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뜯겨나간 창 너머로 타워크레인이 괴물처럼 다가오고 있다. 운명을 다 한 집엔 혼령들이 모여 굿을 하고 있다. 나도 불청객이 되어 그들을 따라 춤을 춘다." - 『기억흔적』 윤길중, 작가노트 중
폐허의 모습은 빛 바랜 사진의 흔적과 닮아있다. 오래된 사진을 보는 것이 타인의 침잠된 기억을 회상하는 것이라면 주인 없는 버려진 장소에 남겨진 흔적들은 어떤 이의 기억을 들추는 매개물이 된다. 여기 윤길중의『기억흔적』은 그런 타인의 흔적에서 자신의 기억과 조우하는 일련의 과정을 사진으로 엮은 첫 작품집이다.
재개발로 인해 사람들은 떠나가고 이제 폐가만 남은 서울의 북아현동. 윤길중은 높은 언덕배기를 따라 미로처럼 줄지은 공간들을 배회하며 응어리졌던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삭여낸다. 그리고 그에게 폐기처분 되어 버린 채 남은 집기들은 과거의 유물이 되고, 곰팡이 핀 방의 창 바깥 너머는 ‘과거와 현재의 자신’을 매개 짓는 열린 창이 된다.
『기억흔적』은 그의 가장 사적인 경험과 기억을 있는 그대로 닮고자 하였다. 사진 한 장 한 장을 넘겨가는 독자는 폐허를 배회하는 그의 시선을 쫓으며, 책 속에 끼워 넣은 엽서 크기의 사진들에서 북아현동의 버려진 집기들을 발견하는 듯한 경험을 갖는다. 죽음 위에 피어나는 생명의 꽃처럼 공간 곳곳에 핀 곰팡이를 배경으로 찍은 오브제 사진은 그의 폐허 사진들과 중첩되어 구성되었으며, 특히 보드를 덧대어 단면을 노출한 책의 외형은 켜켜이 시간이 입혀진 낡은 사진첩을 연상 시키도록 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