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룸스
Les chambres rouges
2023 · 범죄/스릴러/드라마 · 캐나다
1시간 58분 · 1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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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소녀 3명을 끔찍하게 살해하고 생중계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슈발리에’ 그리고 슈발리에의 재판을 매회 방청하는 모델 겸 해커 ‘켈리앤’. 심증만 있을 뿐, 물증 없는 재판이 길어지는 가운데 슈발리에를 추종하는 팬들과 희생자 가족이 대립한다. 한편, 존재하지 않는 줄로만 알았던 마지막 희생자 영상이 다크 웹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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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평론가
4.0
독창적인 시점쇼트들로 예리하게 포착한 이상심리의 변이.
양기연
5.0
재현, 그 지독한 게임에 대하여. . (스포일러) . 현대 영화에서 굉장히 보기 드문, 거의 갑갑한 느낌까지 주는 1.5:1 비율의 사각형 스크린 안에서, 주인공 켈리앤이 잠에서 깨며 영화는 시작한다. 켈리앤은 그 답답한 사각의 프레임 내에서 깨어나, 또 다른 사각의 검색대를 통과해 가며 더 갑갑한 느낌의 사각의 법정 안으로 들어선다. 뤼도비크 슈발리에의 첫 공판기일. 사각의 공간으로서의 스크린 프레임, 그 내부의 사각의 공간으로서의 법정, 그 내부 더 좁은 투명의 사각 구획 공간 안으로 피고인 뤼도비크가 등장한다. . 판사는 첫 공판기일이니만큼 배심원들과 방청객들에게 앞으로 약 2개월간 공판이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될지를 안내한다. 뒤이어 검사와 변호인이 모두진술을 통하여 각자 어떠한 논리로 공판을 진행할 것인지 그 계획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영화는 롱테이크로 우리 관객에게 제시한다. . 검사의 모두진술은 세 명의 피해자의 클로즈업 숏을 법정 내 스크린에 3분할 화면으로 띄우며 시작한다. 카메라는 법정 내 스크린을 줌인하여 그 세 명의 피해자의 얼굴을 응시한 뒤 모두진술 중인 검사의 동선을 따르더니, 갑자기 피고인 뤼도비크에게 줌인한다. 카메라는 심지어 피고인 뤼도비크와 다른 이들을 분리한 사각의 투명 파티션까지 통과해 가며 피고인 뤼도비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가 다시 물러난다. 이후, 변호인이 모두진술을 시작하면 카메라는 한 동안 변호인의 동선을 따르다가, 갑자기 방청석에 앉은 켈리앤에게 줌인한다. . 하나의 롱테이크 숏. 이 안에서 카메라는 범죄의 객체인 피해자들-범죄의 주체일지도 모를 피고인-범죄의 주체 및 객체 관계 밖에서 이를 바라보는 방청객 사이에 어떤 가상의 선을 그어 놓는다. 그리고 그 가상의 선을 매개하는 것은 그 범죄를 둘러싼 사실 관계에 대해 정반대의 판단을 각각 주장하는 검사와 피고인이다. 판사가 앞으로의 공판 과정을 소개한 뒤 검사와 변호인이 각자 앞으로의 진행 계획을 설명하는 모두진술을 하나의 롱테이크 숏 안에 담아냄으로써, 영화는 법정이란 사각의 공간 내에서 하나의 범죄 사실을 둘러싼 주체와 객체,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방청객의 관계도를 그려냄으로써, 영화적으로 다시 그 공판 절차를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셈이다 . 그러나 이 롱테이크 숏이 검사와 변호인을, 그리고 그들 각각의 모두진술 중 줌인되는 피고인 뤼도비크와 방청객 켈리앤을 대칭 관계로 둘 때, 우리는 이 숏이 무언가 더 말하고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사각의 공간인 법정, 그리고 그 내부 또 다른 사각의 파티션 안에 들어선 이 공판 절차의 사실상의 주인공 뤼도빅 간의 관계는, 사각의 공간인 극장, 그리고 그 내부 또 다른 사각의 스크린 프레임(1.5:1의 답답한 사각의 화면비는 이를 더욱 강조해 보인다.) 