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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의 틈을 벌릴 때 드러나는 신의 다른 얼굴. . (스포일러) . 이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아가멤논의 트로이 출정 과정에서 큰딸 이피게네이아가 제물로 바쳐지게 된 그리스 신화를 차용해 왔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의 신성한 숫사슴을 죽인 벌로 큰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했던 것처럼, 스티븐도 가족 중 한 명을 죽여야만 하는 마틴의 시험(영화는 마틴이 어머니와 스티븐과 함께 <사랑의 블랙홀>을 보다가 빌 머레이가 "내가 신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아냐"고 말하는 타이밍에 맞추어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 장면에서부터 대놓고 마틴이 신적 인물이라는 힌트를 주고 있다.)에 처해 있다. 큰딸 킴이 이피게네이아 신화에 대한 문학 레포트로 A+를 받았고, 작중에서 신과 같은 위치에 있는 마틴을 따르는 듯하며(신화에서 이피게네이아는 제물로 바쳐진 뒤 아르테미스의 신관이 된다.), 아버지에겐 자신을 제물로 삼아달라 말하는 것을 보면, 킴은 신화 속 이피게네이아의 역할을 그대로 옮겨온 것만 같다. 게다가 아들 밥이 후반에 이르러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그는 신화 속에서 아가멤논을 죽인 클뤼타임네스트라를 다시 죽여 아버지의 복수를 이룬 오레스테스를 연상시킨다. . 그러나 영화는 후반의 전개에서 의도적으로 킴과 이피게네이아를, 밥과 오레스테스를 동일시하도록 유도해 놓고는, 정작 신화와는 전혀 달리 스티븐이 제물의 선택을 운에 맡긴 뒤 이피게네이아의 분신인 킴 대신 밥이 죽음을 맞이하는 결과를 제시한다. 사실 이 영화의 각본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처럼 그리스 신화를 차용한 듯하면서도 의도적으로 그 신화와 틈을 벌리는 부분들에 있다. . 첫 숏에서 맥동하는 심장을 뛰게도 멈출 수도 있게도 할 수 있었던 스티븐의 손은 흡사 신의 손과도 같고, 스티븐 자신도 자신이 신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양 모든 것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 한다. 아내와의 섹스 장면이 가장 노골적으로 이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마틴은 스티븐과 미리 약속을 잡지 않고 제멋대로 찾아오거나, 스티븐이 선물해 준 시계의 메탈 줄을 가죽으로 바꾸는 등 그 통제력에 균열이 내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 상에서 마틴은 마치 신처럼 스티븐에게 '가족 중 하나를 죽이라'는 운명의 굴레를 덧씌운다. 모든 것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고 했던 스티븐은 신 앞의 무력감을 느끼며 인간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신화에서는 아가멤논이 바쳐야 할 제물이 처음부터 이피게네이아로 결정되어 있었던 반면, 이 영화에서 마틴은 스티븐에게 '가족 중 하나'라는 선택지를 준다는 점이다. 이 영화가 신화를 차용해 보면서 만든 이 조그만 틈은 얼핏 보기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결말에 이를수록 점점 더 큰 균열로 이어진다. 신화에서 아가멤논에겐 트로이 출정을 위한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고, 결국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했으며, 그 결과 클뤼타임네스트라의 원망을 사게 되어 아가멤논은 트로이에서 돌아온 직후 그녀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고, 이는 다시 차녀 엘렉트라와 아들 오레스테스의 복수로 이어진다. 아가멤논에게 이피게네이아의 희생 외의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그는 아내에게 원망을 샀고 가족 중 셋이 죽는 결말에 이른 것이다. . 영화 초반, 스티븐의 가정은 가부장적인 스티븐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그 안에도 아버지의 통제가 먹히지 않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아들 밥은 아버지의 말에도 머리 자르길 거부하고, 아내 안나는 이미 파티 장면에서부터 매튜와 모종의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틴이 스티븐의 가족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스티븐의 가장으로서의 지위는 얼핏 보면 더욱 크게 흔들리는 듯하다. 딸 킴은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헬멧을 쓰지 않은 채 마틴과 오토바이를 타거나 담배를 피우고, 아내 안나는 남편의 앞에서 자신의 의학적 견해를 내세우고 그를 원망하는가 하면 매튜에게 정보를 얻어내고자 매튜를 직접 애무해 주기에 이른다. 