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H4.0매우 기괴하고 신비롭고 아름답기까지한 성장 영화이자 레즈비언 영화. 또한 더 나아가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약 300년 간, 기독교와 남성성을 절대화하기 위해 종교적으로 "여성"을 억압하고 고문과 화형 등을 비롯한 광신도적인 "마녀 사냥"을 재구성한 "페미니즘 영화"이기도 하다. 비쥬얼적인 면에서도 노르웨이의 차디찬 겨울에서 느껴지는 서늘함과 함께 아름다운 미장센이 돋보인다. '델마'가 본연의 정체성에서 갈등이 생길 때마다 발작을 일으키고 발작 중에 꿈을 꾸면서 섬광이 터지는데 섬뜩하면서도 그 초자연적인 현상 때문에 후반부에 드러나는 비극이나 사건이 오히려 충격 완화가 되는 점도 아이러니하지만 재밌는 장치기도 하다. 최근 몇 해동안 매년 좋은 "페미니즘 영화"들이 한 두 편 이상은 개봉하는데 올해는 <델마>가 그 좋은 영화 리스트에 포함된 영화라 생각한다.좋아요72댓글4
IDA4.5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선연함을 애정한다. 혹은 애정을 그려내는 선연함을 애정한다. 초자연적인 능력과 납득 불가능한 사건과 모호한 이미지가 중첩되었음에도 <델마> 는 설득력을 가진다. 이 설득력의 이유는 크게 '사랑'과 '억압' 두 가지로 충분했다. 사랑과 억압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으나 서로를 가장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것들이다. 처음으로 가족이라는 이름의 억압을 벗어난 델마가 처음으로 홀로 온전히 놓이게 되며 델마는 처음으로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억압인 줄 모르던 억압을 깨닫게 되는 것은 종종 어떤 이를 향한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가족의 속박을 벗어나 홀로 놓여 있던 델마가 처음으로 사랑을 만났을 때, 그는 발작하고 만다. 고요하게 잠재워졌던 얼음 아래의 감정들이 델마를 깨우기 시작한 것이다. 델마는 사랑의 순간을 느낄 때마다 발작한다. 발작은 마치 델마를 병 든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쉴 새 없이 관객들로 하여금 불안을 유발하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엔 그 발작 속에서 사랑을 읽어내게 된다. 부정성이 아닌 긍정성을 엿보게 된다. 사랑을 해서 델마는 발작하고 그것은 마치 금방이라도 죽을 듯 보이지만 그로 인해 가능하게 될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간신히 유지되어 온 델마의 얼음벽이 깨지는 소리를 듣는다. 델마가 바라는 것은 모두 현실이 된다. 이것은 델마를 기묘하게 만드는 장치이자 폭력의 구실이 되었다. 발작 증세를 보이는 여성들을 마녀로 취급해온 역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그러한 시선이 그 여성들의 발작을 심화시켰음을 지금 이 시대의 우리는 알고 있다. 나는 수많은 인간들이 가진 초인적인 힘을 믿는다. 누구에게나 설명되지 않는 힘이 있다. 어떤 바람은 사실이 되고 어떤 예감과 예측은 들어맞는다. <델마>는 델마라는 인물이 가진 기괴함을 말하려는 영화가 아니라, 인간에게 일어나는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을 말하기 위해 다양한 이미지를 사용한다. 비극이 일어나는 장면을 특히나 비현실적으로 그려내는데, 나는 그 비극적 사건들은 실존할 수 있지만 실재하지 않는다고 바라보았다. 그것은 꿈에 가깝다. 비극이 일어났다는 정황과 비현실적인 이미지만 존재할 뿐, 나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진실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을 뿐이다. 델마를 향한 완고함 속에 한 치의 왜곡도 없다고 확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어떤 불안과 우연에 불과했을 일들이 상황적으로 놀라울 만큼 잘 들어맞아서 델마를 왜곡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것은 우리의 세계에서 흔히 일어나는 비극이기도 하다. 델마의 엄마가 휠체어에서 일어난 것은 델마가 준 기적일까? 강 위에서 일어난 아버지의 사라짐(죽음)이 정말 델마가 일으킨 비극일까? 델마가 아냐를 사라지게 만들었다가 다시 돌아오게 만들었을까? 그렇지 않다. 모두 개인의 의지와 선택이 자리한다. 델마의 의지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다. 물론 델마의 의지가 영향을 끼칠 수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나는 가끔 당신이 내 손을 잡아줬으면 하고, 당신은 그런 나의 손을 잡아줄 때가 있다. 이것은 내가 간절히 바랐기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고, 당신이 원했기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놀라울 만큼 어떤 우연들이 운명처럼 들어설 수 있다.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델마>는 완전한 이해를 요구하는 작품이 아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자리가 있다면 비워두어도 좋다. 우리의 세계는 언제나 명확하지 않은 것들을 경멸했고 배척했으나 이 영화는 철저히 그에 반하는 작품이기에 그래도 괜찮다. 명확하지 않음을 이해는 가지 않아도 그럴 수 있다고 허용해줄 수 있으면 된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사랑들이 그러하듯이. 델마가 행복하길 바란다.좋아요69댓글1
이동진 평론가
4.0
'마녀'로 몰려 희생된 여성들의 역사를 뒤집어보는 야심찬 서사. 주제를 선명하게 축약하는 이미지.
Mino
4.0
스포일러가 있어요!!
지예
3.5
전능하신 마녀는 사냥 하지 않아요. 사랑을 하죠.