안에 깨어난 이 영화의 주인공 켈리앤 간의 관계와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이는 어쩌면 앞으로 약 2개월 동안 진행될 공판 절차에서 배심원들과 방청객들이 검사와 변호인이 제시할 증거들을 바탕으로 피고인 뤼도비크의 유무죄를 판단하게 될 것처럼, 앞으로 약 2시간(영화의 러닝타임은 2시간에서 2분 못 미치는 118분이다.) 동안 진행될 이 영화에서 우리 관객들이 영화 내에 제시될 내용들을 바탕으로 주인공 켈리앤에 대해 판단하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 상기한 바와 같이, 이 롱테이크 숏에서 카메라는 범죄의 객체인 피해자들-범죄의 주체일지도 모를 피고인-범죄의 주체 및 객체 관계 밖에서 이를 바라보는 방청객 사이에 어떤 가상의 선을 그어 놓는다. 그리고 이 선을 매개하는 검사와 변호인은 이 범죄를 둘러싼 증거들과 자신들 각자의 법적 논리를 통하여 실제 범죄를 둘러싼 사실 관계를 ‘재현’하고자 하는 자들이다. 또, 카메라는 위 가상의 선을 긋는 과정에서, 부러 뤼도비크가 격리되어 있는 사각의 파티션 안팎을 넘나들면서 일종의 권력을 과시해 보인다. 범죄의 주체(가해자)와 객체(피해자), 이 주체와 객체 간에 벌어진 사실 관계를 법적 논리 하에 다시 재현하려 하는 두 주체들(검사, 변호인), 그리고 그들 각자의 재현의 객체가 되어 버린 피고인 뤼도비크, 이 재현의 과정을 지켜보는 관객들(배심원, 방청객), 그리고 다시 이 모든 관계를 롱테이크로 유영하며 엮어냄으로ㅆ 재현의 권력을 과시하는 카메라, 첫 숏에서 눈을 뜬 그 순간부터 그 카메라의 객체 입장에 놓인 켈리앤, 이를 다시 극장이라는 사각의 공간 내에서 지켜보는 우리 관객들. 영화는 이미 이 하나의 숏을 통해 앞으로 2시간 동안 자신이 재현의 연쇄 관계 하에 벌어지는 게임을 다루고자 한다며 자신만의 모두진술을 하고 있는 셈이다. . 이제 영화는 법정 안팎을 오가며 피고인 뤼도비크의 공판 절차와 주인공 켈리앤의 일상을 꿰어 나간다. 약 2개월이 지나면 배심원들은 뤼도비크에 대한 평결을 내려야 하고, 약 2시간이 지나면 우리 관객도 켈리앤에 대한 각자의 가치 판단을 내리게 될 터. 뤼도비크의 공판 절차에서 핵심적인 증거들이 영상물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관객들이 영화 내내 켈리앤에 대해 얻게 되는 정보는 철저히 영화 내 묘사되는 시청각적 정보들에 한정된다. 그러나 뤼도비크 공판상 영상물들마다 범인이 복면을 쓰고 있어 당해 범인이 뤼도비크임을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는지 여부가 애매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관객이 아무리 영화를 뚫어져라 바라보아도 우리 관객은 켈리앤이 어떠한 사람인지 좀체 파악할 수 없다. .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문. 켈리앤은 왜 노숙까지 해 가며 그 공판 절차를 계속 방청하고자 하는 것인가? 이 의문이 떠오르기 무섭게 또 다른 방청객 클레망틴이 등장한다. 클레망틴이 그 공판 절차에 계속 방청하는 이유는 너무 명확하게 제시되기에, 상대적으로 켈리앤은 더욱 파악하기 어려운 존재처럼 보인다. . 두 방청객, 켈리앤과 클레망틴은 사각의 법정을 나설 때마다 공판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나눈다. 마치 사각의 극장을 나설 때마다 방금 본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두 명의 관객처럼. . 공판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피해자 두 명의 영상이 법정 내 스크린에 재생되는 기일이 되었을 때, 사건과 직접적 연관이 없는 방청객들은 법정 밖으로 나가게 된다. 카메라도 그 영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클레망틴은 몰래 문을 열어가면서까지 그 영상을 보고 싶어 한다. 우리 관객은 과연 그 영상을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클레망틴의 영상을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은 영락없는 영화 관객의 그것이다. . 