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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경

천수경

2 years ago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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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별장, 그 후

Books ・ 2015

Avg 3.9

그런 밤이 있었다. 택시에 앉아서 다짐한 밤. 오늘이 나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게 하지 말자. 오늘 본 것들, 오늘 내 안에 생긴 염세와 환멸이 조금도 나를 변화시키도록 허용하지 말자. 불가능한 소망인 걸 알면서도. 일찍 집에 간 P에게 전화했다. 나도 그냥 일찍 자리를 뜰 걸 그랬다고. 서울의 야경이 보석 가게의 진열대처럼 휙 휙 지나가던, 거리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집에 빠르게 도달한 밤. 의리 때문에 늦게까지 그 사람들과 함께한 것을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P는 다 알았고. 어쨌든 J의 생일이긴 했으니까. P는 내 실망과 무기력을 다 이해한다는 듯, 앞으로 J가 여는 파티에 ‘우리가 굳이’ 갈 필요는 없을 거라고 했다. 또 J는 하는 일이 ‘이런 쪽이니까…‘ 라며 변호해줬다. 내가 어떤 마음을 쏟아내기라도 하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어서 후회하리라는 걸 다 안다는 듯. 어서 푹 쉬라고 했다. 호기심이나 의리 따위가 나를 해치는 수준까지 가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된 밤이라고 생각하며 잠들었다. 나는 J의 생일 선물로 구제샵에서 산 체크 셔츠를 직접 포장해 갔다. 애초에 그 많은 인원 중에 J를 위한 선물을 챙긴 건 나 뿐인 것 같아 조금 부끄럽고 뿌듯했다. J와는 말을 두 마디 이상 못 나눴어도 괜찮았다. 이미 본 얼굴들도 있었고, 처음 보는 사람들은 훨씬 많았다. 모르는 이들과 비어퐁을 하고 다트를 던지고, 쉴 새 없이 자기소개를 듣고. 내 기준에선 존재만으로 세상에 해악인 유명 BJ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웅성대고 환호하는 모습을 지켜봤고. 내가 친해지고 싶던 사람이 그 BJ와 한 테이블에 앉아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었기에 혼란스러웠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언젠가 음원 사재기에 관한 대화를 하면서 열심히 욕했던 가수가 내 옆에 앉아서 죽고 싶다고 하소연하고 있었다. 그가 분위기에 맞지 않게 우울을 얘기하는 것에 사람들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충동적인 연민을 발휘했다. 당신 노래를 노래방에서 열창하는 나의 친구들을 봤더라면 지금의 마음이 놀랍도록 해소되어 1년은 더 살고 싶어질 텐데, 보여주질 못해서 비극적이라고. (그런 친구들이 있긴커녕 내 주변엔 그를 멸시하는 인간들 뿐이었지만). 그를 한심하게 보는 시선들을 본인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여 지나치게 내밀한 얘기들을 다 꺼내 보이는 행태가 안쓰러웠다. 죽고 싶다는 사람을 많이 봤어도 아, 이 사람 진짜다, 라는 드문 감각을 전하는 사람이라서 정말로 그의 죽음을 기사로 접하는 날이 머지않은 것 같았고. 그가 비싼 차의 열쇠를 지나치게 공개적으로 테이블에 얹어둔 걸 보고선 그냥 120살까지 살 사람이라고 점치기도 했다. 그날 P가 일찍 집에 가야만 했고, 내가 J와 영영 멀어진 건 왜였을까. 당시엔 명확하게 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믿지 않는 것들을 세상에서 제일 열심히 과시하며 자신들을 어필하는 이들-즉, 그의 세계-와 도저히 엮일 수 없었던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받는 상처가 너무 크다고. 나는 그곳의 사람들이 걸친 것들, 그들의 생김새 그 자체, 그들이 선망하는 모든 것들에 상처 받았다. 나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드는 사람들의 복판에 있게 만든 J를 원망했다. 애써 외면했던 나의 오만을 지금은 안다. 