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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 안정을 요하는 여자와 감정적 고양을 원하는 남자의 상승과 하강의 로맨스. . (스포일러) 안 그런 영화가 어디 있겠냐만 <버티고> 역시 모두가 좋아할만한 영화는 못되는 것 같다. 회사원들의 고충이란 소재는 꽤나 해묵고 낡은 감이 있으며 오로지 감정 하나만을 쫓아가는 연출 스타일은 관객에 따라 자의식 과잉으로 볼 법도 하다. 인물에게 극한의 정서적 고통을 주어야 할 극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그럴듯한 방안을 찾지 못하고 뜬금없이 성추행을 일삼는 남성 상사라는 악마적 존재를 편의적으로 등장시켜 씬을 마무리 짓는 작위성은 또 어떠한가. 게다가 한껏 폼을 잡고 만든 기이한 엔딩 씬은 그 의미는 강력하게 다가오나 조금은 우스워 보이기도 한다. <버티고>는 여러모로 비판받을 구석이 많은 영화다. 진부한 이야기고 스타일이 과하다 못해 넘쳐흐르는 수준이니까. . 헌데, 그 과한 스타일이 실어 나르는 진부한 이야기를 보고 있자면 관객의 입장에서 이상하게도 마음이 움직인다. 서영(천우희)를 필두로 진행되는 30대 여성 회사원들의 이야기, 누이를 잃고 심리적 진공상태에 처해있는 관우(정재광)의 이야기, 이 두 이야기를 교직하는 상승과 하강이란 모티브.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모티브, 혹은 메타포는 또 그것대로 낡았기 그지없고 수없이 반복되어 온 것이지만 이상하게도 뻔한 것들 끼리 얽히고설키니 퍽 매력적인 결과물이 나온 듯하다. 이 영화에서 내가 받은 이유모를 감동을 글로 풀어낼 재주는 없는 것 같다. 해서, 영화가 상승과 하강이란 모티브를 중점으로 어떻게 두 이야기를 엮어 하나의 러브스토리로 구성했는지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간략히 기술해보려 한다. . 서영은 추락을 경계한다. 그런 그녀의 마음은 그녀가 이미 높은 상태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부산서 서울로 상경한 그녀는 사내 최고의 인기남 진수(유태오)와 비밀 교제중이다. 영화는 서영이 어떤 험난한 과정을 거쳐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는지, 또 어떤 과정을 통해 모두가 우러러 보는 진수와 교제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버티고>는 어느 지점에 다다르기까지의 고됨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목표로 하던 위치에 도달한 이가 그 지점에서 필연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불안에 관한 영화이다. 꽤나 근사해 보이는 수도권 직장, 선망의 대상과의 연애. 겉으론 보기엔 멀쩡하기 그지없지만 계약이 성사되지 못하면 곧바로 실업자 신세가 되며 애인과는 언제 헤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인 그녀는 사실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모두 위태로운 상태라 봐도 무방하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간 그녀는 사실 지리적으로도 아래서 위로 올라간 셈인데 아래 지역인 부산엔 자신이 경멸하는 부모라는 존재가 있기에 윗 지역인 서울에서 그녀는 그토록 불안하다.) 극중 서영의 귀가 크게 충격 받은 첫 번째 순간은 아버지의 폭력(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아버지에게 맞아 고막이 찢어졌다는 서영 어머니의 대사가 있다.)이고 두 번째는 회사 내 상사의 폭력인데 이 역시 서영이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모두에서 학대받았다는 것, 혹은 불안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 심리적 하강, 즉 그녀에겐 안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세상은 도리어 그녀에게 추가적 상승을 재차 적으로 요구한다. 서영이 엘리베이터를 통해 사무실로 올라가는 숏이 반복적으로 배치되는 것과 직장 동료들의 눈을 피해 진우와 서영이 사랑을 나눌 때 진우가 서영을 데리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는 후에 서영이 관우에게 하강을 요구하자 크레인을 통해 관우가 서영을 아래로 내려주는 것과 극명히 대조되어 있다.) 등등 영화는 서영의 동선을 통해 그녀의 내적 불안감의 레이어를 켜켜이 쌓아간다. . 이어서 관우의 이야기가 불쑥 등장한다. 서영이 엘리베이터를 통해 어딘가로 올라가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던 것과는 달리 관우는 시작부터 옥상에서 등장하여 후에 건물 외벽을 타고 아래로 점차 하강한다. 서영에게 세상은 너무나도 시끄럽다.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그녀의 집중이 요구되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헌데 관우에게 세상은 이보다 더 심심하고 조용할 수가 없는 공간이다. 누나를 잃고 감정적 빈사상태에 처한 그는 아무 것도 없는 이 상태가 지독히도 외롭다. 말하자면 서영이 심리적 하강이 필요한 인물이라면 관우는 감정적 상승, 즉 고양의 무엇이 필요하다. 하지만 서영에게 그랬던 것과는 반대로 세상은 관우에게 하강을 강요한다. 