이 지점에 이르면, 켈리앤이 다크웹을 통해 구한 피해자 두 명의 스너프 필름을 클레망틴에게 보여줄 때 그 둘의 모습이 마치 불법의 루트로 어렵게 구한 영화를 함께 감상하는 두 씨네필의 모습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 그런데 켈리앤과 클레망틴의 관계는 어딘가 기묘한 구석이 있다. 켈리앤은 클레망틴이 뤼도비크의 공판에 집착하는 이유를 파악하게 되지만, 자신이 그 공판에 집착하는 이유는 절대 알리지 않는다. 켈리앤에게 클레망틴은 파악 가능한 존재이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켈리앤은 클레망틴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재우고, 자신의 돈으로 먹이고, 자신의 취미를 강요한다. 그리고 켈리앤은 은연중에 자신이 피해자 두 명의 영상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려 자신의 우월한 위치를 과시하더니, 클레망틴이 그 영상을 확인한 후 충격을 받도록 유도한다. 이제 단순히 두 명의 방청객(혹은 두 명의 관객, 두 명의 씨네필)인 것처럼 보였던 두 명 사이에는 권력 관계가 형성되고, 켈리앤은 클레망틴이라는 한 인물을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대로 재현하기 시작한다. 켈리앤은 포커 게임에서 돈을 따는 데 집착하던 모습 그대로 클레망틴을 자신의 재현의 게임의 상대로 두어 결국 승리한 셈이다. . 켈리앤의 재현의 게임에서 패배한 클레망틴은 방청객, 관객의 위치조차 포기한 채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마치 범죄의 객체인 피해자들이 죽어 세상의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그리고 이제 켈리앤은 관객의 위치에서 또 다른 위치로의 전환을 앞두고 있다. . 켈리앤은 패션 모델을 업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클레망틴이 떠난 이후, 차회 공판기일에서 켈리앤은 기자로부터 클레망틴에 대한 질문을 받던 중 카메라에 찍혀 버린다. 그리고 이로 인해 켈리앤의 패션 모델로서의 커리어가 위협받기 시작한다. . 로베르 브레송은 자신의 영화 속 배우들(자신의 카메라의 객체로서의 배우들)을 감독(카메라의 주체)의 의도를 투명하게 반영하는 역할로 생각하였고, 그들은 ‘모델’이라 칭했다. 켈리앤이 패션 모델로서 몰락하는 순간은, 켈리앤이 법정 밖에 대기하던 카메라에 객체로서 찍히는 순간과 교차한다. 다시 말해, 켈리앤은 ‘패션 모델’로서 몰락하는 순간은 ‘관객’의 위치에서 ‘브레송적 표현으로서의 모델’의 위치로 전환되는 순간과 교차한다. 켈리앤이 클레망틴을 상대로 재현의 게임을 벌여 승리하자, 이제 카메라는 켈리앤을 본격적으로 자신의 객체로 포섭하여 켈리앤과 본격적인 재현의 게임을 벌이려는 셈이다. . 그 재현의 게임에 임하는 켈리앤의 다음 패는 가히 충격적이다. 그는 피해자 카미유의 머리색으로 염색하고 피해자 카미유의 교복을 입고 공판에 참석한다. 그리고 법정 안에 들어와 그는 피해자 카미유의 눈 색과 같은 색의 렌즈를 끼고, 피해자 카미유처럼 교정기를 착용한다. 그러자 법정 내의 모든 인물들이, 심지어 피고인 뤼도비크까지도 켈리앤을 ‘본다’. . 이는 어찌 보면 범죄의 주체 앞에서 범죄의 객체를 자처하는 행위이자, 재현의 객체로서, 즉, 브레송적 표현으로서의 모델로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는 행위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번 재현의 게임에서 켈리앤은 패배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켈리앤이 범죄의 피해자의 외양을 따라함으로써 그 범죄를 둘러싼 어떤 이미지를 재현하는 또 다른 주체의 입장에 서려는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 켈리앤은 굳이 법정 안에 들어선 이후에야 범죄의 주체로 의심되는 인물인 뤼도비크를 응시하면서 파란 ‘렌즈’를 착용함으로써, 그 운동이 자연스럽게 그 숏 내에서 무척 강조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때 켈리앤 자신의 눈 위에 부착된 또 다른 눈으로서의 렌즈는 그 자체로 카메라 렌즈의 은유라고도 볼 수 있으므로, 켈리앤의 운동은 그 자체로 범죄의 객체인 피해자의 눈 색과 같은 색의 카메라로 다시 범죄의 주체를 응시함으로써 범죄를 둘러싼 주체와 객체 간의 권력 관계를 전복시키려는 운동으로까지 읽히게 된다. . 