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모성이라는 징그러운 것. <로스트 도터>는 엘레나 페란테 소설‘나쁜 사랑’ 3부작에 포함되어 있는 <잃어버린 사랑>이 원작이다. 배우 매기 질렌할이 아닌 감독 매기 질렌할로서 연출과 각본을 도맡아 데뷔한 영화이기도 하다. 엘레나 페란테가 이 작품이 영화화 된다면 각본 작업은 여성 작가가 무조건 해야만 한다는 조건을 일찌감치 내걸어뒀었다. 그리고 매기 질렌할이 판권 계약을 위해 연락했을 때, 페란테가 수락함과 동시에 질렌할에게 건넨 말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남성들이 만든 새장에 갇혀 있었다. 여성 아티스트는 자율적이고, 그 어떤 장애물에게 가로막혀서는 안된다.” 페란테 안목은 정확했다. 페란테는 현실에서 침묵하던 일과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 단어와 상황들을 일기장에 옮겨 놓으며 오로지 글쓰기에 의지해왔다. 동시에 글을 쓰면서 스스로를 억제하거나 검열하는 순간 의미가 없어진다고 믿고 있다. <잃어버린 사랑>은 온갖 편견으로 둘러싸여 있는 ‘모성애’를 ‘이상한 엄마’ 레다를 통해 파괴하는 내용이다. 어머니의 모습은 무엇일까. 여성에게만 맡겨진 임신과 육아의 책임은 숭고한 축복일까. 행복한 여성의 역할은 남성의 아이를 건강히 낳고 그들을 보필하는 것일까. 페란테 원작과 영화를 모두 보며 나는 여성을 두고 어떤 규정도 내릴 수 없다는 사실에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아름다움과 숭고함으로 포장된 ‘모성’과 ‘어머니’의 이면에는 사람의 생살을 찢는 고통이 수반될 뿐 아니라, 이후 무기력하게 가라앉아 버리는 여성의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한 사람을 ‘모성이 강한 여자’로 보는 건 소름끼칠 정도로 징그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모성이란 단어를 듣고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은 엄마가 아닌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첫 손주였던 나를 가장 예뻐하고 아꼈다. 손주가 언제 자기네 집을 찾아오던 웃는 얼굴로 반겨주는 사람, 어린 시절 엄마보다 더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존재. 언제부터인가 할머니의 모습은 주변 소리도, 남의 말도 들리지 않고 점점 줄어든 몸집에 갇혀가는 것처럼 보였다.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희생, 그리고 손주 칭찬을 무수히 반복하던 사람은 어느새 자기 할 말만 되풀이하는 존재가 되었다. 일생의 결혼도, 자녀도, 다른 무엇도 우리 할머니의 어두움과 고통을 해소시켜주기는 커녕 알지도 못했다. 산후우울감도 드러낼 새 없이 자신의 세 자녀와 손주를 위해서 분투해온 할머니의 삶이 단순히 ‘무한하고 강인한 모성’으로써 이해되는 건 당사자를 더더욱 어둠으로 몰아내는 것과 다를 게 없다. 할머니는 자기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나가기 위한 (절박한) 시도로 글씨도 따로 배우고, 서예, 수영, 악기 연주 등을 무릎 아파 움직이기 어려울 때까지 꾸준히 배웠다. 그런데 그런 많은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우선으로 추구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자유였을까. 할머니 그리고 우리 엄마에게 결혼과 모성은 일종의 감금이자 구원인 듯 대를 넘어 꾸역꾸역 이어져왔다. 결국 그렇게 계속해서 종막까지 되풀이하며 절망으로 치달아가는 걸까. 자기 먹고 싶은 걸 자기 돈 주고도 못 먹는 건, 그렇게라도 한 두푼씩 아끼지 않으면 제 자식을 키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봤자 뭐가 나아지냐는 소리 들어도 ‘엄마’란 무거운 이름 아래 나 아닌 아이를 위해 살아야만 했다. '엄마, 나 배고프다'는 아이 말 한 마디에 가슴이 철렁하고,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고 몸도 무겁다. 먹는 문제 뿐 아니라 자식과의 거리두기를 평생 과제이자 풀 수 없는 문제로 떠안고 늘 전전긍긍 속이 문드러져도 어디가서 말 못하고 살았다. 나중에서야 미련했다고 한심했다고 자학의 진심을 내뱉지만, 억울하게도 자학적인 미련 없이는 내 새끼들을 키울 수가 없었다. 지금껏 하늘 아래 ‘성모’ 마리아는 단 한명이었지 않나. 모두가 그녀일 수 없고, 모두가 그녀여서도 안된다. 모성이란 건 원망스럽고, 괴롭고 징그러운 것이다. 칼날 같은 것이다. 