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나르시스트의 지극한 슬픔 이끌어내는『단단斷斷함에 대하여』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백인덕 시인이 등단 만 20년을 기념하여 다섯 번째 시집 『단단斷斷함에 대하여』를 펴냈다.
백인덕 시집의 제목 '단단斷斷함에 대하여'는 역설적 의미를 내포한 것이다. 제목에서 한자를 염두에 두지 않고 읽는다면 ‘단단함’은 ‘굳다’ 혹은 ‘굳세다’로 의미화되며, 한자 ‘단斷’의 뜻을 의식하면 ‘끊는다’는 의미를 거듭 강조한 것으로 읽힌다. 그가 굳이 ‘끊을 단斷’의 한자를 병기했음에도 이 이중의 의미를 다 포함한 제목으로 해석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백인덕의 시집 는 역설적이게도 결코 단단해질 수 없는 마음과 끊어낼 수 없는 기억에 대한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목의 역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름 아닌 시인이 중년의 나이에 이르는 동안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단 한 번도 지워낼 수 없었던 유년의 기억과 상실, 그리고 순간마다 곧바로 어두운 과거로 새겨지는 자신의 현존, 이 모두에 대한 나르시스트의 지극한 슬픔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 슬픔은 일상에 가로놓여 있는 익숙한 현존성이면서 동시에 아무리 애를 써도 익숙해지지 않는,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존재의 사태이다. 이러한 존재의 사태를 시인은 “찬물 샤워를 하다 말고/ ‘중심’을 찾아본다./ 손끝으로 짚으니 안 아픈 데가 없다./ 내 몸은 온 구석구석 다 ‘중심’이었나?”('각설(覺雪) ― 입춘(立春)에')라고 진단한다. 모든 통점이 중심에 모아지지 않고 온몸으로 퍼져 있는 이 육체적 상황은 치유 지점을 찾을 수 없는 부서진 내면을 암시한다. 이 부서진 육체성은 끊어낼 수 없는 기억에 의한 손상을 함의한다. 끊어내야 할 것을 끊지 못할 때 그것은 그 자체로 상처와 고통이 되어 현재에 반복적으로 개입한다. 이때 존재는 단단함을 잃고 부서진다.
오래 전 잃어버린 어머니의 자리 되찾으려는 여행자의 길
백인덕의 시집에서 자주 발견되는 ‘엄마’에 대한 짙은 그리움은 이러한 시인의 존재론적 슬픔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굳이 프로이트를 참조하지 않더라도 ‘엄마’로 상징되는 모성적 품은 모든 결핍의 정점에 위치해 있는 상실감의 근원이며 영원히 불멸하는 동일자의 표상이다. 기억을 몰수하고 싶은 강한 욕구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엄마’는 아름답게 부활하곤 한다.
“엄마가 준 편지는 늘 푸르러서/ 열 수도, 찢을 수도 없어”('자화상·5'), “겨울에 지는 영산홍, 춘향이보다/ 맵시 났던 내 엄마는 남원 향교동에서 자랐다는데”('단단斷斷함에 대하여')와 같은 구절이 그것이다. 외팔이며, 외눈박이이며, 언청이며, 짝다리인 시적 자아에게 엄마는 그를 가장 온전한 존재로, 가장 사랑스러운 아이로 받아들이는 유일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마는 이미 과거의 시간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 슬픔을 “어디쯤에서 길을 잃은/ 것일까? ‘모란이 필 때까지’ 얼마나 더 가슴을 쳐야 하나?”('단단斷斷함에 대하여')라고 토해낸다. 슬픔으로 얼룩진 이 시집에서 거의 유일하게 ‘여기’를 긍정하는 시 한 편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또한 ‘모성적 품’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 안개만 피어나는 나라가 있다.
아니, 식탁 위에 언제나 여벌 숟가락이 놓인 나라가 있다.
아니, 밥상머리에 언제나 빈자리가 하나쯤인 나라가 있다.
아니, 모든 식사가 거룩하게 저희 시간을 봉헌하는 나라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나라의 위치를 모르지만……
여기 삶이란 껴안고, 어루만지고, 뒹굴고, 슬며시 서로의 목을
조르고, 기쁘게 죽여줄 수, 죽어줄 수도 있는 것들뿐.
아무도 슬픔 따위로 발목을 접질리지 않는다.
여기 계절이란 사랑하거나 쓸쓸해하는 단 둘뿐,
비가 오거나 햇볕이 쨍쨍함을 탓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알몸이거나 빈 몸일 뿐
아무도 교양과 위계位階의 옷차림을 신경 쓰지 않는다.
- '내가 모르는 나라 -L에게' 부분
함께 식사가 이루어지는 넉넉한 공간 그리고 껴안고, 어루만지고, 뒹구는 촉각의 공간은 여성적 세계와 밀착된 것들이다. 이 ‘나라’에선 “아무도 슬픔 따위로 발목을 접질리지 않는다.” “여기서는 알몸이거나 빈 몸일 뿐” 거짓으로 위장된 옷을 입지 않아도 된다. 앎으로 무장하지 않아도 되는, 알몸으로도 빈 몸으로도 부끄럽지 않은 ‘내가 모르는 나라’, 그것은 백인덕이 아주 오래 전에 잃어버린 어머니의 나라일지도 모른다. 그 나라를 시인은 ‘여기’로 호출한다. “꺼진 태양이 황금으로 들끓어 용솟음치는/ 가장 춥고 어두운 자리”('신파新派 - 만가조輓歌調')에서 슬픔 따위로 발목을 접질리지 않는 ‘여기’를 꿈꾸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