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 감독의 첫 시리즈 〈번화〉를 드디어 국내에서도 감상할 수 있게 됐어요. 왕가위 감독의 2013년작 〈일대종사〉 이후 10년 만의 연출작으로 화제가 됐던 드라마인데요. 〈번화〉 작품과 캐릭터 소개부터 제작 관련 트리비아까지,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리해봤습니다.
✨ 네온빛 명암으로 포착한 1990년대 상하이
© 스튜디오S
〈번화〉는 작가 진위청의 동명 소설이 원작으로, 왕가위 감독이 2014년에 직접 판권을 매입해 7년의 준비 기간과 3년간의 촬영 기간을 거쳐 완성된 작품입니다. 왕가위 감독은 〈아비정전〉, 〈중경삼림〉, 〈화양연화〉 등 전작에서 홍콩의 모습을 담았죠. 그가 홍콩이 아닌 상하이에서 이야기를 펼친다는 것이 신선했는데요. 왕가위 감독은 상하이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자랐고, 고향인 상하이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관심으로 원작 소설과는 또다른 시대극 〈번화〉를 선보였습니다.
‘만개한 꽃’을 뜻하는 제목인 ‘번화(繁花, Blossoms Shanghai)’는 작중 배경이 되는 그 시절 번화했던 상하이를 의미하기도 하는데요. 화려한 꽃처럼 피어난 도시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삶이 은유적이고 감각적인 왕가위 감독의 시선을 만나 보는 이들에게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 스튜디오S
〈번화〉의 무대는 1990년대 중국, 개혁 개방 시기의 상하이인데요. 가난한 청년이었던 주인공 ‘아바오’(호가)가 자본의 세계에 뛰어들어 백만장자 ‘바오사장’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아바오는 그 과정에서 ‘링쯔’(마이리), ‘미스 왕’(당언), ‘리리’(신지뢰)라는 세 여성과 얽히고설킨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데요. 성공을 향한 욕망, 우정인지 사랑인지 모를 미묘한 감정을 오가며 격동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1화 시작부터 강렬한데요. 새해 카운트다운으로 들뜬 상하이의 밤,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거리로 나온 아바오는 돌진하는 택시와 충돌합니다. 아바오는 스승인 ‘예슈’(유본창)의 가르침 덕분에 주식 투자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사업가가 됐는데요. 총 30부작인 이 대서사시에서 누가 왜 아바오를 죽이려고 했는지는 잠시 언급될 뿐입니다. 이후 스토리 전개는 그가 빠르게 변하는 상하이 한복판에서 어떤 인연들을 만나고, 또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떻게 판단을 내리는지에 초점이 맞춰져요.
📈 1990년대 상하이는

© 스튜디오S
1978년 덩샤오핑은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이후 중국은 1990년대에 접어들며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며 성장하게 되는데요. 상하이는 바로 그 중심에 있는 도시였고, 푸동 지역 개발으로 도시 전체가 급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식 시장이 열리고 부동산 붐이 일어나면서 투자나 사업으로 단기간에 부를 거머쥔 신흥 자본가들도 등장했어요. 〈번화〉의 아바오는 경제 개방과 함께 등장한 신흥 부자 1세대이자, 이전에는 없었던 민간 자본가 혹은 개인 투자자를 상징하는데요. 극 중 아바오는 기회를 잡아 상류층으로 도약했으나, 성공의 대가가 마냥 달콤하지는 않았죠. 끊임없는 경쟁과 믿었던 사람의 배신, 의리와 욕망의 줄다리기까지, 격변하는 도시에서 아바오가 감내했던 모든 일은 당시 중국 사회의 그림자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 원작 소설과의 차이점
© 문학동네
진위청의 소설 [번화]는 중국 최고 문학상인 마오둔문학상 수상작으로, 상하이 시민들의 일상과 언어, 문화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소설인데요. 왕가위 감독은 “도시 상하이에도 상하이만의 생활, 정신, 문화의 지층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가 바로 [번화]”라며 원작에 매혹된 이유를 밝히기도 했죠.
드라마는 1990년대 아바오의 이야기지만, 소설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를 폭넓게 다루는데요. 주인공도 후성, 아바오, 샤오마오 이렇게 셋으로, 모두 상하이 출신이나 배경은 제각각입니다. 작가는 이들이 살아가는 공간과 마주하는 사건 및 인물 등의 면면을 서술하면서, 문화대혁명 시기를 거쳐온 젊은이들의 삶 그리고 도시 풍경을 세밀하게 표현했어요. 원작이 도시 에세이라면, 드라마에서는 왕가위 감독 특유의 미장센과 함께 아바오를 중심으로 훨씬 더 극적으로 각색된 서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각기 다른 케미를 발산하는 아바오와 세 여성들

