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장르에도 트렌드가 있다는 걸 알고 계셨나요? 최근 영화 팬들 사이에서는 ‘바디 호러’ 장르가 자주 거론되는데요. 지난 12월 11일 국내 개봉한 영화 〈서브스턴스〉가 일으킨 새로운 형태의 바디 호러 신드롬에 대해 소개합니다 👁️👁️💬
‘바디 호러’ 장르란?
영화 〈티탄〉 스틸 컷
바디 호러(Body Horror)는 기괴하게 변형된 인간의 신체를 통해 공포감을 조성하는 장르입니다. 특히 신체의 파괴나 퇴화로부터 기인하는 공포를 다루는데요. 바디 호러는 기본적으로 호러(공포)의 하위 장르 중 하나이기 때문에, 어떤 영화를 바디 호러라는 하나의 장르로만 규정지을 수 있다기보다는 고어, 슬래셔 등 또 다른 하위 장르들과 스펙트럼을 공유하거나 걸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디 호러에는 고어나 슬래셔/스플래터 장르와는 명확히 구분되는데요. 단순히 신체가 썰리거나 찢어지는 게 아니라, 신체의 재배치를 통해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만들어 혐오감을 조성하고 신체 부위에서 돌연변이를 창조해 내는 등, 근본적으로 몸의 ‘변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 그 특징입니다. 폭력이나 위협에 의해 즉각적으로 신체가 훼손되는 것보다는 통제할 수 없는 변형이 서서히 일어나는 거죠.
영화 〈비디오드롬〉 스틸 컷
바디 호러 영화들은 주로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이미지들을 통해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고 뒤집는 메시지를 전하는데요. 대표작으로는 바디 호러 영화의 시초이자 대가로 불리는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비디오드롬〉, 〈플라이〉, 〈데드 링거〉, 존 카펜터 감독의 〈괴물〉 등이 있습니다.
여성 감독이 일으킨 바디 호러 신드롬
영화 〈티탄〉 스틸 컷
바디 호러라는 장르가 최근 다시금 주목받게 된 데에는 확실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2021년 제74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 종려상을 수상한 쥘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영화 〈티탄〉이 그 시작인데요. 영화는 여성이 자동차와의 성관계를 통해 임신을 하는 등 파격적인 이미지와 충격적인 서사를 보여주며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강동원 배우가 남긴 “내가 지금 뭘 본 건가”라는 감상평이 화제가 되기도 했죠. 〈티탄〉은 기존 호러 장르에서 주로 남성에 의해 파괴되던 여성의 신체를 여성 스스로가 파괴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제시하는 동시에, 남성 중심으로 흘러가던 장르 영화에 새로운 화두를 던졌습니다.
영화 〈티탄〉 리뷰 포스터
여성이 주도하는 장르 영화에 대한 수요와 관심이 점점 늘어나는 시점에 나온 문제작이 바로 〈서브스턴스〉입니다.
영화 〈서브스턴스〉 포스터
〈서브스턴스〉는 어떤 영화?
영화 〈서브스턴스〉 스틸 컷
〈서브스턴스〉는 2017년 〈리벤지〉를 통해 평단을 사로잡은 프랑스 여성 감독 코랄리 파르자의 두 번째 장편 영화입니다. 영화는 한때 잘나가던 할리우드 스타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이 ‘서브스턴스’라는 제품을 사용해 더 젊고 아름다운 버전의 자신, ‘수’(마가렛 퀄리)를 마주하며 겪는 이야기를 담았는데요. 〈서브스턴스〉는 제77회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하고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도 5개 부문 후보에 오르는 등 거침없는 성과를 보여주는 동시에, 폭력성과 파격적인 이미지 때문에 대중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고 있습니다.
영화 〈서브스턴스〉 스틸 컷
영화는 140분이라는 러닝타임을 쉬지 않고 달려가며 주인공을 몰아붙입니다. ‘엘리자베스’가 더 나은 버전의 ‘수’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미지부터가 굉장히 강렬하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만큼 끝까지 가는 작품이기 때문에, 혀를 내두르며 도중에 관람을 포기하는 관객들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코랄리 파르자 감독이 이토록 파격적인 설정과 폭력성을 고집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서브스턴스〉가 보여주는 여성의 몸과 공포
기본적으로 바디 호러라는 장르에 충실하면서도, 〈서브스턴스〉에서 제시하는 공포는 단순 신체 변형에 그치지 않습니다. 젊음과 완벽한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하는 남성 중심 미디어 산업에서 ‘밀려날 위험’을 느끼는 여성 내면의 공포를 촘촘히 묘사해낸 심리 스릴러이기도 하죠.
영화 〈서브스턴스〉 스틸 컷
코랄리 파르자 감독은 〈서브스턴스〉가 결국 ‘여성’의 몸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감독 스스로가 40대에 들어서며 체감한 공포와 위협을 고스란히 영화에 담았다고 하는데요. 여성의 몸이 끊임없이 판단되고, 분석되며, 성적 대상화되는 사회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맞춰야 하는 상황 자체가 폭력이라는 거죠. ‘여성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바디 호러’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감독은 재단당한 여성이 사회를 향해 분노를 표출함에 있어 그 폭발이 갇혀있지 않고 보는 사람에게도 통쾌함을 가져다주길 원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를 그려내는 데 있어 결코 ‘미묘한(subtle)’ 정도에 그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며 영화를 끝까지 폭력적으로 몰아붙여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했죠.
영화 〈서브스턴스〉 스틸 컷
캐스팅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엘리자베스’를 연기한 데미 무어는 어린 시절부터 미디어 산업에 종사하며 사회의 ‘시선’에 시달린 인물입니다. 소위 말하는 ‘리즈 시절’, 인형 같은 외모로 〈사랑과 영혼〉에 출연하며 할리우드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던 데미 무어가 과도한 다이어트와 성형 수술에 집착했던 일화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코랄리 파르자 감독은 데미 무어의 자서전 [인사이드 아웃]을 읽고, ‘엘리자베스’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영화 〈서브스턴스〉 스틸 컷
마가렛 퀄리가 연기한 ‘수’는 그야말로 완벽함을 상징하는 피조물입니다. 남성이 지배하는 산업에서 여성의 몸에 드리워지는 잣대를 보여주죠. 영화에서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수’의 신체 부위를 과도하게 클로즈업하는 등 관객들로 하여금 폭력적인 시선을 행사하도록 합니다.
〈서브스턴스〉는 바디 호러라는 파격적이고 비일상적인 화법을 통해 인간이라면, 특히 여성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가장 원초적인 공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 아래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고들 하지만, 이처럼 기존 질서를 해체하며 해방감을 선사하는 바디 호러 장르에서만큼은 ‘전에 없던 영화’들이 나올 수 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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