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로리

가여운 것들
Avg 3.6
Jun 02, 2023.
라쇼몽의 재미는 (만약 그런 게 존재한다면) 궁극적인 진실찾기도 있겠지만, 그 과정 속 틀린그림찾기에도 있다. 같은 상황과 캐릭터를 각기 다른 화자가 얼마나 다르게 묘사할 수 있는가. 그 시점 사이의 간격이 크면 클수록 흥미진진하다. 결국 누가 MSG를 더 찰지게, 설득력 있게 뿌리나를 놓고 펼치는 자강두천 대결. 어느 쪽이건 흥미진진하다. 이쯤되면 진짜가 뭔지 뭐가 중요한가. 날조로 승부해도 재밌으면 그만이지. 중반의 끝없는 장광설 챕터들이 좀 지치긴 했는데, 그래도 소설 자체의 구조와 설정, 후반의 클라이맥스 흡입력이 강해서 쉽게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친절한 주석이 풍부히 곁들여진 번역 덕에 텍스트에 담긴 함의를 이해하기가 상당히 편했다. 거기서 끝나는 줄 알았는데, 마지막 주석 챕터에 다다르면 진정한 미치광이는 캐릭터가 아닌 작가 본인이 아닐까 싶어진다. 어차피 다 자신이 만든 것이지만 말이다. 성실한 구라에는 감동이 있다. _ "잘 들어 보게, 맥캔들리스." 백스터가 이 지점에서 말했다. "이자는 자네가 술에 취해 주절대던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네. 고해성사라도 하지 않으면, 그는 어떤 구실이든 잡아서 아무에게라도 그의 이류 감정을 지껄여 댈 걸세." _ 그는 햄릿처럼 정신없이 헛소리를 지껄여 대요. 그를 진정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나도 연기를 좀 하는 거예요. 연극판에서 말하듯 '극적 효과를 위해 고충을 과장하는' 거죠. _ 우리가 결혼해서 권태를 느끼지 않으려면 반드시 얼마간 서로 떨어져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해요. _ 그녀가 말했다. "그 가여운 것은 다정한 포옹이 필요했던 거예요." 장군이 앙다문 이빨 사이로 내뱉었다. "다정한 포옹이라니! 그 말은 역겹고 사내답지 않아." _ 이 책에서는 빅토리아 시대풍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것은 국회의사당만큼이나 엉터리 고딕풍이다. 나는 그런 쓸데없는 구조물들이 싫다. _ 내가 말했소. "분명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일이겠죠?" 그녀가 말했소. "아뇨. 미래의 일이에요." 내가 말했소. "그럼 난 지금 어디에 남겨진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