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

고상만
3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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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추천사 1-고상만 선생, 참으로 고맙소(정연주, 전 KBS 사장) 추천사 2-검은 구름 흩어지면 밝은 달 절로 드러난다(명진, 전 봉은사 주지) 프롤로그-나는 왜 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나 37년 만에 나타난 장준하의 엄숙한 외침 장준하 관련 기록 2074년까지 비공개? 내가 책을 쓴 이유! 1장 독립군 장준하 대 친일파 박정희 장준하를 처음 만나다 /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 “박정희는……” 장준하,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 / 연인을 위해 일본군 징집을 선택한 장준하 일본군 탈출 후 임시정부를 향한 6,000리 대장정 / 장준하, 『사상계』를 통해 언론인으로 서다 장준하와 박정희의 격돌은 운명 / 장준하의 두 번째 구속, 정치의 길로 접어들다 돈 없는 장준하의 선거운동, ‘사탕과 손수건’의 비밀 / 편치 않은 정치인의 길 박정희의 영구집권 계획을 폭로한 김대중 /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던 박정희, 그가 지킨 약속은…… 민주주의와 인권 압살, ‘유신시대’의 개막 / 긴급조치 남발, ‘거대한 감옥’으로 변한 대한민국 장준하를 석방하라, 미국 정부의 압력 2장 장준하 사건 조사관이 되다 김대중 대통령의 인권 관련 업적 세 가지 / ‘교수의 양심’ 최종길 교수가 맞이한 참담한 최후 1973년 10월 19일, 중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 의문사위원회가 규명한 사건들 1986년 서울대 김성수, 19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사건 의문사 첫 번째 담당 사건, ‘남현진 이병 의문사’ / 구타 진술을 은폐한 군 헌병대 수사 헌병대 수사관도 믿지 않는 ‘구타 없는 군대’ / 밝혀진 남현진 이병 의문사의 진실 당신이 맡을 사건은 따로 있소 / 장준하 의문사 사건 조사관이 되다 3장 장준하 사건은 왜 의문사인가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를 본 사람들 / 장준하 사건에 얽힌 ‘오해와 진실’ 구당 김남수의 장준하 치료설? / 김남수는 왜 장준하를 치료했다고 주장했을까? 장준하 사건 조사팀이 세운 세 가지 원칙 / 답은 늘 쉬운 곳에 있었다 폐기된 ‘88년 경찰 재조사’ 기록을 찾아라! / 극적으로 찾아낸 장준하 의문사 관련 기록들 사라진 ‘1시간 7분’ 증언, 녹음테이프를 찾다 / 국가와 민간 전문가를 동원한 음성 복원 싸움 사건 후 3일간 행적이 묘연한 목격자? / 김용환, 그는 왜 사실이 아닌 신원보증을 말하나 김용환, 그는 누구인가 / 직업 없이 무슨 돈으로 살았을까 1971년 이후 사라진 김용환이 다시 장준하에게 나타나다 4장 목격자 김용환, 그에게 묻다 김용환은 정말 목격자인가? / 장준하는 정말 군인 두 명을 만났을까 장준하의 약사봉 산행은 과연 사실일까 / 최초 공개, 1975년 8월 20일 김용환은 뭐라고 말했나 장준하는 나무를 잡은 사실이 없다? 목격자의 ‘반란’ / 사건 직후 사라진 목격자의 미스터리 사라진 그가 다시 사건 현장에 나타났다? / 장준하는 약사봉을 등반하지 않았다 장준하는 정말 벼랑에서 추락했나? / 사라진 보안사령관 직보 문서 유족에게 걸려온 괴전화의 정체를 추적하다 / 중앙정보부 ‘중요 상황 보고’에 적힌 괴전화의 주인공 괴전화를 했다는 김용환의 분노, “모두 조작이다” / 괴전화를 부정한 이유, ‘새로운 늪’ 김용환은 중정의 ‘사설 정보원’이다? / 김용환의 ‘특수인물 존안 카드’- ‘박정희’의 9년 3개월 비서실장, 김정렴을 만나다 / “장준하가 누구지?”, 생각지도 못한 김정렴의 반격 뜬금없는 김정렴의 발언, ‘긴급조치 10호’와 김재규의 비밀 김정렴이 들려준 ‘박근혜와 구국선교단’, 그리고 진실 / ‘무소유’ 법정 스님이 말하는 장준하의 거사 장준하의 거사를 알고 있었던 중정 / 1975년 7월 29일 김대중과 장준하는 왜 만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전해준 ‘조언’ / 2004년 3월, 의문사위원회는 왜 시국성명을 발표했나? 감사원으로부터 받은 시국선언 배후 조사 / ‘개구리 소년’ 법의학자, 마지막 희망을 쏘다 에필로그-장준하 사건은 왜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정되었나 장준하 사건 재조사를 위해 선택한 ‘진상규명 불능’ 7인 위원의 표결, 그 결과는…… 장준하 사건 ‘인정’ 의견, 한상범 위원장 ‘소수에 또 소수 의견’ 이 세상 또 다른 두 사람 위해 진실 가려야

출판사 제공 책 소개

