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의 얼굴들
Se rokh
2018 · 드라마 · 이란, 미국
1시간 40분 · 1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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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배우 베흐나즈 자파리에게 먼 시골 마을에 사는 소녀의 영상이 전달된다. 가족들이 배우가 되겠다는 자신의 꿈을 반대한다며, 자살을 암시하는 자극적인 영상이었다. 직접 확인하기로 결정한 베흐나즈 자파리는 영화감독 자파르 파나히와 함께 소녀를 찾아 먼 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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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
4.0
굉장히 좁고 험난한 길, 대치된 상황에서 경적으로 누가 먼저 지나갈 지, 누가 더 급하고 옳은 지, 고리타분한 신호를 주고 받는 서로의 입장과 견해 속에서 이제는 신호마저 무시한 채 꿋꿋이 걸어 나아가려는 새로운 얼굴이자 그 다음 세대. 그들을 위한 비포장도로 공사의 시급함을 알리는 경종.
chan
4.0
영화로인해 불투명해진 현실, 그러기에 되려 더 절절하다. . (스포일러) <3개의 얼굴들>은 모큐멘터리를 표방하는 특유의 독특한 형식과 더불어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교묘히 이용해 이란 사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감독의 반골기질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자칫 감독의 전작 <택시>의 동어반복적 태작으로 오해받기 쉬운 여지가 있다.(지엽적인 부분을 언급하자면, 두 영화 모두에서 비슷한 프레임구도를 자아내는 차량 내부에 설치된 카메라로 찍은 숏들 역시 두 영화가 별반 다를 것 없는 결과라는, 감독으로선 다소 억울한 혐의를 가중한다.) . 이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정교하게 짜인 허구인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으며 되려 그 모호한 경계의 이중성을 십분 활용함으로서 현실을 조망하는 영화의 어느 허구적 성질을 부단히 실험했던 그의 전작 <택시>는 노상강도들의 난데없는 절도로 끝이 난다. 그들은 영화의 감독 파나히의 카메라를 훔친다. 하지만 메모리카드까지 앗아가진 못하였기에 그들의 절도는 사실상의 실패라 하여도 무방하다. <택시>의 엔딩에서 파나히는 말한다. 강탈이라는 저열한 방식으론 자신의 영화를 훔칠 수 없으리라고. 그렇다면, 그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자신의 무기, 영화라는 매체를 손에 쥔 필름메이커의 자세는 어떠해야하는가. <3개의 얼굴들>은 자파르 파나히의 이러한 자성에서 출발한 작품인 듯하다. . 영화의 프롤로그, 시골 마을에 사는 소녀 마지예가 스마트폰으로 찍은 영상이 공개된다. 이어서 영화의 감독 자파르 파나히가 운전하고 있는 차량의 조수석에 앉아있는 배우 자파리를 보여주는 숏으로의 전환은 은연중에 프롤로그를 상대적으로 불투명한 진실의 자리로 몰아넣는다. 운전대를 잡은 이와 조수석에 앉아있는 이가 모두 실제 이름(자파르 파나히, 베나즈 자파리)으로 불린다는 점과, 아울러 극중 자파리가 촬영장에서 도망쳐왔다는 사실은 극중 자파리가 특정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배우 자파리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공고히 하며 이 세계관이 비디제시스적임을 은근히 전제한다. 여기까지의 영화는 사실상 프롤로그에서 공개된 영상의 진위를 추적하는 2인조 다큐멘터리인 셈이다. . 그러나 차량이 잠시 정차하자, 상황이 역전된다. 고뇌에 빠진 자파리가 잠시 차에서 내리고 차 반대편으로 이동하자 카메라는 그녀를 따라 같이 180도로 회전한다. 그런데 시종 조수석을 비추던 카메라가 마침내 운전석을 향해 회전하자 그 자리에 있어야할 감독 자파르 파나히가 보이지 않는다. 운전석에서 통화를 하고 있으리라 예상됐던 그는 일찍이 차에서 내린 뒤 문 밖 멀리서 통화를 이어나가고 있다. 자파르 파나히, 자파리 이 둘의 개입 없이 움직인 카메라와 더불어 자파르 파나히의 통화 사운드를 그와 마이크 사이의 거리와 무관하게 일정히 유지한 영화의 음향설정은 이 영화가 배우와 감독이 단둘이서 협업한 2인 다큐멘터리라는 전제를 부인한다. 영화는 그 순간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있던 촬영감독과 음향감독의 존재감을 부러 들어냄으로서 관객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한다. 