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규 감독의 영화 〈쉬리〉가 지난 3월 19일 4K 리마스터링으로 26년 만에 극장에서 처음으로 재개봉했습니다. 1999년 개봉한 한국 최초의 블록버스터 〈쉬리〉는 〈타이타닉〉을 제치고 엄청난 흥행을 거뒀는데요. 정확한 집계가 불가능했던 시기에 서울 관객만 240만 명, 전국 관객은 621만 명을 동원하며 1990년대 최고 흥행작이 됐고, 2000년대 천만 관객 시대의 포문을 열었습니다.
© CJ ENM
〈쉬리〉는 국가 일급 비밀정보기관 OP의 특수요원 ‘유중원’(한석규)과 그의 동료 ‘이장길’(송강호)이 북한 특수 8군단 대장 ‘박무영’(최민식)과 남파 간첩, 내부의 첩자까지, 모두에 맞서 벌이는 숨막히는 첩보전을 그립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초. 한국 영화 산업의 시작점. 한국 영화계의 판도를 바꾼 작품. 한국 영화의 터닝포인트이자 분기점. 한국 영화 르네상스의 신호탄. 이 모든 표현이 〈쉬리〉를 가리킬 정도로, 〈쉬리〉는 한국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작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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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후반, 국내 극장가의 선호도는 외화가 압도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쉬리〉는 당시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던 박진감 넘치는 액션과 스케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극장가에 ‘한국 영화도 할리우드처럼 할 수 있다’는 감상과 확신을 안겨줬어요. 도심 한복판부터 축구 경기장까지 다양한 공간에서 총격 액션이 펼쳐지는데, 총탄의 파편과 불꽃이 튀는 세밀한 효과를 구현하기 위해 세 달간 200여 차례의 실험을 거쳤다고 알려졌습니다. 총기도 미국에서 수입한 것을 사용해 현실감을 높였고, CG와 미니어처를 활용한 건물 폭파 장면 등 극적인 장면들이 이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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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적으로 시사하는 바도 큽니다. 그전까지는 영화가 서울에서 먼저 개봉한 다음 지방에서도 순차적으로 개봉되는 방식이었는데, 〈쉬리〉는 최초로 지금의 전국 동시 개봉, 즉 와이드 릴리스(wide release, 광역 개봉 방식)로 공개됐어요. 흥행 성적에 따라 출연료를 더 받는 러닝 개런티 계약도 한국 영화에선 〈쉬리〉의 한석규 배우가 처음이고, 일본에 수출돼 흥행 수입 18억 엔을 돌파하며 영화 한류의 원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쉬리〉는 한국 영화의 상업성을 입증했습니다. 〈쉬리〉의 제작비는 마케팅비를 포함해 30억 원, 90년대 한국 영화계에서는 사상 초유의 금액이었는데요. 〈쉬리〉의 성공으로 한국 영화판에 엄청난 자본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1999년 한국 영화 제작 편수는 49편, 평균 제작비는 19억 원이었으나 2003년에는 제작 편수 80편 이상, 편당 제작비는 40억 원 이상의 기록을 세웠어요. 〈쉬리〉는 한국 영화 붐을 일으켰고, 그래서 한국 영화 ‘산업’은 〈쉬리〉부터라는 평가가 따라오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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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 산업의 초석이 된 작품이지만, 1999년 개봉 후 〈쉬리〉를 찾아보는 건 생각보다 힘들었어요. 판권 이슈로 어느 OTT 플랫폼에서도 서비스되지 않았고, 재개봉도 VOD도 26년 만인 올해가 처음입니다.
〈쉬리〉의 투자배급사는 이건희 회장이 출범한 ‘삼성영상사업단’으로, 1997년 IMF 외환 위기로 사업을 철수하게 됐는데요. 〈쉬리〉는 삼성영상사업단 해체 직전에 대박을 터뜨렸지만, IP(지식재산권)는 삼성전자로 넘어갔고 그렇게 판권 주체가 묘연해졌습니다. 담당자가 없어 사후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에 온라인으로 보기 어려웠는데, CJ ENM이 〈쉬리〉 IP 활용을 위한 대행사로 나서며 이제서야 다시 대중들을 만날 수 있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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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리〉는 블록버스터란 외피 안에 깃든 서정성이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남북 분단 소재에 대규모 총기 액션, 거기다 남북 요원의 망한 사랑까지, 그 시절에는 흔치 않았던 복합 장르물인데요. 남북 분단 첩보물의 클리셰는 다 〈쉬리〉에서 탄생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캐릭터도 입체적이고 스토리가 잘 짜여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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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들을 한 영화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인상적인데요.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 김윤진, 박용우 등 주조연 라인업이 화려한데 김수로, 장현성, 황정민 등 카메오로 잠깐 나오는 배우들까지 엄청납니다. 러닝타임 내내 대배우들의 화양연화를 감상할 수 있어요.
〈쉬리〉에서 한석규는 특수요원이라는 직업적 신념과 개인적인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유중원’을 통해 〈접속〉과 〈8월의 크리스마스〉의 멜로와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줬습니다. 놀랍게도 〈쉬리〉 전에는 순박한 청년 이미지가 더 강했다던 최민식은 북한 특수 8군단의 ‘박무영’ 역을 맡아 형형한 눈빛으로 화면을 장악합니다. 송강호는 유중원의 동료 ‘이장길’로 등장하는데요. 송강호의 조연 시절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조금 재미있는 포인트가 되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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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진은 유중원의 연인 ‘이명현’으로 분해 강렬하고 또 애틋한 열연으로 몰입감을 더합니다. 영화 말미 유중원과 이명현이 대치하는 장면은 〈쉬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인데요. 극 중 유중원과 이명현의 비극적인 서사는 망한 사랑의 바이블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애절하고 안타까워요.
세월이 흐른 만큼 지금 보면 조금 뻔한 지점도 있겠지만, 〈쉬리〉가 20세기에 나온 영화라는 걸 감안하면 여러모로 감탄할 부분이 많습니다. 처음 보더라도, 아니면 오랜만에 다시 보더라도 〈쉬리〉는 ‘그때 이걸 (이 돈으로) 어떻게 찍었지?’라는 생각을 들게 할 거예요. 추억 보정 필터가 없더라도 왜 그렇게 유명한지 납득이 될 만큼 재미있고, 진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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