2074년까지 장준하 관련 자료를 비공개하기로 결정한 정부에 맞서 담당 조사관이 최초로 밝히는 사건의 전말과 진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실족 추락사했다고 알려진 장준하 선생의 죽음을 둘러싸고 그간 숱한 의혹과 소문이 무성했지만 한 번도 사건의 전모가 제대로 밝혀진 적은 없었다. 그러던 차에 37년이 지난 2012년 8월 1일, 장준하 선생의 유골이 세상 빛을 보게 되면서 ‘진상규명 불능’으로 처리된 이 사건이 순식간에 언론과 세인의 높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에 이 사건의 전말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담당 조사관 고상만이 지금까지 알려진 장준하 의문사 사건의 모든 것을 국민에게 낱낱이 밝히고,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과 여전히 오해에 가려져 있는 부분들을 하나하나 짚어줌으로써 이 사건의 재조사가 시급함을 역설한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부분은 물론 최초로 공개하는 자료들, 유일한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을 비롯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 법정 스님, 9년 3개월이나 박정희의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 등 당대 주요 인물들과 나눈 상세한 대화가 실려 있어 이 사건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 유신잔당에게 37년 만에 사자후를 토해내는 장준하 선생의 유골, “나는 이렇게 타살되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장준하 선생의 억울한 죽음의 실체가 분명하게 다가왔다. 올 가을 유신 40주년을 맞고 보니, 독재자 박정희와 그의 삶, 그 시대에 대한 평가가 더욱 엄중해야 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 뜻에서 독재자 박정희와 거의 모든 점에서 대척점에 있었던 장준하 선생의 삶과 죽음은 새삼 우리에게 절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런 상황이니, 고상만 선생이 지금 뜨겁게 외치는 진실의 목소리가 너무나 귀하게 들린다.” (정연주, 전 KBS 사장) “한 사람의 억울한 사람도 만들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는. 그러자면 불행했던 시대의 문제들은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한다. 진실을 밝히고 책임질 것은 책임진 후 미래로 가자고 해야지, 미래를 위해 과거사를 역사에 맡기자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는 껄끄러운 과거사 문제만 나오면 역사에 맡기자고 한다. 역사는 그런 문제들을 맡아주는 전당포가 아니다. 검은 구름 흩어지면 달이 저절로 드러나듯 진실을 드러내면 그것이 바로 정의가 되고, 올바름이 되고, 이 세상의 희망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시작을 이 책이 해주리라 믿는다.” (명진, 단지불회 회주, 전 봉은사 주지) “선생의 두개골이 신경외과 전문의인 내게 외치고 있는 듯하다. 타살이라고!” (새누리당 정의화 의원) “(장준하 선생 유골을 볼 때) 숨이 딱 막혔습니다. 법의학자들이 의식이 없는 상태로 떨어졌다고 공통된 의견을 냈습니다. 추락하기 이전에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더 이상 억측이 없기 위해 (수사권을 가진)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홍구, 역사학자) “영국에 셜록 홈스가 있다면 한국엔 고상만이 있다.” (김어준, <나는 꼼수다> 진행자) ▶ 장준하, 그는 누구인가 1918년 평북 의주에서 태어난 장준하 선생은 1944년 1월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평양 제42부대를 거쳐 중국 서주 쓰카다 부대로 전속되었으나 7월에 부대를 탈출한 뒤 무려 6,000리를 걸어 광복군에 합류한 대표적인 민족주의자 중 한 분이다. 이후 OSS(미국 전략첩보대) 1기 훈련을 마치고 이범석 장군 휘하에서 국내 진입 훈련을 하던 중, 단 5일 차이로 해방을 맞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5년 11월에 임정요인들과 귀국하여 김구 주석의 비서, 비상국민회의 서기 등을 역임했다. 1953년 4월 한국 지성사에 한 획을 그은 『사상계』를 창간하여 대학생을 비롯한 지식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자유당 정권, 박정희 정권을 줄기차게 비판하면서 시대의 양심과 등불의 역할을 자처했다. 