마지예가 촬영한 프롤로그의 진위와 함께 이 영화 자체가 다큐멘터리인지 혹은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이는 페이크다큐멘터리인지에 대한 진위 또한 함께 의심해줄 것. . 마을에 도착한 파나히와 자파리는 차에서 내려 본격적으로 마지예의 영상에 대한 서로의 입장을 주고받는다. 파나히는 이것이 날것의 진실임을 주장하며 반대로 자파리는 전문가의 손길을 거친 조작된 영상임을 주장한다. 이때 우리는 마지예의 영상과 더불어 이중의 의심을 해야 한다. 영화 스스로가 그 의심을 유도한다. 영화의 카메라는 차량 밖에서 토론하는 파나히와 자파리를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서 촬영한다. 이처럼 인물들이 카메라의 존재를 전혀 의식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과 반대로 영화 스스로는 촬영감독의 존재감을 구태여 가시화하고 있는 탓에 우리는 파나히와 자파리가 카메라 앞에서 마치 카메라의 존재를 잊은 척 일종의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가 없는 것이다. . 마침내 도착한 마지예의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가 실제 마지예의 생사를 추적하는 다큐멘터리였다면 으레 등장해야하는 숏과는 다른 숏이 우리에게 제시된다. 파나히와 자파리가 마지예의 집으로 들어갈 때, 카메라는 그들의 등 뒤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컷의 전환과 함께 먼저 마지예의 집 안에 대기하고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들을 집 안에서 마주한다. 나갈 때 역시 마찬가지다. 카메라는 그들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 일찍이 문밖으로 나가서 대기하고 있다 문을 열고 나오는 그들을 찍는다. 인물들은 방금 막 도착해 마지예의 가족들에게 자신들을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태도를 보이지만 정작 영화의 카메라는 미리 마지예의 가족과 입이라도 맞춘 듯 그들의 집에 한 발짝 먼저 들어가 있던 것이다. 이처럼 각본과 촬영, 그리고 편집까지 명확히 가시화된 지금, 과연 이 영화가 사실 그대로를 찍은 결과물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인물들의 실제 직업과 이름까지 차용하며 사실적 다큐멘터리를 표방하는 듯 보였던 영화는 구태여 스스로의 허구성을 점차 폭로하며 어느덧 제 스스로 허구의 결과물을 자처하기에 이른다. . <3개의 얼굴들>이 전작 <택시>와 사뭇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까닭은 바로 영화가 스스로의 정체를 전작에 비해 비교적 투명하게 가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것이 현실인가 허구인가. <택시>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고의로 회피한다. 명확한 허구를 자처하지도, 반대로 사실적 다큐를 지향하지도 않은 채 의도적으로 현실과 허구를 뭉뚱그려버린 <택시>는, 그 희미한 간극을 활용해 현실이 불투명해지는 순간들을 집요하게 포착한 영화에 다름 아니었다. 현실이 불투명해지는 순간, 파나히는 역설적으로 그 불투명성이 적나라한 풍자의 사실성을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 믿는 듯했다. . 반대로 <3개의 얼굴들>은 스스로가 이것은 허구의 결과물임을 부정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영화다. 사실상 <3개의 얼굴들>은 감독과 배우의 실제 이름과 직업정도를 빌린 일반 극영화에 다름없다. 다만, 그럼에도 영화는 몸소 앞장서서 이것은 허구의 결과물이라고 직접 전언하지는 않는다. 실재의 표피만 채취하여 이를 허구로 도배한 <3개의 얼굴들>은 그 현실의 불투명함을 의도적으로 배가시킨다. 사실상 허구라 명명해도 과언이 아닌 이 불투명한 현실은 어떻게 유의미함을 획득하는가. 파나히의 관심사는 아마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 결과적으로 프롤로그에서 공개된 마지예의 자살영상은 조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자파리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는 영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난데없는 에피소드가 불시에 들이닥친다. 