블루
4.0
'마녀로 몰렸던 여성들은 돌아와 절대자가 되었지. 죄악이라 손가락질 하는 이들이 불타 죽으리라' 델마 복음서 1장 1절
황재윤
4.0
여태껏 본 적 없는 마녀 이야기와 강렬한 씬.
MissH
4.0
매우 기괴하고 신비롭고 아름답기까지한 성장 영화이자 레즈비언 영화. 또한 더 나아가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약 300년 간, 기독교와 남성성을 절대화하기 위해 종교적으로 "여성"을 억압하고 고문과 화형 등을 비롯한 광신도적인 "마녀 사냥"을 재구성한 "페미니즘 영화"이기도 하다. 비쥬얼적인 면에서도 노르웨이의 차디찬 겨울에서 느껴지는 서늘함과 함께 아름다운 미장센이 돋보인다. '델마'가 본연의 정체성에서 갈등이 생길 때마다 발작을 일으키고 발작 중에 꿈을 꾸면서 섬광이 터지는데 섬뜩하면서도 그 초자연적인 현상 때문에 후반부에 드러나는 비극이나 사건이 오히려 충격 완화가 되는 점도 아이러니하지만 재밌는 장치기도 하다. 최근 몇 해동안 매년 좋은 "페미니즘 영화"들이 한 두 편 이상은 개봉하는데 올해는 <델마>가 그 좋은 영화 리스트에 포함된 영화라 생각한다.
Jay Oh
3.5
정신적 억압 아래 꽃 피듯이 금가는 무의식. On breaking the seizure of repression.
IDA
4.5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선연함을 애정한다. 혹은 애정을 그려내는 선연함을 애정한다. 초자연적인 능력과 납득 불가능한 사건과 모호한 이미지가 중첩되었음에도 <델마> 는 설득력을 가진다. 이 설득력의 이유는 크게 '사랑'과 '억압' 두 가지로 충분했다. 사랑과 억압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으나 서로를 가장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것들이다. 처음으로 가족이라는 이름의 억압을 벗어난 델마가 처음으로 홀로 온전히 놓이게 되며 델마는 처음으로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억압인 줄 모르던 억압을 깨닫게 되는 것은 종종 어떤 이를 향한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가족의 속박을 벗어나 홀로 놓여 있던 델마가 처음으로 사랑을 만났을 때, 그는 발작하고 만다. 고요하게 잠재워졌던 얼음 아래의 감정들이 델마를 깨우기 시작한 것이다. 델마는 사랑의 순간을 느낄 때마다 발작한다. 발작은 마치 델마를 병 든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쉴 새 없이 관객들로 하여금 불안을 유발하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엔 그 발작 속에서 사랑을 읽어내게 된다. 부정성이 아닌 긍정성을 엿보게 된다. 사랑을 해서 델마는 발작하고 그것은 마치 금방이라도 죽을 듯 보이지만 그로 인해 가능하게 될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간신히 유지되어 온 델마의 얼음벽이 깨지는 소리를 듣는다. 델마가 바라는 것은 모두 현실이 된다. 이것은 델마를 기묘하게 만드는 장치이자 폭력의 구실이 되었다. 발작 증세를 보이는 여성들을 마녀로 취급해온 역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그러한 시선이 그 여성들의 발작을 심화시켰음을 지금 이 시대의 우리는 알고 있다. 나는 수많은 인간들이 가진 초인적인 힘을 믿는다. 누구에게나 설명되지 않는 힘이 있다. 어떤 바람은 사실이 되고 어떤 예감과 예측은 들어맞는다. <델마>는 델마라는 인물이 가진 기괴함을 말하려는 영화가 아니라, 인간에게 일어나는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을 말하기 위해 다양한 이미지를 사용한다. 비극이 일어나는 장면을 특히나 비현실적으로 그려내는데, 나는 그 비극적 사건들은 실존할 수 있지만 실재하지 않는다고 바라보았다. 그것은 꿈에 가깝다. 비극이 일어났다는 정황과 비현실적인 이미지만 존재할 뿐, 나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진실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을 뿐이다. 델마를 향한 완고함 속에 한 치의 왜곡도 없다고 확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어떤 불안과 우연에 불과했을 일들이 상황적으로 놀라울 만큼 잘 들어맞아서 델마를 왜곡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것은 우리의 세계에서 흔히 일어나는 비극이기도 하다. 델마의 엄마가 휠체어에서 일어난 것은 델마가 준 기적일까? 강 위에서 일어난 아버지의 사라짐(죽음)이 정말 델마가 일으킨 비극일까? 델마가 아냐를 사라지게 만들었다가 다시 돌아오게 만들었을까? 그렇지 않다. 모두 개인의 의지와 선택이 자리한다. 델마의 의지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다. 물론 델마의 의지가 영향을 끼칠 수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나는 가끔 당신이 내 손을 잡아줬으면 하고, 당신은 그런 나의 손을 잡아줄 때가 있다. 이것은 내가 간절히 바랐기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고, 당신이 원했기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놀라울 만큼 어떤 우연들이 운명처럼 들어설 수 있다.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델마>는 완전한 이해를 요구하는 작품이 아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자리가 있다면 비워두어도 좋다. 우리의 세계는 언제나 명확하지 않은 것들을 경멸했고 배척했으나 이 영화는 철저히 그에 반하는 작품이기에 그래도 괜찮다. 명확하지 않음을 이해는 가지 않아도 그럴 수 있다고 허용해줄 수 있으면 된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사랑들이 그러하듯이. 델마가 행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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