤 끊어짐도 없이 영화의 페이스에 발을 맞춰 가야 이 작품에 담아낸 것들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래서 '플라워 킬링 문'은 시리즈가 되지 않고 시네마가 돼야 한다. 이 영화가 도전하는 건 미국이라는 나라의 기반과 미국을 떠받치는 멘탈리티에 대한 코멘트. 이런 거대 담론을 제대로 논의하고 이해하려면 이 정도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고, 이 시간과 함께 영화 속 세월을 오롯이 경험해야 한다는 게 스코세이지 감독의 판단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애플TV+라는 플랫폼을 선택하면서 동시에 극장 개봉을 관철했다. 데이비드 그랜 작가가 2017년에 내놓은 동명 논픽션을 영화로 만든 '플라워 킬링 문'은 역시나 스코세이지스럽다. 1920년대 오클라호마를 배경으로 원주민 오세이지 부족이 막대한 오일머니를 벌게 된 뒤 이 돈을 노리고 접근해 충분히 시간을 들여가며 이들을 하나 둘 제거해가는 백인 집단의 이야기는 탐욕-범죄-권력-전락으로 이어지는 그의 갱스터 영화를 닮아 있다. 스코세이지 감독의 두 파트너 로버트 드 니로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등장 역시 이것이 '스코세이지식(式) 영화'라는 걸 명확히 한다. 원작에 담긴 방대한 이야기를 치밀하고 유려하게 풀어내는 거장의 솜씨는 이번에도 긴 러닝 타임을 너끈히 감당해낸다. 스코세이지 감독이 만든 영화 중 가장 큰 제작비인 2억 달러(약 2700억원)를 쏟아 부었다는 게 방증하듯 역작이며 노작이다. '플라워 오브 킬링 문'의 텍스트는 '비열한 거리' '좋은 친구들' '카지노' '아이리시맨' 등과 유사하지만, 콘텍스트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와 맞닿아 있다. 조던 벨퍼트가 저지른 천문학적인 규모의 주식 사기 실화로 월가의 탐욕을 넘어 미국 사회를 좀먹는 병폐를 지적했던 스코세이지 감독은 약 100년 전 오일 머니를 둘러싸고 벌어진 오세이지족 살인 사건을 통해 미국 주류 사회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유한 패악의 역사를 상기한다.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어니스트(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끝내 고백하지 못한 한 가지 진실에 불을 들이밀어 기어코 밝혀냄으로써 그때 그 비극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실토한다. 스코세이지 영화 세계를 성실히 복습해온 관객에겐 이 스토리와 연출 방식에 일부 기시감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이 웬만한 영화가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있다는 건 명백하다. 스코세이지 감독 영화가 으레 그렇듯 이 작품 역시 배우 보는 맛이 있다. '플라워 킬링 문'에서 드 니로와 디캐프리오가 보여준 연기를 그들이 해낼 수 있는 최고 수준의 퍼포먼스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 명배우들의 클래스는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브렌던 프레이저, 제시 플레먼스 등의 연기 역시 뛰어나다(드 니로·디캐프리오·프레이저는 오스카 남우주연상 수상자다). 그래도 가장 눈에 띄는 배우는 몰리를 연기한 릴리 글래드스톤이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글래드스톤과 줌미팅으로 만나 뒤 곧바로 그를 낙점한 것으로 알려졌다. 컴퓨터 화면을 넘어서 느껴지는 눈빛에서 본능적으로 글래드스톤이 몰리를 해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스코세이지 감독의 결정에 화답하듯 이 배우는 자신의 가문과 오세이지족이 맞닥뜨린 비극을 그 강렬한 눈에 모두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 작품에서 능동적인 범죄자는 사실상 드 니로가 연기한 윌리엄 헤일 한 명 뿐이다. 디캐프리오가 맡은 어니스트를 포함해 헤일의 범죄 행각에 얽힌 이들은 대개 헤일과 그가 내린 명령에 복무하며 푼돈을 받아 챙기는 수동적인 인물들이다. 말하자면 '플라워 킬링 문'이 더 부각하려는 미국의 폭력의 역사는 어니스트처럼 사는대로 생각하는 성찰 없는 자들이 저지른 만행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시키는 자, 시키는대로 하는 자, 방관하는 자 모두를 공동정범으로 보는 것 같다. '플라워 킬링 문'은 1942년생 80대 노장이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뜨겁고, 여든이 넘어서도 현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만이 해낼 수 있을 정도로 서늘하다.
뭅먼트
4.0
광기를 넘어서는 역겨움과 축복을 넘나드는 저주, 그 속에선 고요를 찢어발기는 비명들이 넘실댄다. 그들의 통한한 북소리는 백 년이 지난 지금도 널리 울려 퍼지고 있다, 이 영화는 그 소리의 일부분이 되었다.
재원
4.0
세상 가장 무서운 중독이 돈 중독이라더니 그게 썩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그것 땜에 사람이 저렇게 악마도 혀를 내두를 만큼 악랄해지는 걸 보면.
이건영(everyhuman)
3.5
블러드 오일.
스테디셀러
4.0
악을 등한시하고 돈에 관해 생색내던 영화가 끝내 무릎을 꿇으며 불멸로 기록한 것들.
더 많은 코멘트를 보려면 로그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