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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경

천수경

5 months ago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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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에게 말 걸기

책 ・ 2025

아빠가 최근에 이직을 하는 과정에서 사주를 제출했다고 얘기했다. 한국 땅에서 무언가를 짓는 일엔 사주가 으레 중요하다며 그 일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기색이었다. 다행히도 아빠의 사주는 ’합격‘을 받았고. 이때다 싶어 나는 아빠에게 차별금지법이 어서 통과 되어야 사주로 차별받는 것도 불법화 된다고, 아빠는 사실 차별 당한건데 본인이 그걸 모르는 거라고 했다. 아빠는 내가 또 ‘어쩔 수 없는 일’에 관해서 화를 낸다며 건성으로 알겠다고 했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한테 지쳐서 다 알겠다고 하는 느낌. 그는 적합한 사주를 소중한 자산 마냥 뿌듯해했고, 사주의 부적합 판정으로 억대 연봉을 놓쳤더라도 차별 받았다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진심으로 자신의 불합격이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엄마는 귀여운 AI 고양이를 보고 있었다. 옆에서 참지 못하고 나는 그걸 역겹다고 했다. 엄마는 깊은 한숨을 쉬며 ”역겹다니... 수경아...“ 라고 했다. 내가 불필요하게 부정적인 기운을 내뿜는 것이 내 생리통에도 안 좋을 거라고 조언했다. 결혼하고 나간 동생의 방에서 지내는 조카(23세, 남)의 존재는 함께 사는 우리 엄마에게 큰 활력이다. 사실상 엄마의 얘기에 가장 열심히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기 때문인데. 둘이 외식이라도 하고 들어오면 나는 언제나 궁금해한다. “네가 우리 엄마랑 할 얘기가 있어?” 조카는 할 얘기가 엄청 많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나랑 잘 맞는 애가 어떻게 김문수를 대통령으로 뽑는 사람과 할 얘기가 많은지 의문이다. 엄마가 극우 유튜브를 얼마나 많이 보는지 조카에게 말해줬더니 그 애는 깜짝 놀랐다. 내가 늘상 지적하는 우리 엄마의 젠더 감수성이 극우 유튜브와 관련 있는지 물어왔다. 긴 설명을 하기엔 복잡해서 완전히 직결되는 건 아니라고, 페미니스트인 극우도 있다고 말해줬다. 어느 주말, 아빠는 점심을 친구와 먹겠다고 말했다. 두 시간 후, 점심이 다가온 시간에 아빠는 친구에게 전화해서 “연말인데 뭐 하냐? 점심이나 먹자.” 라고 했다. 그 모습을 본 조카는 빵 터졌다. 우리 아빠의 무계획성이 나랑 똑같다고 했다. 나도 언제나 저녁을 남자친구와 먹을지 말지 모르겠다고, 저녁 여섯시쯤 되어야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하곤 하는 것이다. 나는 조카를 부러워한다. 그의 부모는 지성을 추구하는 어른들이다. 내가 어릴 때부터 그 커플은 내 눈에 똑똑하고 멋진 어른들이었다. 그런데 조카는 자기 부모와 말이 안 통한다고, 오로지 그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해서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로 갔단다. 그런 조카가 우리 부모님과 기나긴 식사를 잘만 한다. 무언가 재미있는 얘기가 오가는 것도 같은데 도저히 끼고 싶지 않아서 나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방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내가 SPC를 불매하지 않는 사람에게 실망했다고 하자 엄마는 그 사람이 바빠서 불매 사유를 모를 수도 있는 것인데 뭘 실망까지 하냐며 나를 편협한 사람으로 몰아갔다. 조카는 깔깔 웃으며 내 삶이 힘들 것 같다고 했다. 조카는 SPC를 불매하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도 했다. 그러자 엄마는 자기도 당연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런데 피곤한 날엔 집 앞 파리바게트에서 식빵을 산다고, 그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조카는 끄덕였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빠의 말에 따르면 우리 집에서 제일 편협한 사람은 나다. 타인에게 옳고 그름을 강요하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