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현대사 3부작’을 찍은 후 허우 샤오시엔이 현대 대만인의 인간상을 그린 첫 작품이자 감독 스스로 자신의 두 번째 데뷔작이라 말하는 새로운 출발점의 영화. 전반부는 건달 카오와 그를 둘러싼 에피소드, 후반부는 카오와 그의 부하, 그의 애인 세 명이 한 몫 잡기 위해 상하이에서 벌이는 소동을 그리고 있다. 대만의 근대화와 대비되는 본토의 저개발을 바라보며 이주민 2세대가 느끼는 혼란과 방황을 통해 과거가 어떻게 현재와 관계하는가를 숙고하고 있는 작품이다.
[1996 칸영화제 상영작]
Jay Oh
3.5
이미 있던 것들에 가려져 방황할 수밖에 없는 청춘. 눅눅하고 녹록지 않은 현실에, 어디로 가는가? Wandering through overgrowth, for a sliver.
포포투
5.0
난 처음 후 샤오시엔을 접했을 때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단순히 그를 대만 역사의 대변자로서 서구인들이 '동양의 미'라 불릴 영화를 찍어내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렇기에 당연히 〈희몽인생 戲夢人生 〉, 〈비정성시 悲情城市 〉 등의 작품은 걸작처럼 느껴졌고 〈남국재견 南國再見,南國 〉과 〈밀레니엄 맘보 千禧曼波 〉를 보며 갸우뚱거렸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다르다. 내가 후 샤오시엔을 좋아하고, 그가 위대하다 생각하는 이유는 그의 영화들이 영화적이기 때문이다. 몇 달전, 허문영 평론가는 〈스파이 브릿지 Bridge of Spies〉를 다룬 글에서 영화를 두고 '간격을 다루는' 예술이라 했다. 후 샤오시엔은 이 특성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 아닐까 한다. 카메라와 대상의 간격, 쇼트와 쇼트의 간격에서 그의 세상에 대한 태도, 세상에 대한 예의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가 예전 자신의 영화적 리듬을 두고 '단지 일상의 리듬을 영화에 넣고 싶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것은 흉내낼 수도 없는, 재능과 배움의 자세에서 비롯된 미덕이기 때문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그는 시작부터 주목받은 천재라기 보다, 많이 찍어 거장에 오른 사례다). 후 샤오시엔은 성장 4부작을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바라보는 것'으로 기억을 새긴다. 그 후 자신의 기억, 나아가 대만과 세상의 기억을 담으려던 그는 자신이 알지만 경험하지 못한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젊은 자신의 이야기와 역사의 이야기를 마친 그는 이제 자신이 아버지임을 깨닫고, 아버지로서 아들을 보며 자신이 정립한 것을 어기고 실험한다. 인간됨을 긍정하고 세상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동시에 영화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실험하는 그의 영화들은 영화적 감흥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리고 후 샤오시엔이 자신의 두번째 데뷔작이라 한 〈남국재견〉은 〈펑쿠이에서 온 소년들 風櫃來的人 〉들의 일종 리메이크이자 〈연연풍진 戀戀風塵 〉의 반대지점에 서 있는 영화로서, 90년대의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다. 과거에 머물던 그의 영화들은 〈호남호녀 好男好女 〉에서 과거와 현대를 오가며, 〈남국재견〉에 이르러선 현대에 안착한다. 허나 이때 안착한다는 것은 함정이다. 이 영화의 사람들은 안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항상 고정되어 있던 그의 카메라는 여기서 움직이고, 방황한다. 〈남국재견〉의 상당수는 데드 타임으로 이뤄져있고, 어디서 무엇을 하는 순간보다 이동하는 순간들이 더 와닿는 영화다. 후 샤오시엔은 이런 이동과 데드 타임의 리듬으로 남국을 떠나려 하는 '아들'들의 리듬을 카메라로 잡아낸다. 영화가 시작하자 오프닝 크레딧이 뜨고 기차 소리가 흐르며,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소리의 음악이 그 위를 덮고 인물들이 등장한다. 