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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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 1월 22일 스톡홀름에서 선박 중개업을 하던 카를 오스카 스트린드베리(Carl Oscar Strindberg)와 하녀 엘레오노라 울리카 노를링(Eleonora Ulrika Norling)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출생 자체가 부모의 부정한 관계에서 비롯된 데다 유년 시절 잦은 이사 때문에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한 시기를 보내야 했다. 스트린드베리와 연극의 인연은 1875년 핀란드계 스웨덴인으로서, 스물네 살 된 젊은 여배우이자 브란겔 남작의 아내인 시리 폰 에센(Siri von Essen)과의 만남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훗날 프랑스어로 집필된 스트린드베리의 소설 ≪어느 바보의 고백(Le Pladoyer d'un fou)≫의 모델이 되기도 했던 그녀는 2년 뒤 전남편인 남작을 버리고 스트린드베리의 아내가 됨으로써 정신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던 한 젊은 작가에게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심신의 안정을 제공했다. 그러나 결혼의 기쁨도 잠시,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이가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게다가 경제적 위기에 처한 스트린드베리가 파산을 선언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그런 가운데 1879년 11월에 발표한 자연주의 계열의 소설 ≪붉은 방(Roda rummet)≫이 평단의 주목을 끌면서 작가로서 그의 인생이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1889년 끊임없이 불화를 겪어 오던 결혼 생활이 파경에 이르고 아내 시리가 세 아이와 함께 핀란드로 떠나 버린 뒤, 그 역시 쓸쓸히 스웨덴으로 돌아오고 만다. 당시 그에겐 ‘스웨덴을 대표하는 현대적인 작가’라는 명성이 뒤따랐으나 정작 알코올중독에 빠진 그는 안정적인 일자리조차 구할 수 없었다. 1892년 다시 스웨덴을 떠나 베를린에 정착해 유럽 각지에서 모여든 다양한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지내던 그는 이듬해 자신보다 스물세 살이나 어린 오스트리아 출신 젊은 언론인 프리다 울(Frida Uhl)과 재혼했으나 두 사람은 딸 케르슈틴(Kerstin)을 남긴 채 3년 뒤 파리에서 헤어진다. 1906년 9월, 배우인 아우구스트 팔크에 의해 <미스 줄리>의 스웨덴 초연이 극적으로 성사된다. 1911년 크리스마스 시즌 내내 폐렴을 앓았으며, 결국 병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간신히 해를 넘기긴 했지만 그는 결국 1912년 5월 14일, 만 6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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