그러나 마틴이 정해둔 데드라인이 다가오면, 결국 그 모든 가족 구성원들은 스티븐에게 이전보다 더 낮은 자세로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아들 밥 한 명만 죽고, 엔딩 씬에서 스티븐의 가족은 신화 속의 가족이 서로를 죽여가며 풍비박산에 이른 것과 달리 적어도 표면적으론 가족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다. 무엇보다 스티븐의 가장으로서의 지위는 이전보다 더욱 공고해져 있다. . 스티븐은 자신이 신의 위치에 선 양 착각하게 된 그 의술을 자신의 '손'으로 행한다. 그리고 마틴은 흡사 신의 손과도 같은 스티븐의 그 손을 칭송한다. 스티븐과 마틴 사이에 처음 생기는 연결고리는 손목에 차는 시계이다. 그리고 마틴은 스티븐에게 예시를 보여주겠다며 스티븐의 팔을 물어뜯고 뒤이어 자신의 팔을 물어뜯는다. 영화는 계속해서 스티븐과 마틴 사이의 연결점을 손 혹은 팔에서 찾는다. 이는 일차적으로 누군가에게 생명을 선사하는 신의 손과도 같았던 스티븐의 손이 마틴의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했고, 결국 그 대가로서 그 똑같은 손으로 아들을 죽여야 하는 스티븐의 운명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손은 마틴에게 조금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 마틴은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이 똑같이 스파게티를 먹을 때 포크를 안으로 찔러넣어 돌돌 말아 먹었노라고 말한다. 즉, 스파게티를 먹을 때 '손을 쓰는 방식'이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같은 방법으로 스파게티를 먹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때 아버지가 죽었을 때 이상으로 크게 화가 났다고 마틴은 말한다. 마틴에게 있어 그의 아버지와 그 자신 사이의 동질감을 획득하는 것은 바로 그 '손버릇'이었고, 다른 모두가 그렇게 먹음으로써 동질감이 깨져 버렸을 때 그는 분노한다. . 마틴은 그가 벌이고 있는 일이 '균형'을 회복하는 일이라 말한다. 이는 표면적으로 마틴의 가족 구성원 한 명이 죽었으니 스티븐의 가족 구성원 한 명이 죽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티븐이 눈을 가리고 모든 것을 운에 맡겼을 때 밥이 죽게 된 것도 결국엔 '신의 섭리'라고 본다면, 마틴이 말하는 '균형'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할 때 '마틴의 아버지'가 죽은 대가로 '스티븐의 아들'이 죽어야 하는 것을 뜻한다. 마틴은 안나에게 자신의 어머니와 스티븐이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말한다. 마틴에게 있어 스티븐은 자신의 아버지의 공백을 메울 만한 사람이다. 한 편, 영화의 엔딩 씬에서 스티븐의 가족은 아들의 자리가 비어 있으며, 마치 그 자리로 들어오듯 마틴이 조금 늦게 가게에 들어선다. 그리고 마틴과 마틴의 아버지가 '손'으로 동질감을 확인했던 것처럼, 스티븐과 마틴은 시계로 연결되고 둘은 함께 팔에 상처를 입는다. 어쩌면 마틴이 말한 '균형'은 스티븐의 가정에 비어버린 아들의 자리에 자신이, 자신의 가정에 비어버린 아버지의 자리에 스티븐이 들어와 가정의 형태를 복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밥에 비해 유독 킴과 친근하게 지내면서도 그녀와 성적인 접촉인 일절 하지 않는 것도 이와 같은 궤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마틴은 스티븐으로 하여금 신 앞에 무력한 인간의 위치를 깨닫게 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가족에게 '선택권의 존재'를 인지시킴으로써 적어도 가족 공동체 내에선 스티븐이 흡사 신과 같이 공고한 가장의 위치로 복권하도록 인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 그렇기에 이 신은 전능하지만 그만큼 애처롭다. 그는 인간에게 신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음을 일러 주면서도, 또 다른 소 사회 안에서 신과 유사한 지위를 획득하게 만들면서까지 다시 그 인간 아래 스스로 종속되고자 하는 신이다. 그는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이면서 다시 그 피조물의 아들이 되길 원한다. 영화의 마지막 숏에서 마틴은 바로 이전 숏에서 가게를 나서는 스티븐의 가족, 그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에 문을 나선 스티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때 마틴의 얼굴이 전능한 신의 얼굴이 아니라 차라리 자신에게 등을 돌린 아버지의 뒷모습만 황망히 바라보고 있는 아들의 얼굴에 가깝다고 느낀 사람이 비단 나 하나만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This comment contains spoil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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