등장할때 그들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 빛을 본다. 가장 앞에 위치한 가오는 울리는 전화를 받으려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재밌는건 이때 시끄러운 배경음악 때문에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심지어 타이밍조차 절묘하다. 가오가 처음 핸드폰을 귀에 댈 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안테나를 올리자 배경음악이 더 커진다. 이런 영화 속 사운드와 영화 밖 사운드의 어긋남을 통해 후 샤오시엔은 영화의 시작부터 우리에게 〈남국재견〉은 어긋남의 영화라 귀띔해주고 있다. 어긋남의 실험을 돌아보기 위해 제목을 살펴보자. 이 영화의 원제는 〈남국재견, 남국〉이다. '남국을 다시 보는 것'은 제목에서도 되풀이됨으로서 읽는 이에게 불가피한 '재견'을 마련해준다. 그런데 유명한 영어제목은 〈Goodbye South, Goodbye〉이다. '안녕, 남국이여, 안녕' 여기선 남국, 즉 대만에 작별을 고한다. 그런데 문장을 읽다보면 '작별'을 '재견'하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다. 결국 이 영화는 어긋남 통해 아들이 남국을 다시 보고, 남국에 작별하는 모습을 다시 본다. 주인공 셋은 꿈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즉, 남국에 작별을 고하기 위해 남국을 재견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가 보는 것은 남국에 온 아버지와 남국을 떠나려는 아들의 어긋남의 움직임이다. 여기서 내가 처음 이 영화를 보고 의아했던 점이 있다; 가오밖에 얘기하지 않는 '안녕 남국'의 꿈을 대만의 아들 세대 전체의 것으로 보는 것은 너무 게으른 관점이 아닐까? 그러나, 다시 보니 내가 매우 틀렸다고 깨달았다. 이 영화에는 외화면, 화면 밖을 향한 눈빛과 시선이 거듭해 등장한다. 초반부의 한 장면에서 아비는 건물 밖 창문으로 밥을 달라하고, 밖에서 밥을 먹는다. 〈남국재견〉에서 처음으로 밥을 먹는 장면인데 길거리에서 먹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후 샤오시엔은 거의 소리지르다 싶이 이 씬을 주목하라 외치고 있다). 집이 아닌 곳, 밥상이 아닌 길거리에서 밥을 먹는 아비는 화면 밖을 쳐다본다. 카메라가 패닝해 그가 바라보는 것은 기차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음 쇼트에는 기차의 시점 쇼트가 등장하고 어떤 노래가 흐른다. 그 노래의 첫 가사는 '상하이의 밤'이다. 이어지는 쇼트에 시계가 클로즈업되고 가오의 얼굴이 비춰진다. 여기서 그는 상하이에 식당을 여는 꿈을 고백한다. 그런데 이렇게 이어지는 다섯 쇼트는 (바라보는 아비→움직이는 기차→노래부르는 여인→시계→가오와 여인) 그 움직임과 끊김이 명확하다. 나열한 다섯 쇼트 중 첫 세 쇼트는 모두 큰 움직임이 보이는 트래킹 쇼트다. 그런데 시계가 등장하며 카메라는 어슬렁거린다. 상하이로 떠나고픈 그들의 희망은 말하지 않을때 마치 꿈처럼 움직이는 듯 싶다. 그러나 그 실체를 마주치게 될때, 떠돌아다니는 자신들처럼 카메라는 큰 움직임 없이 남녀의 얼굴 주변만 서성거린다. 다시 어긋남으로 돌아와, 처음부터 주인공 셋은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은 결국 과거의 기억에서 비롯되는 공간인데 이들은 처음 장면부터 자신들의 음악, 소음 같은 음악을 함께 가지고 온다. 인위적인 배경음악은 결국 영화 밖의 소리이다. 결국 영화 밖의 소리가 영화 안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런 어긋남은 역으로 영화 속과 밖을 나란히 놓는 효과를 지닌다. 영화 속 인물이 스크린을 통해 보는 관객만 느끼는 효과를 같이 당하는 것, 즉 영화가 '세상에 대한 태도'라는 그의 고백과 일치하는 장면으로서 둘이 함께 사유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향에 돌아온 이들의 떠돌다니는 '영화적 여정'은 현실의 세상과 나란히 놓여있다. 그리고 이 오프닝 장면에서 카메라는 앞으로 나아가는 기차 밖의 움직임과 반대로 뒷걸음친다. 이동수단의 방향과 카메라의 방향의 어긋남, 상하이를 바라보는 그들의 꿈이 실패할 것은 여기서 미리 예견된다. 