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청소년들이 직접 만든 이야기

약 2개월 전

이 영화를 처음 마주하는 관객이라면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별다른 설명 없이 낯선 세계관 한가운데에 관객들을 던져놓기 때문인데요. 지금까지 봐 왔던 영화들과는 사뭇 다른 소재와 전개 방식으로 ‘괴작’이라는 수식어를 얻은 영화 〈에스퍼의 빛〉입니다. 

 

 

© 시네마토그래프



판타지 영화? 다큐멘터리? 

〈에스퍼의 빛〉은 열 명 남짓의 10대 청소년들이 직접 만든 캐릭터와 서사를 따라갑니다. ‘TRPG’(Tabletop Role-Playing Game) 혹은 ‘자캐 커뮤’(자캐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과정을 기록한 건데요. SNS에서 저마다 가상의 캐릭터를 설정하고 ‘OA’(Operating Account) 계정의 지시에 따르며 플레이하게 되는 이 게임에는 큰 틀만 정해져 있을 뿐, 그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는 전적으로 플레이어들의 몫입니다. 그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플레이어가 이끄는 대로 완전히 새로운 규칙을 가진 세계들을 탐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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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총 3장으로 구성됐습니다. 1장 ‘괴력의 아이들’은 서로 다른 이능력을 가진 아이들이 탄압받는 근미래에서 생존하는 내용을 그리는데요. 1장의 엔딩에서 이어지는 2장은 세계를 멸망시킬 수도, 구원할 수도 있는 힘을 가진 ‘새벽의 파편’이라는 돌을 다 같이 지켜내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3장 ‘기뇌국’은 ‘아수아 섬’에 사는 이능력자들과 안드로이드들이 서로 대립하는 내용이죠. 개별적으로 진행한 플레이의 내용이 각 장에 담겼기 때문에 플레이어들은 서로의 서사를 모르는 상태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순차적으로 플레이를 진행했기 때문에 앞 장의 엔딩이 있어야 다음 장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세계관 속에서 캐릭터나 사건들이 일시적으로 교차하는 지점들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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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퍼의 빛〉에서는 단어만 들어서는 잘 와닿지 않는 개념들이 스크린 위에 직접 이미지로 제시됩니다. 청소년들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게임에 몰두하는 현실의 이미지와 온라인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상상의 이미지가 교차됐는데요. 얼핏 보면 플레이 내용에 따라 짜여진 각본을 재구성해 연출한 극영화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정재훈 감독은 온라인 역시 물리적인 공간이자 일종의 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롤플레잉을 통해 스스로를 비춰보는 과정을 담은 〈에스퍼의 빛〉이 다큐멘터리가 아닐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청소년 각본가들이 쓴 이야기

정재훈 감독은 약 7-8년 전, 청소년 아카데미의 영화 워크숍에 강사로 참여하며 이 작품을 착안했습니다. 청소년기란 누구나 거쳐가지만 일순간에 마치 없던 것처럼 사라지는 시기라고 표현했는데요. 자기 표출이 어려운 시기이다 보니 청소년들이 현실보다 온라인 세계를 훨씬 친숙하게 여기며, 가상의 캐릭터나 스토리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더 편하게 여긴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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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진, 고유희, 김시연(가명), 모데스토바 나타샤, 심다하, 양규리, 양효리, 이새나, 이현빈, 임철민, 정은석(가명), 최연진, 한서화. 〈에스퍼의 빛〉의 각본가 크레딧에는 열 명이 넘는 청소년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는데요. 몇몇은 자신의 캐릭터로서 영화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지만, 배우나 각본가라는 이름 대신 ‘플레이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합합니다. 제작진은 플레이 과정이 일종의 인터뷰라고 생각했다는데요. 영화의 제작 과정에서는 플레이 내용을 각색하거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스크린에 옮기는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의 세계관을 플레이하는 데 걸린 시간은 1-2개월 남짓으로, 총 6-7개월에 걸쳐 플레이한 내용이 편집되어 영화에 담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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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한 플레이어들이 대부분 학생이었기 때문에 평일에는 주로 개인 로그를 작성하고,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공통 스토리를 진행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중간에 활발히 플레이하지 않은 캐릭터의 서사는 자연스럽게 분량이 줄어들기도 했는데,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 또한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선택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대로 서사에 반영됐어요.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캐릭터의 외향도 원하는 대로 설정할 수 있었으며, 함께 이야기하며 엔딩까지 나아갔는데요. 영화화하며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구현이 어려워 사건이나 캐릭터가 삭제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플레이 자체에 제한을 두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는 뜻이기도 해요. 



감각을 열어 완성시킬 것

모든 선택지를 열어둔 채 발길이 닿는 대로 펼친 무궁무진한 이야기. 그렇다면 ‘이 영화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남는데요. 익숙한 형식과 개연성이라는 관습을 따르지 않아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결국 영화는 가상의 세계관 안에서 캐릭터들이 서사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이미 TRPG나 자캐 커뮤 세계관과도 상당 부분 닮아 있을지 모릅니다. 영화라는 체험 역시 세계관 안으로 발을 한번 들여놓고 나면 그 안에서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지는 오로지 관객들의 몫이기 때문이죠. 그저 이 영화가 내미는 초대에 열린 마음으로 응한다면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것을 금세 체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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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훈 감독은 “영화는 관객으로부터 완성되는 것이니 감각을 열어달라”며 이 영화가 개봉하는 것 자체가 모험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요. 감독은 〈에스퍼의 빛〉이 이번 영화의 개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진행 중인 프로젝트라고 합니다. 실제로 리딩 공연의 형태로 풀어본 적도 있었고, 관객들의 피드백이 이어지기도 하며 세션이 진행되는 중에 영화화됐을 뿐이라는 거죠. 이 프로젝트를 극영화 혹은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으로 규정하기 난감하며, 아직 적당한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것 같다고도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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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과정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만큼, 이 영화에 대한 어떤 논의도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구현하며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까지 던지는 문제작 〈에스퍼의 빛〉은 향후 VOD 출시 계획이 없어 오직 극장에서만 만나볼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 아래 관련 콘텐츠를 통해 나의 〈에스퍼의 빛〉 예상별점을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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