© 스튜디오S
평범한 청년이었던 아바오는 무역 사업과 주식 투자로 상하이 재계 유명인사가 됩니다. 아바오는 호승심도 없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정과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요. 기민한 사업 감각으로 황허루에서 명성이 자자하지만, 내면에는 결핍과 고독함을 품고 있어 감정 앞에서는 약해지는 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때문에 왕가위의 작품에서 종종 볼 수 있던 ‘불안하고 외로운 도시 남자’의 실루엣이 얼핏 스치기도 해요.
〈번화〉에서 아바오만큼 활약하는 건 그와 우연 혹은 필연으로 마주친 링쯔, 미스 왕, 리리인데요. 세 여성 모두 능동적으로 자기 삶을 개척해가는 캐릭터라 매력적이었고, 아바오와도 각기 다른 관계성으로 서사를 쌓아가서 흥미로웠어요.
► 아바오 X 링쯔, 유사 부부 같은 동업자
© 스튜디오S
레스토랑 ‘도쿄나이트’의 사장인 링쯔는 아바오의 동업자로,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캐릭터입니다. 아바오는 자금을, 링쯔는 식당 운영을 맡아 왔는데요. 둘은 아바오가 본격적으로 성공하기 전에 도쿄에서 만난 인연으로, 아바오와 시종일관 스스럼 없이 티격태격해서 유사 부부처럼 느껴지는 장면들이 더러 있었어요. 현실적이다 못해 계산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지만, 아바오를 향한 마음은 누구보다 진심입니다.
► 아바오 X 미스 왕, 우정과 사랑 사이

© 스튜디오S
상하이 대외무역공사의 직원인 미스 왕(왕밍주)은 아바오의 무역 비지니스 파트너로, 그와 우정인 듯 사랑 같은 미묘한 경계선을 맴돌아요. 두 사람은 대외무역공사 사무실에서 우연히 만나 꾸준히 신뢰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요. 덕분에 아바오는 성공가도를 걷고, 미스 왕은 커리어 우먼으로 성장합니다. 미스 왕은 아바오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극이 진행되는 내내 기회와 감정 사이에서 여러 변곡점을 맞이하게 돼요.
► 아바오 X 리리, 끝없이 계속되는 밀당

© 스튜디오S
어느 날 갑자기 황허루에 나타난 리리는 미스터리 자체입니다. 고급 레스토랑 ‘즈전위안’을 오픈한 리리는 예리한 사업 감각으로 비지니스 판도를 바꾸고, 아바오와도 묘한 심리전을 거듭하며 긴장감을 형성하는데요. 아바오와 리리의 탐색전이 계속되면서 쉽게 정의하기 어려운 어떤 감정도 자라나기 시작해요. 과연 두 사람 사이에 이성적인 끌림이 있는 건지, 리리의 진짜 목적은 무엇일지 계속 궁금해집니다.
📝 〈번화〉 트리비아

© 스튜디오S
01. 호가, 당언, 마이리 등 상하이 출신 배우들이 대거 참여했어요. (총 29명)
02. 실제 황허루, 진센루 거리와 1:1 비율로 재현한 세트에서 촬영했어요.
03. 3,000여 점의 소품, 2,900여 벌의 의상이 준비됐습니다. 극 중 등장하는 네온사인을 비롯해 모든 소품은 전부 고증을 거쳤다고 해요.
© 스튜디오S
04. 촬영에는 3년 정도가 소요됐고, 왕가위 감독의 전매특허 ‘한 장면 수십 번 촬영하기’는 〈번화〉에서도 이어졌어요.
링쯔가 창문 앞을 지나가는 18초 장면은 20번 이상 찍었다고 알려졌는데요. 조명과 배우의 움직임, 소품, 분위기 등 모든 요소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져야 했기 때문에 반복 촬영했다고 합니다.
© 스튜디오S
05. 배우들의 얼굴 붓기를 피하기 위해 밤에 촬영을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06. 음악 저작권료만 1천만 위안(약 20억 원). 1990년대 인기 만다팝(중국어로 부른 대중가요), 캔토팝(광둥어와 서양 팝음악이 결합된 대중음악) 57곡을 사용했대요.
© 스튜디오S
07. 왕가위 감독은 2024년에 〈번화〉 이후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 〈好久不见(Long Time No See)〉을 공개했어요.
드라마 종영 1주년을 기념해 공개된 18분짜리 영상으로, 아직 국내에 정식 수입되지 않았는데요. 〈번화〉의 마지막화(1994년)로부터 6년 후 2000년의 이야기로, 상하이의 〈화양연화〉 시사회장에서 재회한 아바오와 미스 왕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과거를 돌아보는 동시에 미래를 향한 이야기”

© 스튜디오S
〈번화〉는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더라고요. 왕가위 감독은 〈번화〉를 “과거를 돌아보는 동시에 미래를 향한 이야기”라고 소개했어요. 아바오, 링쯔, 미스 왕, 리리 모두는 이루고 싶은 욕망이 있었고, 당시 상하이는 이들에게 성공의 기회와 그 이면의 대가까지 모두 제공했습니다.
왕가위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모든 이미지와 감성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해요. 아름다운 미장센도 그렇지만, 〈화양연화〉 같은 전작들의 테마 곡을 활용하거나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의 씬을 오마주하는 등 중간중간 향수를 자극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보는 내내 왕가위 감독이 이 작품과 캐릭터들을 얼마나 애정하는지 고스란히 느껴졌어요.
아래 관련 콘텐츠를 통해 〈번화〉의 예상 별점을 확인해보세요👀
Copyright © 왓챠피디아, 무단 전재-재배포 및 AI 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