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셋. 내 맘 같지 않던 그 시절] 23년간 한 동네에서 줄곧 지내온 '영은'은 언젠가부터 찾아온 공허함을 털어놓을 곳이 하나 없어, 홀로 '가방'을 싸며 달래는 방법을 택했다. 추억이 담긴 소중한 물건들, 제 취향의 생필품, 아직 게시하지 않은 옷가지 등을 가방 속에 차곡차곡 담아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책상밑에 다시 밀어 넣곤 한참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저 가방이야말로 가장 영은과 닮은 모습일 것이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중요한, 솔직한 감정들을 마음속에 담아만 두고 타인들 앞에서는 숨겨만 왔다. 왜였을까? 엄마/아빠의 딸, 누군가의 친구, 누군가의 선생님, 누군가의 을……. 영은은 그렇게 항상 '누군가'에 의해 존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우연히도 거리를 거닐던 ‘영은’의 곁을 과거 첫사랑이었던 '보금'이 스쳐지나가게 되고, 꽁꽁 싸 놓은 가방을 쥔 영은은 가출을 결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