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억 시집

김억님 외 1명 · 시
1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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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에 김소월 스승이었던 안서 김억 시인의 창작 시집. 안서 김억은 우리 문학사상 최초로 본격적인 근대시를 발표한 시인이었다. 또한 그는 근대적인 시집을 처음 상재한 작가이며 한때 그의 손으로 이루어진 사화집의 수가 가장 많은 시인이기도 했다. 그가 엮어낸 역시집 <오뇌의 무도>는 1921년 3월에 상재되었다. <오뇌의 무도> 이후 그는 자작과 번역 시집을 합해 모두 20여 권에 이르는 사화집(1인 또는 다수 작가의 문장을 발췌해 엮은 책)을 보여 주었다. 물론 8·15 이후 본격적으로 활약이 시작된 시인 가운데는 이보다 더 많은 양의 사화집을 상재한 예도 있으나, 일제치하인 시인 가운데 김억처럼 많은 숫자의 사화집을 상재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그는 프랑스 상징파 시인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 해외시의 수입과 수용에도 독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 아울러 그는 시론을 중심으로 한 해외 문학이론의 수입, 소개에도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시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때 에스페란토의 보급과 교육에 힘쓴 바 있었는가 하면 김소월과 나도향을 필두로 몇 사람의 우수한 시인과 작가를 우리 문단에 소개하거나 그 문단활동을 도운 공로자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한국문학사에 끼친 김억의 발자취는 매우 뚜렷하며 다양하다. 김억이 가장 크게 비중을 둔 것은 번역이 아니라 여기에 소개한 창작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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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이 책을 읽는 분에게·9 《해파리의 노래》에서·13 피리|가을|눈|별낚으기|고적 눈|하품론|입|탄식 새빨간 피빛의 진달래꽃이 질 때|황포의 바다 참살구|죽음|언제 오셔요|삼월에도 삼짇날|별후 설은 희극|기도|탈춤|실제|사랑의 때 때|전원의 황혼|북방의 따님|나의 이상 《안서 시집》에서·51 황해의 첫 봄|여봅소 서관 아가씨|오다가다 비|물결|눈|별|지는 몸|산고개|곽산 노을|봄비 야화|거울|포도|무심|해당꽃|봄바람 송경서|어느 친우에게|춘향이와 이도령 꿈|좁은 잠자리|장미꽃 《민요시집》에서·80 명주딸기(1)|명주딸기(2)|물레|세월아 네월아 장산곧이|삼수갑산|새라 새봄|여름 바다|동로방천 넝쿨타령|사공의 아내|그래 옳소 누나님|삼팔선 서관 아가씨|꿈길|무심|갈매기|내 고향 《오뇌의 무도》에서·110 베르렌의 시·가을의 노래|흰달|작시법|도시에 나리는 비 구르몽의 시·흰 눈|낙엽 싸멘의 시·반주|가을 뽀드레르의 시·죽음의 즐거움|구적 이예츠 시·낙엽|꿈 모레쓰의 시·가을은 또다시 와서 시몬즈의 시·사랑과 잠 쁘렉크의 시·장미꽃은 병들었어라 왓손의 시·새 《기탄자리》에서·141 《꽃다발》에서·157 송별|시와 술|꿈|반달|고향을 돌아보며 가을은 깊어가고|봄바람|아기를 잃고 ■ 연 보·166

출판사 제공 책 소개

◎ 일제하에 김소월 스승이었던 안서 김억 시인의 창작 시집~ 안서 김억(1896~1950?)은 우리 문학사상 최초로 본격적인 근대시를 발표한 시인이었다. 또한 그는 근대적인 시집을 처음 상재한 작가이며 한때 그의 손으로 이루어진 사화집의 수가 가장 많은 시인이기도 했다. 그가 엮어낸 역시집 《오뇌懊惱의 무도舞蹈》는 1921년 3월에 상재되었다. 《오뇌의 무도》 이후 그는 자작自作과 번역 시집을 합해 모두 20여 권에 이르는 사화집詞華集(1인 또는 다수 작가의 문장을 발췌해 엮은 책)을 보여 주었다. 물론 8·15 이후 본격적으로 활약이 시작된 시인 가운데는 이보다 더 많은 양의 사화집을 상재한 예도 있으나, 일제치하인 시인 가운데 김억처럼 많은 숫자의 사화집을 상재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그는 프랑스 상징파 시인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 해외시의 수입과 수용에도 독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 아울러 그는 시론을 중심으로 한 해외 문학이론의 수입, 소개에도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시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때 에스페란토의 보급과 교육에 힘쓴 바 있었는가 하면 김소월金素月과 나도향羅稻香을 필두로 몇 사람의 우수한 시인과 작가를 우리 문단에 소개하거나 그 문단활동을 도운 공로자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한국문학사에 끼친 김억의 발자취는 매우 뚜렷하며 다양하다. 김억이 가장 크게 비중을 둔 것은 번역이 아니라 여기에 소개한 창작시라고 할 수 있다. | 이 책을 읽는 분에게 | 안서 김억(1896~1950?)은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으며 그곳 고향에서 10대 중반까지 살다가 오산학교에 진학하면서 거주지를 옮긴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우리 문학사상 최초로 본격적인 근대시를 발표한 시인이었다. 또한 그는 근대적인 시집을 처음 상재한 작가이며 한때 그의 손으로 이루어진 사화집의 수가 가장 많은 시인이기도 했다. 그가 엮어낸 역시집 《오뇌懊惱의 무도舞蹈》는 1921년 3월에 상재되었다. 또한 《오뇌의 무도》 이후 그는 자작自作과 번역 시집을 합해 모두 20여 권에 이르는 사화집詞華集(1인 또는 다수 작가의 문장을 발췌해 엮은 책)을 보여 주었다. 물론 8·15 이후 본격적으로 활약이 시작된 시인 가운데는 이보다 더 많은 양의 사화집을 상재한 예도 있으나, 일제치하인 시인 가운데 김억처럼 많은 숫자의 사화집을 상재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그는 프랑스 상징파 시인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 해외시의 수입과 수용에도 독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 아울러 그는 시론을 중심으로 한 해외 문학이론의 수입, 소개에도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시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때 에스페란토의 보급과 교육에 힘쓴 바 있었는가 하면 김소월金素月과 나도향羅稻香을 필두로 몇 사람의 우수한 시인과 작가를 우리 문단에 소개하거나 그 문단활동을 도운 공로자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한국문학사에 끼친 김억의 발자취는 매우 뚜렷하며 다양하다. 김억이 가장 크게 비중을 둔 것은 번역이 아니라 그의 창작시였다. 우선 그는 문단 진출과 함께 창작시로 그 성과를 문단 안팎에 묻고자 한 사람이다. 그가 해외시의 수입을 시도하고 그 밖에 상당수의 비평을 쓴 것 역시 창작시를 위한 방편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분야에서 그가 기울인 노력은 여느 경우와 크게 다른 것이었다. 김억이 최초에 발표한 작품은 1914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것은 과도기적인 것이었다. 그가 제 모습을 갖춘 작품을 내놓은 것이 1918년 11월 《태서문예신보》의 〈봄〉〈봄은 간다〉부터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한국 근대시를 최초로 본격화한 시인으로 주요한을 들어왔다. 그에 의해서 우리 시가 육당六堂·고주孤舟 등 신체시의 과도기적 허물을 벗고 본격적인 의미의 근대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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