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천수경

천수경

4 years ago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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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히만 아일랜드

영화 ・ 2021

왕가위가 첫사랑과 결혼했다는 얘기를 듣고 진심으로 배신감을 느꼈다. 못다한 사랑이 뼛속에 너무 깊이 고여서 그런 영화들을 만드는 줄 알았는데. 뭐라고? 그러니까 매일 안부를 묻던 사람과 서로 죽었는지도 모르고 살기로 하는 그런 종말을 겪은 적 없다는 거네? 열아홉 때부터 사귄 사람이랑 10년 연애하고 결혼한 사람이 그런 이야기들로 나를 위로한 거였다니.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그는 작은 파열에도 영원의 이별을 상상하는 사람이라 그런 영화들을 만들 수 있었던 걸까. 이 영화의 크리스는 창작자이니만큼 상상하는 근육이 극도로 발달했을 터. 본인이 현실에서 넘지 않을 선을 시나리오 속에선 훌훌 넘고, 또 현실에서의 추억을 가상의 인물들에게 어울리는 형태로 바꾸어 이야기 속에 박제할 것이다. 그녀의 경험이 영화 속에 어느 정도로 녹아들었는지 유추해보는 일 자체가 음침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바로 그 상상을 위해 이 영화가 존재한다. 크리스가 처음 만난 사람과 즐거운 반나절을 보내면서 머릿속으로는 어디까지 다녀온 것인지 가늠하도록, 관음을 허락하는 영화다. 크리스의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격정적인 로맨스는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휘몰아친다. 미래를 그릴 수 없는 관계에 웃고 또 눈물짓는 주인공은 많은 이들을 위로했을 것이다. 정작 그 모든 반짝임과 허망함을 화려하게 붓칠한 크리스의 현실은 평평해 보인다. 그럭저럭 다정한 남편과의 평화로운 바캉스가 전부다. 영화는 감칠맛 나게 영화 속 영화를 보여주다가 어느새 크리스를 평화로운 바캉스에서 어느 밤으로 훌쩍 데려다 놓는다. 영화 촬영이 한창 진행되는 밤이다. 크리스는 한 남자에게 원하는 걸 말하지 못한 눈치인데, 그녀가 뭘 원했는지는 우리가 각자 채워야 하는 여백이다. 크리스의 마음속에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정말 알 수 없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 일들이 영화가 된 거였을까. 그녀가 말로 뱉지 못한 모든 것들이, 마음속에서만 일어난 조용한 상상의 집합이, 영화라는 평행 세계에선 실존한 걸까. 인간은 동시에 두 군데에 존재할 수가 없어서 한 가지 선택만을 하면서 산다. 하지 못한 선택과 맴도는 미련을 곱씹으면서 자신의 선택을 두둔하거나, 영원히 못 미더워하거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거나. 이야기꾼들은 자신이 하지 않은 선택에 팔다리를 달아주고 쭉 달려나가게 만듦으로써 바로 그 선택을 살아가는 이들과 맞닿는다. 나는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다. 크리스와는 영 다른 처지다. 하지만 크리스가 만든 영화 속 주인공과 완전히 합일된 지경으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는 애랑 즐겁게 놀다가 현타 와서 우는 거 너무 내 얘기였거든. 결국 궁금해지는 건, 크리스의 생을 설계한 미아 한센 러브는 도대체 어떤 사랑을 살고 있는지다. 나는 이 영화를 본 감독의 지인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가 제일 궁금하다. 감독이랑 해파리를 던지면서 논 사람, 혹은 해파리를 던지면서 놀자고 했는데 거절당했던 사람은, 이 영화의 그 장면을 보면서 웃었을지 울었을지. 정말 너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