아이가 생긴 뒤로부터 칼날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 늘 휘청였고, 자식이든 누구에게든 ‘나’가 아닌 ‘엄마’로만 불리고 원망당하고 질책당해도 입술을 깨물고 견딘다. 징글징글한 모성은 속 편한 ( )새끼들이나 멋 모르고 허투루 쓰는 말이겠거니.. 그래도 하나뿐인 내 새끼 키우다보니 그랬던 거겠거니.. 밥 못 먹여 아이가 말랐나, 아이 아픈 게 자기 탓인가 싶어 잠 못들던 지난 날들을 두고 습관처럼 미련을 떨게 된다. 그런 내가 왜 ‘나쁜 엄마’인거니? 모성이 ‘부족한 엄마’인거니? 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 올바르고 좋은 존재라고 느끼기 위해 ‘악’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 사고하려 한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서 악을 분리해내려는 시도는 사회를 계속해서 좋은 방향으로 유도해야 한다는 사회적 미덕이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투옥과 강제 노동, 망명 등을 겪었던 솔제니친은 이에 전면으로 반박하며 썼다. “사악한 존재들이 몰래 음험한 악행을 저지르는 거라면, 우린 그들을 따로 격리해 쳐부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선과 악의 구분선은 모든 인간이 가진 심장을 관통한다. 누구도 제 심장을 파괴할 생각은 갖지 못할 것이다.” 나는 ‘모성’이 마치 죄책감을 전부 씻겨 놓은 사회적 미덕처럼 받아들여지는 데 거부감이 든다. 모성 유무를 판단하는 자체가 위험한 발상처럼 느껴진다. 모성은 악도 아니지만, 무결점의 선도 분명히 아니다. 걸러지지 못한 후회, 걱정, 미안함 등 감정의 찌꺼기들과 함께 뒤엉켜 있는 인간의 수많은 감정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선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나에게서 자유를 빼앗을 만큼 막강한 권한도,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이지도 않은 별 거 아닌 선택에 지나지 않는다. 단순히 아이를 낳는 체험보다 한 인간이 다른 존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는 게 훨씬 더 어렵지 않나. 상당수 남자들이 요즘은 다르다고들 한다. 저들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온 폭력의 겉치레들이 많이 사라졌으니 그렇게 보일 법도 하다. 그러나 생활 속에 못처럼 박혀 있다 못해 녹까지 슬어버린 성차별은 여전히 견고하다. 한국사회는 모성을 이해하는 여러 방식 중 하나인 ‘희생’을 여전히 강요하고 교묘히 활용하고 있다. 이 영화는 단순히 모성 신화를 해체하는 과정에만 머물지 않는다. 관객들은, 그리고 이미 원작을 읽었던 나는 영화가 어떤 결말을 맺으리라 기대했을까.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 제 3권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성숙이란 결국 삶의 굴곡을 호들갑 떨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일상적인 삶과 이론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변화를 기다리며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정확하게 파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작자 페렌테와, 연출자 질렌할의 이야기 솜씨가 가져오는 섬뜩한 카타르시스가 마음 속에 오랫동안 남는다. 그리고 페렌테는 말한다. 위대한 남성 사상가들이 쉬는 동안 가지고 노는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애완동물보다는 더 나은 존재이고 싶었다고.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한다,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레베카 솔닛) 소녀들의 심리학(레이첼 시먼스), 알고 싶지 않은 것들(데버라 리비), 선량한 차별주의자(김지혜), 제가 왜 참아야 하죠?(박신영),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정희진), 미치지도 죽지도 않았다(김소연), 당신 엄마 맞아?(엘리슨 벡델), 혼자를 기르는 법(김정연)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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