또한, 켈리앤이 뤼도비크를 응시하며 렌즈를 착용할 때, 영화의 카메라가 켈리앤을 마주보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켈리앤의 응시는 카메라 자체를 응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켈리앤은 자신의 렌즈를 통하여 카메라를 다시 바라봄으로써 이 영화의 카메라를 상대로 주체의 위치를 탈취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영화 초반부터 제시되었던 켈리앤에 대한 정보. 그는 숫자에 밝고 포커 게임에서 돈을 따는 데 집착한다. 누군가를 이기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그는 카미유의 영상을 확보하려 하는 동시에, 카미유의 집에 들어가 보려 한다. 금지된 것을 보려하는 욕망. 무언가 보려 하는 욕망, 그리고 누군가를 상대로 이겨 권력을 쟁취하는 욕망. 이는 시각을 바탕으로 한 재현 과정에서 그 객체를 상대로 재현의 권력을 휘두르는 카메라(작가)의 욕망이나 다름없다. 어쩌면 켈리앤은 영화 초반부터 결국 이 자리에 이르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 켈리앤이 법정에서 끌려나갈 때 뤼도비크는 켈리앤을 바라보고 손을 흔드는데, 이때 카메라는 켈리앤이 끌려나가는 운동에 맞추어 뤼도비크로부터 멀어짐으로써 그 숏이 켈리앤의 시점 숏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결국 켈리앤은 자신의 시선과 이 영화의 카메라의 시선을 일치시킴으로써 주체의 위치를 탈취하려는 시도에 일견 성과를 거둔 것이다. 이제 켈리앤은 패션 모델로서의 모든 커리어가 박살나도 개의치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재현의 객체로서의 모델’이 아니므로. . ‘일개 관객’에서 ‘모델’ 즉 ‘재현의 객체’로서의 위치를 거쳐, 자신의 렌즈를 끼고 ‘재현의 주체’로서의 위치를 탈취하기에 이른 켈리앤은 이제 자신을 객체로 가두려는 그 모든 시선을 거부하고자 한다. 켈리앤은 자신이 찍힐 수 우려가 있는 CCTV를 망가뜨리고, 밖에서 자신의 거주지를 들여다 볼 수 없도록 거주지의 창을 모두 암막 커튼으로 가리고, 자신을 응시하는 듯한 AI는 믹서기에 갈아버린다. .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스크린은 모두 차단해 버린 켈리앤은, 자신이 ‘게임의 주체로 임하면서 바라보고 있는’ 두 개의 ‘스크린’을 통해 각각 경매 게임과 포커 게임을 진행하여 결국 두 게임 모두에 승리한다. 마침내 켈리앤이 그간 누구도 확보하지 못하였던 카미유의 영상을 확보하여 재생하는 순간 그의 집은 이 영화의 제목이자 영화 속 살인 사건을 둘러싼 다크웹의 이름인 ‘레드 룸스’와 같이 붉게 물든다. 그때 켈리앤의 집은 흡사 모든 빛을 차단한 채 붉은 조명만을 켜 둔 암실처럼 보인다. 켈리앤은 그 공간에서 카미유의 영상을 탐닉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 순간 그는 암실에서 자신의 필름을 현상하는 한 명의 작가처럼 보인다. . 이제 켈리앤은 카미유의 집으로 향한다. 첫 공판기일 당시 카메라가 롱테이크 숏을 통해 피고인 뤼도비크를 격리한 사각 파티션을 넘나드는 방식으로 자신의 재현의 주체로서의 권력을 과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켈리앤은 도어락을 따고 피해자 카미유의 집 안팎을 넘나드는 방식으로 자신의 재현의 주체로서의 권력을 과시한다. 켈리앤은 카미유의 방 침대에 앉아 활짝 웃는 자신의 모습을 직접 찍는다. 켈리앤은 이때 카메라에 찍히는 객체인 동시에, 그 카메라를 직접 쥐고 있는 주체이다. 이제 그는 재현의 주체와 객체 간의 경계도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다. 