이 과정에서 스물일곱 번 연행되고 아홉 번 구속되는 등 수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사상계』의 가치와 의의가 높은 평가를 받아 1962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1967년 국가원수 모독죄로 구속된 상태에서 제7대 총선에 서울 동대문(을)구 신민당 후보로 옥중 출마하여 1만 8,000표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공화당의 강상욱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후 국방위원회에 지원하여 수구 우익 세력들마저 감동시키는 가장 모범적인 국회의원직을 수행했으나 제8대 총선에서는 여당의 부정선거로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엄혹한 유신독재 시절이었던 1973년 ‘민주회복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여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15년형이라는 어이없는 선고를 받았으나 이듬해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1975년 ‘제2차 민주회복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을 준비하던 중 거사 발표 3일 전인 그해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에서 안타까운 생을 마감했다. 당시 검·경은 장준하 선생의 사망원인이 ‘실족 추락사’라고 밝혔으나 75도 경사진 곳에서 15미터나 굴러 떨어졌다고 보기에는 너무도 깨끗한 시신의 상태, 유일한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의 매번 엇갈리는 진술, 배낭 속에 들어 있던 보온병의 유리가 전혀 깨지지 않은 점 등 숱한 의문을 해소하지 못해 대표적인 의문사로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2011년 8월 많은 비가 내려 묘소 뒤편 석축이 붕괴되는 재난을 당했고 2,000만 원이 넘는 공사비로 망연자실해 있던 유족에게 파주시에서 추모 공원을 조성하자고 제안하기에 이른다. 그 덕에 1년 뒤 묘소 이장을 하는 과정에서 37년 만에 선생의 유골이 세상 빛을 보게 되었고, 누가 봐도 선명한 지름 6센티미터 크기의 가격흔(加擊痕)이 만천하에 드러남으로써 결국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 독재세력에 의해 타살되었으리라는 그간의 의혹이 진실에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다. 당연히 재조사가 이루어져야 함에도 2003년 제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내린 최종 결정이 ‘진상규명 불능’이었다는 점을 들어 재조사를 반대하는 정부와 여당의 작태는 거대한 민심의 흐름에 역행할 뿐 아니라 명백한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는 인면수심에 다름 아니라 할 것이다. ▶ ‘나꼼수’에서 밝힌 이야기는 30퍼센트에 불과하다 2003년 7월부터 1년간 제2기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장준하 의문사 사건을 담당했던 고상만 조사관은 처음에 이 책을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난 8월 준엄한 역사적 심판을 재촉이라도 하듯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이 세상에 드러난 이후 여기저기에 글을 쓰고 방송 출연을 해오면서도 사건의 전말을 궁금해 하는 많은 기자들에게 고 조사관은 자신이 작성하여 국가기록원에 이관시킨 최종 보고서를 참고하라고만 말해왔다. 그러다 MBC 모 기자로부터 국가기록원에서 장준하 사건 관련 자료를 향후 70년간 비공개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큰 충격에 빠졌다. 어떻게 하든 사건의 진실을 덮으려는 정부의 비열한 ‘꼼수’에 맞서 이 사건의 전말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두 달여 동안 불철주야 집필에 매달렸다. 그가 작심하고 밝히는 사건의 전말과 세세한 조사과정은 그야말로 한 편의 다큐멘터리와도 같다. 특히 ‘없는 자료도 실제로 없음을 확인한다’는 원칙하에 1975년 문익환, 계훈제 등이 장준하 발인 전날 찾아온 김용환(그는 모두가 증언하는 20일이 아니라 18일에 상가를 찾아갔다고 홀로 주장한다)과 사고 경위에 대해 1시간 7분 동안 나눈 문답이 담긴 녹음테이프와 1988년 경찰 재조사 기록을 찾아내고 복원하는 과정을 보면 그가 이 사건을 얼마나 철저히 조사했는지가 잘 드러난다. 더욱이 유일한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의 오락가락하는 신빙성 없는 진술, 『월간조선』과 가진 사실과 다른 인터뷰 내용 등을 하나하나 엮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