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지금부터 우리는 고장난 온기
서로를 살리는 신비한 저주”
온기를 나누어주는 메신저로서,
슬픔을 나누어 지는 포터(porter)로서
문학동네시인선의 248번째 시집으로 박상수 시인의 『메신저 백』을 펴낸다. 올해로 데뷔 27년 차 시인이 된 그의 다섯번째 시집 『메신저 백』은 『숙녀의 기분』(시인선 41번), 『오늘 같이 있어』(시인선 109번) 이후 문학동네시인선 시리즈 내에서 세번째로 선보이는 뜻깊은 책이기도 하다. 시인이자 평론가, 또 교수자로서 언제나 동시대와 호흡하며 젊은 시를 쓰기에 그의 시력에 깜짝 놀랄 수도 있겠다. 젊은 화자의 목소리, 아기자기한 오브제와 시어 탓에 더욱 그리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는 그의 시선이 항상 약자와 소수자 그리고 부당한 삶 속에서도 결코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도록 북돋우는 작고도 반짝이는 것들에 가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시집의 제목 ‘메신저 백’ 역시 다채롭게 다가온다. 첫째,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나’, 과거의 슬픔과 미래의 가능성을 모두 품은 몸으로서의 ‘나’가 바로 ‘메신저 백’이라는 사실. 둘째, 아직 시인에겐 희망과 온기가 있어 이를 나누고 전하겠다는 따스한 결기의 결정체. 마지막으로 그 모든 이야기-메시지를 담은 이 시집 자체를 지시하는 듯도 하다.
내겐 부리밖에 남지 않았지만 나의 부리로 네 깃털을 가다듬고 윤기를 내어줄게, 그럴 수 없을 거라고 믿고 싶어도 어떤 일은 그냥 일어나기도 하는 거니까, 그 일들이 너를 미워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니까, 이제 너를 아프게 하는 것으로 세상을 벌주려 하지 말아
_「어떤 일은 그냥 일어나기도 하지」 부분
『메신저 백』은 총 7부 구성 45편의 시와 1편의 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인이 행과 연을 갈며 호흡을 고르고 리듬감을 만들듯, 박상수의 이번 시집은 ‘부’의 차원에서도 이를 구현한다. 세번째 시집 『오늘 같이 있어』에서는 희극과 비극이 오가는 ‘단짠단짠’의 구성을 선보였다면, 『메신저 백』의 끊어지는 구성은 긴장을 풀고 숨을 고르는 호흡법, 쉼표를 찍는 행위에 가깝다. 우리는 고통스러워서, 때로는 너무 아름다워서 잠시 쉬어갈 수밖에 없다.
1부의 제목 ‘깊이 없는 세계의 빈티지 과일 머신’은 시인의 시그니처인 ‘후르츠 캔디 버스’를 단번에 떠올리게 한다. 이어 이 생기 있던 오브제가 이제 ‘빈티지’가 된 연유와 그 세월을 가늠하게도 된다. “난 슬픈 게 아니야 난 그냥 슬픈 사람이 절대 아니야, 외치고 있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백색소음」)는 나날 속에서, “언제나 조금 부족한, 살아 있다는 기분”(「무호흡」)으로, “눈을 감고 취한 것처럼 지금을 잊고, 생각을 잊고, 내가 나였던 것을 잊”(「코티지」)는 화자. 하지만 “애착 소파를 기어코 만들어서 시간을 우리 곁으로 데려”오고, “워터멜론향 각성 캔디를 나눠 먹으면서”(「서촌 일요 독서회」), “다했음에도 더 하고 싶은 어떤 마음”(「다하지 못한 마음」)을 서로 나누는 모습을 발견할 때면 『후르츠 캔디 버스』 속 소년 소녀들, 이 미성년의 미래가 『메신저 백』에 담겨 있는 듯도 느껴진다.
부서지는 빛에 대해 생각하면 미래에 도착한 것만 같다 미래에 도착해서 나는 과거를 지켜본다 이미 도착해서 과거의 내가 걸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무미건조하게, 어떤 기대도 희망도 없이, 그러면 실패한 기분이 사라질까
_「증명할 수 없는 사람」 부분
시인의 육성을 빌리자면 『메신저 백』은 “삶의 가장 힘들었던 5~6년 동안의 시기를 떠올리며 쓴 작품들로 (…) 말 그대로 존재가 그냥 희미하게 없어지는 것 같은 시절과 그걸 겨우 견뎠던 몸”을 망라한 시집이다. 그렇기에 절망과 실망, 그리고 그것의 반복이 그려져 있기도 하지만 이는 결코 놓지 않는 희망에 연유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를 수 없다 “이 닳아버린 진심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지”(「고양이 방문자 센터」) 되뇌는 화자의 끝없는 분투는 자기 부정과 비하를 필연적으로 불러들이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타인을 비난하는 대신 타인의 잘못도, 시대의 불합리도, 자신의 치부도 모두 껴안는 시적 순교에 가깝다. 나아가 박상수의 화자가 부단히 눈치를 보고, 기민하게 제 몫을 해내려 들며, 때로는 위악을 떨고, 그럼에도 누구보다 동병상련의 태도를 체득한 것은 ‘소수자의 생존술’과도 긴밀히 맞닿아 있다.
