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네까?
국제공항 입국 심사대 앞에 설 때면 괜히 긴장하게 된다. 서툰 영어로 쓴 입국 신고서에 혹시라도 잘못된 것은 없는지 심사관이 갑자기 질문을 하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1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간다. 출국 경험이 처음도 아니고 별것 아닌 여행길이었지만 말이다. 여기, 17년 내내 입국 심사대 앞을 살고 있는 이가 있다. 서울 생활 몇 년만 해도 고향 사투리는 약간의 억양만 남는 게 보통일진대, 대한민국에 온 지 17년이나 지난 봄희는 ‘북한 사투리’를 제대로 쓰지 않는다고 타박받고 진짜 탈북민인지 의심받는다. 진짜 탈북민임을 증명하기 위해 이미 어색해져 버린 “안녕하십네까?”를 연습해야 하는 아이러니. 아마 17년 전에는 ‘진짜’ 북한 사람 같은 말투 때문에 대한민국에 정착하려는 게 ‘진짜’인지 의심을 받았을 것이고, 어떻게든 빠르게 ‘남한 사투리’를 익히려 애썼을 게다.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시간만큼 둥글둥글 깎이고 변해왔을 봄희의 말투는 어떨 때는 북한 사람 같다고, 어떨 때는 북한 사람 같지 않다고 의심하는 증거가 된다. 이쯤 되면 안다. 문제는 봄희의 말투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20년 가까이 살면서 가정도 꾸리고 직업도 갖고 문자 그대로 평범하게 살고 있음에도, 단지 탈북민이라는 이유로 말투를 꼬투리 삼아 매 순간 의심하고 자격을 심사하는 이 나라가 이상한 거지. 어디 봄희뿐이랴. 함께 살고 있으나 끝내 속하지 못한 이들, 주류 규범 바깥의 존재들은 하루 24시간 입국 심사대 앞에 선 것처럼 구구절절 설명하고 증명해야 한다. 봄희의 말투가 의심의 꼬투리가 되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성별이, 계급이, 인종이, 장애가, 성 정체성이 꼬투리가 된다. 이 사회에 속하려면 너를 증명하라는 암묵적 강요와 합리적이지도 일관적이지도 않은 심사 기준이 이들의 현재를 휘저어 놓는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증명하지 않아도 지금의 모습 그대로 존재해도 괜찮은 삶. 이것은 비단 봄희만의 바람이 아닐 것이다. (마법사) [제13회 디아스포라영화제] [제18회 여성인권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