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상실, 성장 사이의 여름

19일 전

올여름 연달아 개봉한 청춘 영화 세 편으로 한국 관객들을 사로잡은 감독이 있습니다. 〈태풍 클럽〉, 〈이사〉, 〈여름정원〉의 소마이 신지 감독인데요. 30년도 전에 만들어진 이 영화들이 최근 재조명되며 뜨거운 사랑과 관심을 받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 엠엔엠인터내셔널, 찬란

 

 

소마이 신지의 재발견

1980년대 일본 뉴웨이브 영화를 이끌었던 소마이 신지 감독은 당시 스튜디오 형식으로 운영되던 일본의 도제식 영화 제작 시스템을 거쳐 감독이 된 마지막 세대입니다. 영화산업의 판도가 바뀌던 침체기 속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며 작가성을 확립해나갔는데요. 이후 고레에다 히로카즈나 이와이 슌지 등의 후대 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소마이 신지 감독 © 提供写真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소마이 신지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영화를 만드는 일본 영화감독은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이처럼 소마이 신지는 일본에서는 일찌감치 독보적 존재로 인정받고 있었던 반면, 국제 무대에서는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활동 당시 만든 대표작들이 대중성과는 거리가 있어 당시 해외 배급의 기회를 적극적으로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 2010년대 이후 일본국립영화아카이브와 여러 해외 영화제에서 소마이 신지의 작품들을 복원하고 재상영하기 시작했고, 후대 감독들의 꾸준한 언급과 함께 최근 그의 미학이 세계적으로 조명 받고 있는데요. 한국에서는 2024년 〈태풍 클럽〉이 처음으로 개봉하면서 소마이 신지의 영화가 정식으로 소개됐습니다. 

 

 

여름은 아픈 성장의 계절

지난 7월부터 국내에서 차례로 개봉한 세 편의 영화 〈태풍 클럽〉(1985), 〈이사〉(1993), 〈여름 정원〉(1994)은 모두 여름을 배경으로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통 떠올리는 싱그럽고 풋풋한 여름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어요. 소마이 신지의 영화 속 여름은 아이들이 아직 세상의 질서에 완전히 편입되기 전, 잠시 허공에 떠 있는 듯한 시간을 상징합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우연히 죽음을 목격하거나, 삶의 유한성을 직감하는 순간을 맞닥뜨리게 되는데요. 결코 아름답게만 묘사되지 않는 여름을 지나며 생의 덧없음을 체감하고 순수의 상실을 겪습니다. 

 

영화 〈태풍 클럽〉 © 엠엔엠인터내셔널

 

소마이 신지의 초기작을 대표하는 〈태풍 클럽〉은 태풍이 다가오는 어느 여름, 한 시골 중학생들의 5일간의 이상야릇한 행적을 쫓습니다. 자유롭고 파괴적인 에너지가 가장 고스란히 담긴 작품인데요. 최근 네오 소라 감독이 영화 〈해피엔드〉를 만들며 가장 먼저 떠올린 영화라고 밝히기도 했죠. 십대들에겐 금기처럼 여겨졌던 성, 죽음, 우울 등의 주제를 넘나들며, 말 그대로 ‘태풍’과도 같은 시기의 혼돈과 십대들의 위태로운 심리를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이미지로 표현했습니다. 

 

영화 〈이사〉 © 찬란

 

히코 다나카의 소설 [두 개의 집]이 원작인 1993년 영화 〈이사〉는 부모의 별거 이후 혼란스러운 교토의 여름을 보내는 초등학생 ‘렌코’(타바타 도모코)의 나날을 그리는데요. 소녀는 앞으로의 나날이 이전과 같을 수 없음을 받아들이며 과거의 자신에게 작별을 고하죠. 〈이사〉에서 비추는 죽음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떠나보내야 하는 과거의 기억과 자아입니다.  

 

영화 〈여름정원〉 © 찬란

 

이듬해 제작된 〈여름정원〉은 앞선 두 영화에 비해 대중적인 형식으로 전개되는 작품인데요. 죽음에 대한 호기심으로 홀로 사는 괴짜 노인을 감시하기 시작한 세 소년의 여름방학을 그립니다. 소년들이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를 통해 일본 사회가 지닌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담아냈습니다. 

 

 

정제되지 않은 이미지의 힘

소마이 신지의 청춘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도, 어두운 주제를 포장하거나 돌려 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파고들어 성장의 어두운 면까지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세 영화의 주인공인 아이들은 학교와 가정, 도시와 시골이라는 경계를 오가며 불안정한 위치에 놓입니다. 이를 담아낸 소마이 신지의 연출은 길고 유려한 롱테이크와 카메라 이동으로 유명한데, 인물들의 흔들리는 심리를 고스란히 포착해 관객에게도 직접 체감하게 하죠. 

 

영화 〈태풍 클럽〉 © 엠엔엠인터내셔널

영화 〈이사〉 © 찬란

 

또 하나의 특징은 감정이 이미지로 곧바로 번역된다는 점입니다. 〈태풍 클럽〉에서는 인물의 내면에 불안이 몰려올 때 갑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지고, 소용돌이치듯 혼란스러운 십대들의 내면이 태풍으로 표현됐는데요. 〈이사〉와 〈여름정원〉에서도 주인공들이 겪는 감정의 변화에 따라 비가 내린다거나, 삼각형 모양의 식탁과 잡초처럼 심리를 상징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사물이 등장하는 등 비언어적인 장치들이 적극 활용되며 직관적인 공감을 이끌어냈습니다. 

 

영화 〈여름정원〉 © 찬란

영화 〈이사〉 © 찬란

 

감정과 이미지가 긴밀하게 맞닿아 있기에 소마이 신지의 영화는 다소 거칠지만 압도적인 힘을 지닙니다. 특히 죽음이나 상실 같은 주제를 미화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 마주하게 한다는 점이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데요. 지금까지 우리는 영화 속에서 정제되고 아름답게 다듬어진 성장사를 더 자주 보아왔기 때문에, 그 반대편에 놓인 어두움과 혼란까지도 숨기지 않는 소마이 신지의 영화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릅니다. 성장은 결코 아름다울 수만은 없는 법이니까요. 

 

 

영화 〈태풍 클럽〉 © 엠엔엠인터내셔널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소마이 신지의 영화가 오늘날 다시 공감을 얻는 이유는 세대를 넘어 관통하는 감정을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제대로 앓고 성장하지 않으면 사람은 온전히 어른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한데요. 소마이 신지는 〈태풍 클럽〉, 〈이사〉, 〈여름정원〉을 통해 어른이 되기 전 마지막으로 머무를 수 있는 짧은 피난처로서의 여름, 그 안에서의 불완전하고 아픈 시간을 정직하게 보여주며 현 세대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울림을 남깁니다.

 

 

✍🏻 손은 에디터

 

지금, 아래 관련 콘텐츠를 통해 소마이 신지의 여름 영화들을 확인해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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