업무의 과정 상 고층에서 저층으로 내려가야만 하는 그는 자신의 직무에서도 아래로 내려가야만 하고, 호기심에 서영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후에 호되게 당하며 출입 불허를 선고받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사적인 공간에서 조차 아래로 향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 그렇게 영화엔 올라가기 싫은 인물의 오름의 이야기가 있는 한편 내려가기 싫은 인물의 내림의 이야기가 그 반대편에서 공존하고 있다. 서로 각자의 방식으로 서서히 병들어가고 있던 찰나에 두 이야기가 불현듯 마주한다. 올라가는 누군가와 내려가는 누군가가 동시에 있으면 둘은 반드시 어딘가에서 교차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니까. 고무적인 관점에서 처음 작용이 가해지는 방향은 서영에서 관우 쪽의 방향이다. 눈앞의 인터넷 방송 화면을 통해 떠나간 누나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던 관우는 눈앞에 보이지만 가닿을 수 없는 유리벽 앞의 여인인 서영에게 매료된다. 여기서 두 인물을 매개하는 유리벽은 사실상 인터넷 방송의 모니터 화면인 셈이다. 관우가 서영에게 감화되자 드디어 줄곧 하강의 동선만을 밟아오던 관우가 올라가는 첫 순간이 등장한다. 바로 관우가 서영과 엘리베이터에 동승한 순간. 관우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그 순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햇살이 관우의 얼굴로 집중되며 영화는 인물의 감정적 고양의 순간을 포착한다. 이어지는 관우의 일과를 구성하는 씬은 이전과 같은 듯 조금은 다르게 짜여 있다. 그 전까지 관우의 일과를 구성하는 씬은 이미 옥상에 올라가 있는 관우의 모습으로 시작했었지만 관우가 서영과 엘리베이터에 동승한 씬 후에 등장하는 그의 일과는 옥상계단을 올라가는 관우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렇게, 서영은 줄곧 내려만 가던 그를 끌어올려다준 관우의 내적 구원자가 된다. . 앞서 유리벽을 인터넷 방송의 모니터 화면과 비교한 부분을 다시 끌고 와야 할 것 같다. 유리벽과 모니터 화면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매개한다는 측면에서 서로 유사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으나 둘 사이엔 무시할 수 없는 명확한 차이가 존재한다. 유리벽은 가능하지만 모니터는 할 수 없는 것. 그건 바로 시선의 쌍방향이다. 인터넷 방송과는 달리 시선의 주체가 곧 시선의 객체인 이 유리벽 안과 밖의 공간에선 한 사람의 작용이 있으면 다른 이의 반작용 역시 존재한다. 즉, 이제 서영이 관우에게 감화될 차례다. . 줄곧 추락을 두려워해오던 그녀에게 있어 고층 건물에 자유자재로 매달려 있으며 높은 난간 위를 무감각하게 여기는 그는 신기의 대상이며 묘한 부러움의 대상이다. 아버지, 어머니, 애인, 직장상사 등등 시종 기존에 알던 인물들에게 고통받아온 서영은 관우라는 미지의 인물이 유리벽 밖에서 건네는 힘내라는 한 마디에 통째로 흔들린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서영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하강을 부탁한다. 그렇게 서영은 물리적 하강을 통해 심리적 안정을 경험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다. 그녀는 이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난 뒤 또다시 추락의 불안감을 직면할 자신이 없다. 따라서 그녀는 타의적 추락을 피하려 자의적 추락을 꾀한다. 헌데 이번엔 관우가 그녀의 구원자로 나서며 영화는 이전과는 매우 판이한 프레임 구도를 제시한다. 영화의 엔딩에서, 서영은 관우의 도움을 통해 상승한다. 그리고 덧붙여지는 그의 대사. “괜찮아요.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무작정 힘내라는 말과 아무런 근거 없이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괜찮을 것이라는 말. 진정 서영에게 필요했던 말이다. 누군가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곧 사랑을 담보로 하는 것은 아니다. 기운 없는 이에게 무작정 힘내라는 뻔한 응원 한마디를 보태주고, 걱정 많은 이에게 걱정 마라는 아무 근거 없는 위로 한마디 해주는 것. <버티고>는 모르는 이의 힘내라는 말 한마디에 무너질 많은 이들을 위한 무조건적인 사랑 영화다. . 내 기억 상 <버티고>의 마지막 대사는 서영의 “이제 올라가고 싶다.”이다. 그렇다면 이건 추락이 두려워 상승을 꺼려하던 인물이 다시 상승을 염원하게 된, 즉 삶에 회의를 가졌던 인물이 다시 삶의 의지를 회복하게 된, 비유하자면 도심 속의 <그래비티>일까? 혹은 시종 감정적 내리막을 거치던 인물이 한 여성을 만나 내적 상승을 경험하고 그 여성을 죽음의 위기에서 끌어올려 자신의 잃어버린 내면의 무엇을 회복하게 된. 또 하나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일까. (각 영화들을 완성도적인 측면에서 비교하는 건 당연히도 아니다.) 어찌됐든 <버티고>는 각자 힘든 삶을 견대내던 서로가 우연히 마주치고 반하여 서로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는 낡은 이야기를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로 멋들어지게 재편한 꽤나 매력적인 영화다. 그 아무 근거 없는 힘내라는 응원에 제법 울컥했으니 아무래도 나는 이 영화를 싫어하기 힘들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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