진짜 나쁜 년
그래도 널 사랑해
피식, 웃으며 너에게 손을 흔들자 네가 창가에 턱을 괸 채로 나를 바라보았지 그렇게 보지 마, 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너에게 줄 수 있는 게 없어…… 그때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했지
누가 보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사람처럼.
_「다른 생각」 부분
그의 시세계 안에서 텍스트로서의 문학은 ‘저자’가 일방적으로 ‘창조’하는 결과가 아니라 공동 작업자로서 독자의 읽기가 상호적으로 기입되는 살아 있는 물질임을, 그것이 지닌 젠더/섹슈얼리티와 퀴어함 또한 복수의 자기-타자들과 함께 모색할 수 있는 회로적 구성물임을 선포한다.
_전승민, ‘해설’에서
싹싹한 화자들의 번아웃은 6부의 제목 ‘너와 걸었던 차분한 나날들, 네가 여기 있다는 차분한 믿음들’처럼 회한의 정조와 더불어, 성숙한 목소리를 자아내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언제든 밀려날 수 있는 한줌의 사람”(「한줌의 사람」)이 “다하였어요 모든 것을,/ 더할 수 없을 만큼의 나를 비로소 다하여보았어요”(「대저택, 울타리, 화원」)라며 부르는 노래 속에는 어엿하거나 즉각적인 효과를 내는 힘을 선물하진 않지만, “고장난 온기”가 듬뿍 담겨 있어 “서로를 살리는 신비한 저주” (「끝말잇기」)가 된다.
평론가 전승민의 표현처럼 『메신저 백』은 “드디어 임계점을 마주한 자의 기록”이자 “낙담과 실망, 좌절과 슬픔 안에서 속절없이 헤매는 자”의 “부정성의 총체가 내파되는 단 하나의 좌표”(‘해설’에서)이다. 성장과 반성장, 굴욕과 훼손, 희극과 비극, 소외와 탈진을 모두 겪은 화자가 “좋아해요, 라는 말이 떨리면서 흘러나오는 순간을 더할 수 없는 기분으로 좋아해요”(「다하지 못한 마음」)라고 다시금 말할 때의 심정을 우리는 감히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나 그가 앞으로도 시에 대한 사랑을, 타인에 대한 염려를, 삶에 대한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으리라는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지쳐 포기하고 싶은 순간, 그는 다정한 눈빛으로 손을 맞잡으며 이렇게 말해올 것이다. “그때도 네가 같이 있었지? 그랬지 그때도 내가 같이 있었지 그랬어, 너였구나”(같은 시).
그때는 내가 이렇게 겨우 살아 있었어,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나는 과거를 불러와 현재에 되살렸고 현재를 기록하여 미래에 남기고자 하였다. 미미하고 소소한, 또다른 ‘우리’를 떠올리며. 그런 우리들에게도 나의 메시지가 가닿기를 바라는 이 완전한 마음으로. 먼저 떠난 사람이 남긴 문장을 되뇌어본다. 그리고 입술 밖 너에게 건넨다. “물결의 신비, 우리 더 좋은 곳으로 가자.”
_산문 「미미하고 소소한, 그래도 우리」에서
◎ 박상수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
1. 4년 만에 선보이는 5번째 시집이에요. 그간 시인으로서, 평론가로서, 교수로서 또 사인으로서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새 시집을 기다려왔을 독자에게 인사 한마디도 부탁드릴게요.
→ 전쟁의 참상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죽어가는 시기에 시집을 낸다니, 한없이 슬프고 미안하고 부끄럽고 그렇습니다. 지금 이곳의 현실을 같이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에게 그래도 어떤 부끄러움을 견디며 살고 계시냐는 안부를 건넬 수 있어 오직 그것이 고마울 뿐입니다. 말씀하신 각각의 역할은 하나도 제대로 하는 게 없이 사는 것 같아요. 안녕하세요, 시 쓰는 박상수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2. 이번 시집의 제목은 지난 작품집과는 조금 성격이 다른 것 같아요. 『후르츠 캔디 버스』 『숙녀의 기분』 『오늘 같이 있어』 『너를 혼잣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