그리고 켈리앤은 카미유의 부모의 침실에 카미유의 영상을 담은 USB를 두고 떠난다. . 이때 켈리앤의 의도는 무엇인가? 카미유의 부모에게 결정적인 증거를 넘기고자 한 것인가? 아니면 카미유의 부모가 카미유의 영상을 직접 보게 함으로써(일전에 카미유의 어머니는 다른 피해자의 영상조차도 차마 보지 못하고 법정을 뛰쳐 나온 바 있다.) 오히려 더 큰 고통에 빠뜨리고자 한 것인가? 영화를 2시간 가까이 보아 온 관객은 여전히 켈리앤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어떤 쪽으로 해석하든 켈리앤이 극중 모든 인물을 쥐고 흔드는 주체적 위치에 섰다는 것이다. 아니, ‘극중’이란 말은 잘못되었다. 켈리앤을 여태 지켜 본 관객은 여전히 켈리앤을 알지 못하고, 결국 켈리앤을 상대로 한 재현의 게임에서 우리 관객조차도 패배한 셈이니. . 이후, 씬이 바뀌고, 켈리앤의 모니터 스크린 위로, 켈리앤이 남긴 USB 속 영상이 결정적 증거로 작용하여 뤼도비크의 유죄가 인정되었다는 공판 결과 뉴스가 흘러나온다. 그 모니터는 켈리앤이 경매와 포커, 두 개의 게임에서 두 번의 승리를 거두었던 바로 그 모니터이다. 그리고 공판 결과 뉴스는 누군가가 그 공판기일을 그려 ‘재현한 결과’인 그림의 형태로 제시된다. 결국 그 뉴스는 켈리앤이 공판 절차의 결과까지도 좌지우지할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지닌 게임의 승자가 되었다는 승전보이자, 그 공판 결과가 사실상 켈리앤이 작가로서, 재현의 주체로서 만들어낸 켈리앤의 ‘작품’이나 다름없다는 공표이다. 뒤이어 켈리앤을 상대로 재현의 게임에 패배한 뒤 프레임 밖으로 달아났던 클레망틴이 켈리앤의 스크린 위에 재등장할 때, 위 공표는 한층 더 명확해진다. . 카메라가 모니터로부터 시선을 돌리면, 켈리앤이 암막 커튼을 쳐 두었던 창에 커튼은 다 걷혀 있다. 카메라가 바라보던 모니터가 켈리앤이 바라보던 바로 그 모니터라는 점, 그 모니터로 보는 내용이 켈리앤이 극중 인물을 모두 뒤흔들 만한 주체적 위치에 섰다는 공표라는 점, 켈리앤이 그토록 외부의 시선을 두려워하여 쳐 두었던 커튼이 모두 걷힌 점, 그런데 정작 켈리앤의 모습은 그 공간 내부에 보이지 않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어쩌면 켈리앤이 이 영화의 카메라 자체와 일체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그러한 의심이 드는 순간, 창밖 풍경이 마치 열화된 이미지처럼 픽셀이 깨진다. 카메라는 그 모든 외부의 세계에 렌즈를 들이대며 그 모두를 자신의 객체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켈리앤-카메라가 세계를 집어 삼키며 영화는 끝난다. . 켈리앤과 클레망틴이 사각의 법정을 나서서 뤼도비크의 공판에 대한 의견을 나눈 것, 그것이 바로 켈리앤이 카메라로 화하여 세상을 집어삼키기까지의 과정의 첫 단계였다. 우리 관객들은 이제 사각의 극장을 나서서 방금 본 영화에 대해 의견을 나눌 것이다. 어쩌면 이제 우리에게도 주체, 객체, 관객 사이의 선택지가 주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STONE
3.5
눈을 바라보는 눈, 어쩌면 그 눈동자는 조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조조무비
4.0
#🖥️ 책임없는 시선에 설명없는 시선으로 되갚다.
무비신
4.0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그 시선이 주는 모든 것.
창민
4.5
예측불허의 인물과 서사로 제시하는 충격적인 담론
에베베베
4.5
욕망의 시선을 장착한 신념의 행동. 동기도 과정도 아닌 결과로 증명하는 윤리. 개인이 욕망하는 것, 보는 것, 행하는 것은 모두 구분되어 평가되어야 하며, 자신의 욕망과 신념을 구별하는 것이 양심의 시작이다.
조종인
3.0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까지 포함시키는, 흥미로운 액자식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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