절벽에서 떨어진 숫소로 인해 그들이 돌아가야 하는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잠시 차에서 내린 자파리는 고뇌의 시간을 거친 뒤 다시금 마지예에게로 되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영화는 이 에피소드를 경유하여 마지예의 영상이 자파리의 심리에 끼친 영향을 지극히 ‘영화적’인 방식으로 풀어낸다. . 마지예의 영상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의심됐을 때, 자파리를 혼란케 했던 건 (영상에 묘사된)여성과 예술가를 억압하는 이란 사회의 현실이었다기 보다는 되려 자신이 누군가의 죽음을 초래했을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개인적 죄의식에 가까웠다. 하지만 마지예의 영상이 허구임을 확인한 뒤 자파리의 발길을 돌리게 만든 것은 틀림없이 전자의 요인이었을 것이다. 즉, 허구가 의미 자체를 전환시킨 셈이다. 마지예의 영상은 사실상 한 편의 영화에 다름없다. 배우(마지예), 각본(박복한 현실로 인해 자살을 하게 된다는 내용), 촬영(스마트 폰 카메라), 그리고 편집까지. 프롤로그의 영상은 사실상 한 편의 극영화가 갖추어야할 모든 조건에 부합한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 실제 마지예는 죽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영화 속에서 목숨을 잃는다. 이는 그녀의 영화가 그 자체로 사회적 살인으로 인한 배우의 죽음에 대한 메타포임을 시사한다. 자파리는 한 명의 여성 예술가로서 이란에서 여성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주제를 다룬 마지예의 영화에 감화되었기에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이는 명확한 허구지만, 자파리는 한 명의 여성이자 예술가로서 그 허구가 발 디디고 있는 곳을 정확히 안다. . 영화는 자파리의 이런 내적 변화를 하나의 도식으로 관객에게 설명한다. 숫소가 그들의 길을 막고 있는 가운데, 영화의 카메라는 차량 뒤편으로 이동하여 심히 고심하는 자파리를 보여준다. 카메라가 그녀를 포착하고 있는 동안 영화는 숫소와 암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파나히와 현지 주민의 대화를 사운드로 흘려보낸다. 교배를 위해 이용되는 숱한 암소들이 사실상 이란 여성, 혹은 여성 예술가들의 인권에 대한 은유라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헤아릴 수 있다. 허나 적어도 자파리는 알 수가 없다. 그녀는 극중 터키어를 하지 못하는 인물로 설명이 되는데 그 순간 파나히와 마을 주민은 터키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작 상황에 직면한 극중 인물은 알지 못한다. 허나 우리는 이란 여성예술가들의 처지에 대한 사운드와 실제 이란 여성예술가의 이미지를 겹쳐놓은 해당 장면이 자파리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요약했음을 알 수 있다. 자파리와 더불어 관객인 우리는 영화의 불투명성을 몸소 직면한 뒤 그 불투명함이 실재와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을 것이며 동시에 그 함의를 더 깊게 체감했을 것이다. . 파나히와 자파리가 다시금 마지예에게로 되돌아간 장면들에서, 파나히는 자파리와 함께 마지예가 있는 곳으로 따라가지 않으며 그대로 차에 머문다. 우리는 마지예가 있는 곳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지 못한 채 그저 파나히가 멀찍이서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실루엣 정도만을 함께 볼 수 있을 뿐이다. 후에 마지예를 집으로 데려다 준 이후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파나히는 그녀의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마지예의 집에 들어갔다 나온 자파리의 리액션을 통해 우리는 그 공간 안에서 있었던 일을 어렴풋이 유추하게 된다. . 파나히는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그 앞에서 정지한다. 지금은 현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줄 상황이 아니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가령 영화의 종반부에 등장하는 마지예의 집을 보다 구체적으로 상상해보자. 아마도 그 순간 그곳엔 여성과 예술가에 대한 기성세대의 차별적 언사가 가득했을 것이며 그 안에서 다시금 자파리와 마지예는 예술의 좌절을 맛 봤을 것이다. 