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획 의도
종묘와 사직은 곧 국가다
영화나 드라마의 사극에는 “이 나라 종묘와 사직을 ……”, “종사의 안위가 ……” 등의 표현이 자주 나온다. 여기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은 ‘국가’를 뜻한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역사 유적지로 여겨질 뿐인 종묘와 사직이 전통시대, 특히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대명사였을 만큼 중요했던 것이다. 종묘와 사직은 조선의 흥망성쇠와 그 운명을 함께한 조선의 역사 그 자체이다.
종묘와 사직은 조선의 통치 이념이자 조선인의 정신세계였던 유교적 세계관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종묘에서는 역대 국왕과 왕비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유교의 핵심 원리인 효와 충을 실천했으며, 사직에서는 유교 문화의 경제적 기반인 농업과 관련된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또한 종묘와 사직의 제사 의례는 조선 왕실 문화의 정수를 담고 있어 조선시대의 예술과 문화의 중요한 일면을 보여준다. 중국에서 유래한 종묘·사직 제도를 실정에 맞게 창조적으로 변용한 조선의 종묘와 사직을 통해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종묘와 사직에 관한 모든 것을 담다
수많은 상징체계로 이루어진 종묘와 사직 제도는 복잡한 역사적 논쟁을 거쳐 변해왔으며 지금까지 소수 연구자들의 연구 대상으로 남아 있다. 종묘와 사직에 대한 본격적인 교양서인 이 책은 종묘와 사직의 탄생과 변모 과정, 종묘·사직 제사의 절차와 형식을 상세히 밝히고, 종묘와 사직에 숨어 있는 역사적 배경을 풀어낸다. 종묘에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거나 내치는 과정에는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조선의 왕들은 왕권 강화를 위해 사직의 규모와 제사 빈도를 늘리기도 했다. 심지어 종묘 신주와 사직 위판을 가지고 피난길에 올랐을 만큼 조선인들은 종묘와 사직을 중요하게 여겼다. 한국학의 중요한 주제들을 대중과 함께 나누기 위해 기획된 규장각 인문강좌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종묘와 사직―조선을 떠받친 두 기둥》에서 종묘와 사직의 모든 것을 알아보자.
규장각 인문강좌 시리즈 소개
규장각 인문강좌 시리즈는 선조들의 학문 전통을 계승하고 현 시대와 호흡하는 통합적 학문을 지향하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도서출판 책과함께의 공동 기획으로 탄생했다. 이 시리즈는 ‘인문학으로서의 한국학’을 표방하며, 규장각에 축적된 연구 성과와 소장 연구자들의 문제의식을 독자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출간 목록
1. 종묘와 사직―조선을 떠받친 두 기둥 | 강문식·이현진 지음
2. 소현세자 | 김남윤 지음
3. 의궤로 본 조선 국왕의 장례 | 김선경·김남윤·이현진 지음
4. 조선시대의 역서(曆書)―일상 속의 과학과 비과학 | 박권수 지음
5. 도상(圖象)으로 보는 옛 선비의 혼례 의식 | 박례경 지음
6. 규장각의 보물, 옛 지도 | 양보경 지음
2. 주요 내용
종묘와 사직의 탄생과 변천 과정
조선 태조 이성계는 1394년 한양 천도 후 궁궐 건립에 앞서 종묘와 사직의 건립부터 서둘렀다. 유교 국가를 표방한 조선은 이전 시기와는 달리 유교 경전의 규정과 예법에 따라 종묘와 사직 제도를 만들고 따랐다. 조선은 스스로를 제후국으로 규정하고, 이에 따라 태조를 포함한 다섯 국왕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오묘제(五廟制)를 채택하고 황제국의 예법인 하늘 제사와 땅 제사를 지내는 별도의 제단을 두지 않고 사직에서 이를 대신했다. 이로 인해 공식적인 국가 제사 체계상으로는 사직이 종묘보다 상위에 있었으나, 실제로는 왕권과 정통성의 강화를 위해 종묘가 중시되는 괴리가 나타났다.
종묘와 사직은 조선의 국운과 그 운명을 함께했다. 국가의 기틀을 다지던 시기(세종·성종대)에 종묘와 사직 제도의 기초가 마련되었고, 전란 후 사회 전반을 복구하는 시기(숙종대)에 종묘와 사직도 복구되고 보완되었다. 왕권이 강화되고 중흥되던 시기(영·정조대)에는 종묘와 사직 제도 역시 강화되었으며, 황제국을 표방했으나 국운이 쇠락해가던 대한제국기와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종묘와 사직의 위상도 기울어갔다.
종묘·사직 제사와 조선인의 정신세계
종묘와 사직 제사는 유교적 상징체계와 왕실 문화, 조선인의 정신세계를 담고 있다. 종묘 건축과 종묘 제례, 제례악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조선의 문화·예술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소중한 유산이다. 종묘 제사는 조상이 살아 있을 때 행하던 효를 사후에도 계속하는 행위이며, 사직 제사는 유교 국가 조선을 지탱하는 땅과 곡식의 신에게 감사를 표하는 행위이다. 국왕과 왕비가 죽은 후 치르는 장례 절차는 이들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매우 엄밀하고 고도로 상징적인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과정에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효에 대한 관념과 사후세계에 대한 의식이 잘 드러난다. 사직 제사는 현실 정치의 문제와 가뭄과 홍수 등의 자연재해를 연관시켜 생각하던 정치적 관념을 잘 보여주며, 조선의 국왕들은 이러한 관념을 중시하면서 때로는 이를 활용하기도 했다.
종묘와 사직에 숨은 역사
국왕과 왕비는 죽은 후 그 신주가 종묘에 모셔진다. 조선의 종묘는 오묘제를 기본으로 운영되었고, 그 수가 다하면 국왕의 공덕을 평가한 후 공덕이 크면 옮기지 않는 신주[불천지주(不遷之主)]가 되어 종묘 정전에 계속 머무르거나 그렇지 않으면 별묘인 영녕전으로 옮겨졌다. 왕에 대한 사후 평가는 국왕의 신주뿐만 아니라 왕비와 공신의 신주에도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 변고에 의해 이들의 신주가 종묘에서 내쳐지기도 하고, 상당한 시간 동안 수많은 논쟁을 거친 후에야 복위되어 종묘에 다시 돌아오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동생인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정종,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중종반정 이전 중종의 첫 번째 부인인 단경왕후, 뒤늦게 공신으로 선정된 이이의 사례에서 왕에 대한 역사적 평가나 당시의 권력관계를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