반면, '상하이의 밤' 노래가 나오는 장면, 즉 가오와 아비가 타지 않은 기차가 움직일 땐 카메라의 방향과 기차의 방향이 일치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들은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과거로 돌아온 셈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타는 기차는 자신이 염원하는 미래인 상하이로 향하는 듯 바라본다. 여기서 과거와 미래는 뒤얽히는 동시 어긋난다. 〈남국재견〉의 인물들은 집이 없다. 상하이를 꿈꾸지만 목적지도 없다. 이것은 처음 기차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부터 명백하다. 우린 주인공 셋이 기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지 못한다. 여기서 이 셋은 이동 수단, 기차, 오토바이, 그리고 차를 타는 설정 쇼트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고, 차에서 내리는 쇼트는 단 둘만 있다. 그 두 쇼트 중 하나는 우연한 사고이자 영화의 끝이며, 나머지 하나는 예정된 목적지였는데 유흥업소였다. 그들에게서 쇼트의 배열 상 유일하게 목적지에 도착한 사례는 이것뿐이다. 〈남국재견〉하면 가장 떠오르는 움직임은 아마도 유명한 오토바이 트래킹 쇼트일 것이다. 이 장면엔 운동의 리듬, 감초적인 감흥이 느껴진다. 그런데 원동력, 움직임의 벡터가 갑자기 끊기고 저 너머 보이는 기차의 움직임의 쇼트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쇼트가 등장하기 직전에 아비는 '거의 다 도착했어'라는 대사를 읊는다. 기차가 담은 상하이의 꿈, 다음 장면에서 보여지듯이 그들의 목적지는 그 기차가 지나가는 걸 밥 먹으며 보는 역이었다. 이때 기차의 움직임은 왼쪽에서 오른쪽을 그린다. 반대로 마지막 차가 추락할때 움직임은 오른쪽에서 왼쪽이다. 결국 영화의 전반적인 운동은 하나의 원을 그리게 된다. '아들'은 남국을 떠나 본토로 향하는 수직 벡터를 꿈꾸지만 현실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빙빙 돌 뿐이다. 마지막 추락 후 가오는 말이 없고 보이지도 않는다. 문을 열고 아비가 살아있나 확인하는 순간, 영화는 끝난다. 오프닝의 음악이 다시 흘러 영화는 그 움직임과 사운드에 있어 모두 원자리로 되돌아오는 셈이다. 과연 가오가 살아있을까? 우린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살아있다 해도 테크노음악이 덮은 과거의 공간 속, 원을 그리는 시간 속 갇히는 것은 불가피해보인다.
Dh
4.0
뒤를 돌아보지 않을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밤이 없는 도시를 향해 떠난다 #흔들림
P1
3.5
밤에 논밭에서 열쇠찾기란.. "제기랄" 평생동안 액운과 싸우고만 있다간.. 수면 위부터 아래로 침전하는 불순물이 될텐데.. - 남국에 희망을 보았다가, 남국을 다시 떠남은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안타까운 청춘의 방황을 묘사하는 듯?
Cinephile
4.5
타지로 떠날 것임을 곧잘 떠드는 것은 삶에 대한 집착과 의지가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인생의 재시작만이 희망일 정도로 삶이 괴롭다면, 반드시 몸이 그곳을 떠나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김동원
4.0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하는 상태가 방황이라면 떠나지도 머무르지도 못하는 상태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 끼어버림
은갈치
3.5
"응,어 나 잘있어,괜찮아. 큰성 전화 끊지마, 전화 끊지 마, 큰성, 생각나? 빨간 다리, 빨간색 철교, 우리 어렸을 때 빨간 다리 밑에서 물고기 잡으로 간다고 갔다가 쓰레빠 잃어버려 가지고, 큰성이랑 형들이랑 쓰레빠 찾는다고, 놀지도 못하고...." 초록 물고기 231.
시나문
3.5
아침햇살보다 눈부신 암흑 속에 담뱃불, 꾸밈이 없는 영화에서 만난 화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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