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들에게는 〈트와일라잇〉의 하이틴 스타로 익숙한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감독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지난 1월 28일 개봉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첫 연출작 〈물의 연대기〉는 2011년 출간된 리디아 유크나비치 작가의 첫 번째 회고록 [물의 연대기]를 영화화한 작품인데요. 원작 역시 뻔한 극복 서사와는 거리가 먼 만큼,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영화화 과정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습니다.
© 판씨네마㈜
리디아 유크나비치의 회고록 [물의 연대기]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책을 펼쳐든 사람이라면, 이 작품이 소설이 아닌 에세이라는 것에 적잖이 충격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한 여성이 겪었다기에는 지나치게 불행하고 불편한 이야기들이 첫 문장부터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국내에는 [숨을 참던 나날]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간된 리디아 유크나비치의 회고록은 에세이로서는 이례적일 정도로 컬트적인 열풍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에 올랐습니다.

리디아 유크나비치는 30대에 접어들어 글쓰기를 시작한 늦깎이 작가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올림픽 대표를 꿈꿨을 만큼 촉망받는 수영 선수였지만, 아버지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하고 마약 중독에 빠지며 좌절을 겪게 됐죠. 대학을 중퇴하고 유산을 하는 등 불행을 타고난 듯한 운명을 마침내 돌려놓은 것은 글쓰기였다고 하는데요. 회고록 [물의 연대기]에서 리디아 유크나비치는 자신이 겪은 좌절과 고통의 시간들을 기억하는 그대로 쏟아내고, 글쓰기를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마침내 삶을 받아들이게 된 과정을 기록합니다.
리디아 유크나비치 작가 © The New York Times
[물의 연대기]가 그토록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유는 단순히 리디아 유크나비치가 겪어낸 삶이 지독하게 불행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상실과 실패, 부끄러움과 자기 수용의 과정을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은 채 쏟아낸 내밀한 고백이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기 때문인데요. 또한,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기억들을 시간 순서가 아니라 존재하는 그대로 서술한 방식을 택하며 실제로 기억을 더듬으며 감정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따라가게 했습니다.
“내가 엮어놓은 인생 이야기는 때때로 분노로 가득하고 자기 파괴적이고 지저분하고 심지어 망상처럼 읽힌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것들. 우아한 것들. 희망찬 것들은 때때로 어두운 곳에서 생겨난다. 게다가, 나 같은 여자의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 내 목적이니까.”
- [물의 연대기] p.397
신인 감독 크리스틴 스튜어트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물의 연대기]를 만난 건, 2017년 영화 〈제이티 르로이〉의 촬영장이었습니다. 책의 첫 40페이지 가량을 읽은 스튜어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전부 담겨 있는 책이라는 생각에 즉시 작가인 리디아 유크나비치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영화의 판권을 구매했는데요. 평소 영화에도 관심이 많았던 리디아 유크나비치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 활동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소설 [Dora: A Headcase]를 집필하기도 했다며 ‘예술가들은 서로를 찾아내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 Les Films du Losange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영화 촬영장에 처음 발을 들인 순간부터 감독이 되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무대 감독이었던 아버지와 시나리오 작가였던 어머니 덕분에 아주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촬영장이라는 공간에 익숙해질 수 있었고, 9살의 나이에 배우로 데뷔한 이후에도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고 하죠. 하지만 〈물의 연대기〉의 제작에는 장장 8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요.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할리우드에서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활동한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젊다’는 것은 경험이 부족하다는 뜻이 되어, 영화를 찍기 위한 투자 자금을 마련하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Mark Cassar
스튜어트는 우여곡절 끝에 라트비아와 몰타로 로케이션을 옮겨 〈물의 연대기〉를 촬영하는 데에 성공했고, 자신이 배우로 활동하며 만난 수많은 감독들이 상업 작품 속에서도 어떻게 자신만의 색깔을 잃지 않는지를 연구했던 과정들 덕분에 처음 구상했던 모든 것들을 최종 결과물에 녹여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여성을 위한 영화 〈물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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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모두에 관한 것으로 바꿔낸다는 것은 어려운 작업입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 역시 이 영화를 아이디어 단계에서부터 사람들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책과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도 짚어주듯, 기억에는 순서가 없기 때문에 퍼즐 조각처럼 흩어진 이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긴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도전이었던 거죠. 하지만 결국 〈물의 연대기〉는 특정 개인에게 일어난 일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여성이 그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하는지, 그리고 예술이 어떻게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정이었기 때문에 정확히 똑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더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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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아 유크나비치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찾은 것처럼,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마침내 영화를 만들며 자신의 예술적 여정을 완성했습니다. 마치 언어를 소화시켜서 다시 뱉어내는 듯한 제작 과정을 통해 영화 자체가 가진 생명력을 느꼈다고 하는데요. 단순히 영상을 ‘녹화’하기보다는 16mm 셀룰로이드 필름으로 이미지 한 컷 한 컷을 포착하는 방식을 택하며 조각조각 이어 붙여진 듯한 기억과 감정을 포착해냈습니다.
© Les Films du Losange
〈물의 연대기〉는 신인 감독으로 데뷔한 크리스틴 스튜어트를 포함한 모든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허락받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뒤섞이는 이미지들과 몸 밖에서 오가는 대화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내면의 목소리에 미치는 영향을 직설적이고도 강렬하게 쏟아내죠.
자신만의 색깔로 첫 연출작을 선보인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모든 것이 펼쳐지고 사람들이 탐험하고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며 영화는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가져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2026년 주목해야 할 감독 10인’에도 이름을 올렸으며, 이미 집필 중인 시나리오가 세 편이나 된다며 당장이라도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그녀의 다음 영화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지난 1월 28일 국내 개봉한 ‘저널 시네마’ 〈물의 연대기〉는 극장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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