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BJ

Unfinished
Avg 2.6
'출국'을 보며 머리 속에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였다. 대체 이 영화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나름 고민을 해봤는데, 많은 허점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자기가 어떤 영화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본' 시리즈나 '베를린' 같은 스파이 액션이 되고 싶다가 '공작' 같은 첩보 정치 스릴러도 되고 싶은 갈팡질팡한 사춘기 아이 같은 정체성 혼란을 관객에게 가감없이 노출시킨다. 일단 기본적으로 이야기가 너무 허술하다. 대체 인과가 어떻게 이런식으로 전개되는지 이해가 안 돼, 처음에는 혼란스러웠다가 나중에는 그냥 이해하길 포기했다. 이는 단순히 비현실적이다의 문제가 아니다. '본'이나 '베를린'은 말도 안 되는 액션씬들이 있지만, 액션 영화니까 이해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수많은 인물들과 이해 관계들이 목적이 제대로 확립돼있지도 않아서 왜 저 단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인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안 된다. 그나마 목적이 뚜렷한 것은 가족을 살리기 위해 사방팔방 뛰는 주인공이다. 하지만 이 주인공이 일단 애초에 이렇게 자연스레 베를린을 활보할 수 있는 상황도 너무 이상하고, 그가 짜는 계획도 너무 허술하다. 비현실적인 시퀀스들이 있을지라도, '본'이나 '베를린'에서는 캐릭터들이 무엇을 원하는지가 명확하고, 인물들 모두 스파이답게 조심스럽고 치밀하게 움직인다. '출국'에는 그런 점이 없다. 그리고 이미 현실성과 개연성을 모두 포기한 상황에서 '공작'이나 '스파이 브릿지' 같은 스파이 드라마는 물 건너간지 오래다. 앞서 말했듯이 인물들과 단체들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주인공에게 어떤 위험이 있고, 어떤 전략적 선택지가 있는지가 모호하다. 이 자체만으로도 치명적인데, 여기에 인물들의 대사도 너무 허접하고 어색하며, 이범수 같은 좋은 배우들도 이런 대사들을 제대로 소화 못하는 것 같았다. 이 영화에서는 좋은 연기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배우도 각본도 캐릭터를 전혀 못 지탱하기 때문에 관객이 몰입할만한 지점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해외 로케이션에서 촬영한 만큼 이국적인 풍경과 80년대의 냉전 분위기를 보는 맛은 어느 정도 있다. 하지만 구도, 조명, 전반적인 영상미는 너무 싸게 느껴진다. 무슨 아마추어 감독이 만든 듯한 깊이 없고 지루한 미장센과 그냥 흔한 스코어로 무난하게 사운드트랙을 메꾸려는 무성의함이 정말 별로였다. 어느 순간부턴 이 영화가 첩보 영화가 아니라 조폭 영화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만큼 첩보기관들이 치밀함이나 섬세함 없이, 그냥 막나가는 양아치들로 묘사된다. 그렇게 무대포로 폭주하는 스파이들의 이야기를 전개하고 싶다면 '미션 임파서블'처럼 끝내주는 액션과 카리스마로 밀고 나가야지, 분단의 아픔에 대한 첩보 스릴러로 가면 필패한다. 정말 재미도 감동도 인상적인 면도 없는 끔찍한 영화로, 보면서 내 멘탈이 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