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중세’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게 될까? 화려한 옷을 입은 왕족과 아름다운 귀부인, 그리고 기사들의 결투 등이 언뜻 생각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가 중세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화려한 왕후귀족의 옷자락 너머에는, 매일 땀 흘려 열심히 일하고 한 조각의 빵을 얻으면 그것으로 족했던 소박한 서민들이 있었다. 한 도시의 진정한 모습을 보려면 시장에 가보라는 말이 있듯이, 중세의 진면목을 보기 위해서는 중세를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을 만나보아야 한다.
서양 중세사에 정통한 저자 아베 긴야는 중세 사람들의 생활과 내면에 최대한 파고들어가 알기 쉽게 그들의 삶을 이야기한 전작 『중세유럽산책』(2005년, 한길사, 양억관 옮김)에 이어, 이번에 새로 번역 출판되는 『중세를 여행하는 사람들』과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통해 중세를 살았던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는지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중세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 오늘날에도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 곳곳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며 사회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고 있듯이, 중세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의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다. 『중세를 여행하는 사람들』에서는 농민과 목자에서 나루지기ㆍ목로주점 주인ㆍ제분업자ㆍ목욕탕 주인ㆍ집시ㆍ거지ㆍ편력하는 직공에 이르기까지, 중세를 살았던 사람들의 다양한 면면을 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가 중세를 이해하기 위해 주목한 것은 세계사 연표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권력자들의 역사가 아니라, 이제까지의 역사학에서 소외되어 있던 서민들, 그중에서도 가장 차별받는 부류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며, 그를 통해 독자들은 새로운 중세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중세를 살았던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 .『중세를 여행하는 사람들』
(1) 흥미로운 중세 서양 풍속사의 보고
어떤 사람이 강을 건너기 위해 나루터에 와서 세 시간 동안 나루지기를 불러도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근처의 주막에서 나루지기의 이름으로 와인을 외상으로 마실 수 있었다. 나루지기는 하천 교통의 실질적인 담당자로서 사람들을 건네주어야 하는 엄격한 의무가 지워져 있었던 것이다. 또 관리가 조세로 닭을 징수하기 위해 농가를 방문했을 때, 집안에 임신부가 있는 경우에는 닭의 머리만 잘라오고 몸뚱이는 집 안에 던져넣게 되어 있었다. 임신부에게 영양분을 섭취시키기 위해서다. 숲의 나무껍질을 벗긴 자는 그 나무에 묶어 배에서 창자를 꺼내어 나무껍질이 다시 살아날 때까지 나무에 말아둔다는 끔찍한 형벌도 있었다. 이는 숲의 나무가 농촌생활에 없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중세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중세를 살았던 사람들의 일상을 묘사하기 위해 이러한 중세 서양 풍속 자료를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현대의 우리들이 보기에는 그저 희한하고 재미있는 일화로 생각되지만, 이런 관습이 생겨난 배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거대한 힘을 가진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마을사람들 사이에 지켜야 할 규범을 특유의 유머 감각에 녹여냈던 중세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 중세를 바라보는 새로운 기준, 정착과 이동 사이의 다양한 삶의 모습
그런데 『중세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이렇듯 흥미로운 중세 유럽 사람들의 일상을 단순히 나열한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방대한 자료의 섭렵을 통한 그의 연구는 중세 유럽 사람들의 삶을 정착과 이동, 그리고 그것의 또 다른 모습인 편력과 여행으로 재정리하여 정착민의 삶과 이동하는 사람들의 삶의 대비를 통해 중세 사회의 다양한 문화사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아베 긴야는 이동과 정착이라는 관점에서 중세 유럽을 바라보고 있다. 중세는 흔히 이동이 거의 없이 정체되어 있는 사회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 유럽에 걸쳐 주요 도시 사이에는 가도와 하천을 이용한 교통망이 발달해 있었고 이동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했다. 먼 도시와 도시 사이를 떠도는 사람들과 대대로 한 마을에 정착해 평생을 보내는 사람들, 이동과 정착이라는 대조되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중세의 커다란 흐름을 만들어냈다.
농민ㆍ목욕탕 주인ㆍ제분업자ㆍ빵집 주인 등은 정착자의 세계에 속해 있었고, 집시와 거지ㆍ편력직공 등은 방랑자의 부류에 속했다. 그리고 이동과 정착의 사이의 접점을 이루는 존재로 나루지기ㆍ목로주점 주인ㆍ목자ㆍ푸줏간 주인 등이 있다. 한 곳에 정착하여 사는 사람들과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사는 사람들이 만들고 향유하는 일상은 전혀 다른 문화를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때문에 정착민과 방랑자의 생활은 사회적으로 대립하는 요인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이렇게 대비되는 두 가지 유형의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의 일상은 같은 시대를 살았으나 전혀 다른 형태의 삶을 살았던, 중세의 서민이라고 뭉뚱그려 불리던 당시 서민들의 다양한 삶을 생동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
(3) 방대하고 다양한 자료를 섭렵하다
이 책에서 인용한 자료는 페트라르카, 에라스무스 등 인문주의자의 기록과 『작센슈피겔』『슈바벤슈피겔』 등 중세의 법률서, 유럽 각지의 연대기와 마을의 판결록, J. 그림의 『독일 설화집』, 그밖에 마르크 블로크 등 역사가의 저작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있다. 특히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소개한 중세의 대표적인 익살 이야기책『틸 오일렌슈피겔』은 이동하며 살았던 중세 서민의 대표자격이라 할 수 있는 편력직공들의 생생한 웃음소리를 전해주는 귀중한 자료로 눈길을 끈다. 이 외에도 알브레히트 뒤러, 요스트 암만, 하우스부프 마이스터 등의 중세 판화가들의 작품을 포함하여, 풍부하게 삽입된 그림 자료들도 중세 사람들의 일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