내가 그들과 한데 묶여도 된다고 판단한 J가 미웠던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모습으로 천박할 수 있는 인간들과 내가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한 J가, “친구들이랑 술 마시는데 올래?”라는 말로 내 시간을 언제든 가져갈 수 있었던 J가 미웠던 것이었다. ‘얕고’ ‘가짜인’ 대화들이 아닌 ‘깊고’ ‘진짜인’ 대화들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나눴는데. 그게 조금이라도 소중했더라면, 우리가 너의 옥탑방에서 보낸 무수한 일요일들의 진정한 가치를 네가 알았더라면 그럴 수 없는 거라고. 속으로 질타했다. 너에게 중요했던 것들이 내 삶을 휘두른 적 없었으니. 그럴 수 있었다. 그 밤이 끼칠 흠집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건 되려 그 밤이 내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서였는데.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밤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게 더 영향을 많이 끼친 건, 아니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데에 너무도 큰 영향을 미친 건, 그저 J라는 사람 그 자체였다. “내 목표는 있지, 서른이 되면,”으로 시작한 수많은 목표, 그것들을 네가 떠들어대던 눈빛, 우리가 함께 내려다본 연남동의 옥상들, 집 가는 길에 P와 공유하곤 했던 ‘걔가 한 말 중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것들,’ 너는 상상도 못 할 방식으로 내가 다 간직하고 있어. 나는 진즉 서른이 넘었고. 남들 다 취직할 때 학교에서 자퇴한 걸 부모님에게 알리지 못하고 종일 스타벅스에서 음악을 만들었다던 너의 한 시절을 내가 요즘 살아가는 것 같다면 믿겠니. 카페 직원 눈치가 보이지 않는 시점이 찾아온다는 걸 내가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는지. 너에게 말해주는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난다. 몇년 전, 내가 사랑을 잃고 헤매다가 문득 너의 집 근처라는 걸 깨닫고 오랜만에 전화했을 때 너는 강원도였지 하필. 나는 물어봤었지, 나랑 P 앞에서 너무도 당당하게 너의 새끼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그 분과 어떻게 되었냐고. 너는 웃으며 걔랑은 좋은 친구로 돌아갔다고 해서, 나는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상세히 알고 싶었지만, 네가 스스로 ‘칼 같은 면’을 자랑하는 게 오랜만이라 그저 웃었고, 다음에 보자고 하고는 말았지. 살다 보면 나를 처음 만났는데도 무진장 신뢰하고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놀라곤 한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P와 내가 너를 처음 만났던 날이 생각나서 웃음이 난다. 우리는 집에 가면서 호들갑을 아주 그냥 호들갑을 떨었다. 세상에 이렇게 웃긴 사람이 있을 수가 있냐. 나는 있잖아, 걔가 이미 우리를 만나기 전에 혼술을 한 것부터 존경심이 샘솟았어. 어마어마하다, 정말. 내가 성인 된 이후로 만난 모든 사람 중에 제일 엄청난 사람인 것 같아. 나도, 나도. 왜 가끔 역사책 보면 나라도 통일하고 발명품도 몇 개 만들고, 중요한 정책 개혁도 한 그런 위인들 있잖아, 그런 위인 중에 성격도 좋아서 주변인들이 좋아했다고 하는 부류, 그런 사람을 지금 육안으로 확인한 느낌이야. 왜 어떤 맥주잔에는 시나몬이 발려 있는지, 왜 세상에는 코스터가 존재해야 하는지, 혼자 아프리카에서 살 때-아프리카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니!- 네 생활이 어땠는지, 그 모든 것들은 지금 생각해도 무척 거대하다. 넌 그야말로 내 삶보다 거대한 사람이었다. 이젠 누구도 내 삶보다 거대할 수 없는데. 그땐 그랬다. 나는 이제 P랑도 자주 안 봐. 그래서 너에게 연락을 못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그 시절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는 것에 관해 너랑 얘기할 자신이 아직은 없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