영화의 카메라는 집 앞에서 정지한 채 이것을 구태여 보여주지 않는다. 이미 앞전에 마지예의 집을 방문하여 마지예의 동생을 통해 그들의 편견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준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시금 보여주는 것, 그것은 풍자를 빙자한 현실에 대한 착취이며 그 자체로 관객의 공분을 손쉽게 사들이는 상술에 불과하다. 마지예의 집에서 나온 자파리, 마치 거대한 편견의 벽을 마주하고 온 듯한 그녀의 리액션, 그저 이것 하나면 집 안에서의 일은 가타부타할 필요가 없다. . 그보다 앞선 장면인 마지예의 친구의 집 앞에서, 차 안에 있던 파나히는 차량 시트를 뒤로 젖히며 잠에 든다. 파나히가 잠에 듦과 동시에 그는 프레임에서 아웃되며 영화는 그제야 자파리가 있는 집 안으로 향한다. 그 안에서 자파리와 노인이 나누는 대화, 당국의 억압으로 인해 파나히가 외국으로 출국할 수 없으며 반대로 한 남성 배우는 입국이 불가능 하다는 것. 파나히는 자신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얘기에 스스로 개입하지 않은 채 굳이 자신을 프레임 아웃시키는 동시에 이를 자파리의 얼굴을 빌려 말한다. 해당 장면에 자신을 들이지 않은 선택은 그 자체로 당국의 제재로 인해 영화를 찍을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자조 섞인 메타포로 읽힌다. 파나히는 타인의 곤궁을 찍을 때가 아닌 자신의 난처함을 찍어야 할 때 자신의 형상을 지워낸 뒤 그곳으로 침입한다. 보여주지 않는 것, 혹은 보여주되 이를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것. 이 불투명성의 효력이 과연 극사실주의의 적나라함이 가진 힘보다 미비하다고 할 수 있을까? . 영화의 엔딩은 퍽 도식적인 감이 있다. 엔딩에서의 프레임엔 누군가가 흉기로 카메라를 가격하기라도 한 듯 화면에 금이 가있다. 그리고 차가 정차하면 분에 받친 자파리가 차에서 내린 뒤 마지예와 함께 화면 밖으로 걸어 나가며 프레임아웃 된다. 그리고 반대급부로 프레임인하는 교배를 위한 암소들. 금이 간 프레임이 곧 파나히의 영화에 반대하는 남성들이 영화에 행한 공격을 상징한다는 것과, 프레임아웃한 여성들과 교차되는 프레임인한 암소들이 곧 이 암울한 현실이 진행형임을 상징한다는 것은 은근히 노골적인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런데 이 허구의 결과물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도식은 어떻게 이러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었는가. 그건 이 허구가 실재와 완전히 유리된 것이 아님을 익히 알고 있는 우리의 인식 내부로부터 비롯된 함의가 아닐까. . 영화의 제목인 3개의 얼굴들, 그것은 파나히와 자파리, 그리고 마지예의 얼굴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며 극중 등장하는 세 여인의 얼굴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 편의 영화를 뜻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첫째,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영화 속 영화. 둘째, 러닝타임 거의 전부를 할애하는 본 영화. 마지막 세 번째는 어쩌면 이 두 영화의 작용으로 인해 차후에 탄생할 영화들의 면면, 그 총합이 아닐지.
Jay Oh
3.5
갈등이 있는 것인지부터 탐구하고, 이내 갈등을 비춘다. 파나히답게 완곡하게. A winding view of a conflict, a country, a mindset.
Dh
3.5
명예/체면/관습이 만연한 곳. 그래도 솟아날 구멍은 있을 것이다 #멍에 #CGV
석장군
4.0
3개의 얼굴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으나, 나는 세 여인의 춤추는 그림자가 좋았다.
Indigo Jay
4.0
스포일러가 있어요!!
슴심슨
3.5
시작과 끝의 대조가 무척 인상깊다. 오랜만에 곱씹을수록 좋아지는 영화를 만났다.
영화같이멋진
4.0
자파디는 용감하다. 절벽에서 떨어져 길을 막고있는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소를 대비시켜 어차피 죽어갈 소에게 고통을 줄이기위해 속히 죽여주자는 자파디에게 그것은 도리(?)가 아니라며 그들의 율례를 들이밀며 거부하는 그것과 마이예르를 대하는 가족과 마을주민의 생각이 겹쳐지는 씁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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