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암시했던 것처럼 건국, 혹은 나라 만들기라는 말의 울림만큼 사람들의 꿈과 정열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특히 확고한 형태를 갖춘 일본 제국이 위압적으로 개인 앞에 군림하고, 사람들이 폐색감과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던 시대에, 일본인들에게 건국과 나라 만들기라는 말에는 일종의 해방감을 주고 사명감을 불러일으키는 독특하고 매혹적인 힘이 숨겨져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사(無私), 무상(無償)의 주관적 선의가 반드시 결과적으로도 선행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선을 행하려 하면서도 악을 행하는 것 역시 정치 세계에서 피하기 어려운 숙업이다.
과연 어떠한 의미에서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국가, 식민지국가였던가. 아니면 그런 시각 자체가 승전국의 독단적 견해와 그에 영합한 ‘포츠담선언사관’ 내지 ‘도쿄재판사관’에 의한 곡해에 불과하고, 다민족 공존의 도덕국가 건설이야말로 만주국의 역사적 진상이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에 대한 평가를 서두르기 전에 우리들은 우선 만주국이 왜 건국되었고 그 목적은 무엇이었던가 하는 건국이유로 되돌아가 그 궤적을 따라가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저자가 여기서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만주국의 초상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키메라에 비유하여 묘사하는 것이다. T. 홉스는 ‘인공적 인간’으로서의 국가를 구약성서 '욥기'에 등장하는 괴수 리바이어던으로 상징하였고, 마찬가지로 F. 노이만은 나치 제3제국에 괴수 비히모스의 이름을 붙였는데, 그러한 것들을 본따, 저자는 만주국을 머리가 사자, 몸뚱이가 양, 꼬리가 용인, 괴물 키메라로 상정해 보고자 한다. 사자는 관동군, 양은 천황제 국가, 용은 중국 황제 및 근대 중국을 의미한다.
지금 왜 만주국의 초상을 그리는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간행과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 발간으로 친일의 개념과 범위를 둘러싼 논쟁이 현재의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논쟁은 학문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인 입장에 의해 편이 갈리는 기형적 현상을 보이고 있어 생산적이라고 할 수 없다. 특히 일제말기의 협력 문제에서 지엽적인 것에 불과한 박정희, 안익태와 같은 인물이 쟁점으로 부각하는 현상은 그러한 기형성을 가장 잘 보여준다. 또한 똑같은 행위를 두고 두 가지 반대 해석이 극한적으로 대립되는 것은 현재의 정치적 대립이 해석에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립의 무한재생산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첫째 당대의 맥락을 복원해야 한다. ‘친일’ 문제는 특히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소문과 정의심에 의한 곡해가 자기재생산을 거듭하여 실체 자체가 애매하게 되어 버렸다. 소문 자체가 또 다른 소문을 부르고 그것이 자동화되어 이제 어느 것이 진실인지를 판단하기 어렵게 되었다.
둘째는 세계사적 시각을 획득할 필요가 있다. 당대의 협력 행위를 민족의 배반으로만 규정할 수 없다. 특히 프랑스의 대독협력과 당대의 ‘친일’ 문제를 동렬에 놓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시각이 결여되어 있다. 식민지 통치와 군사적 점령을 동일시하는 것은 자신의 무지를 폭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프랑스의 대독협력에 대한 엄격한 처벌을 찬양하는 순간,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에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다는 현재적 의미를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 시기의 박정희와 안익태를 이해하는 공통적인 매개는 만주국이다. 박정희는 만주국 군관이었고, 안익태는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맞아 ‘한국환상곡’과 선율을 공유하는 ‘만주환상곡’을 작곡한다. 박정희와 안익태에게만 만주국이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만주국을 매개로 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협력으로 전향했다. 만주국이란 어떤 국가였기에,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이 만주국에 희망을 걸었던 것일까?
야마무로 신이치의 ‘키메라-만주국의 초상’은 이에 대한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시각에서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던가를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대의 맥락에서 만주국의 초상을 그리는 것, 그리고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만주국의 초상을 그리는 것은 우리들에게도 시사점을 준다. 이 책이 그리는 만주국 초상을 통해 우리는 소문과 곡해의 벽을 뚫고 만주국의 실체에 접근하는 하나의 통로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만주국 초상을 그릴 차례이고 그것은 독자들이 해야 할 몫이다. ‘친일’인가 ‘협력’인가 하는 문제는 그런 연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