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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옹과 택시드라이버 사이에서 . . (스포일러)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불친절 하다. 하지만 세상엔 필연적으로 불친절 할 수밖에 없는 영화들이 있다. 꿈과 의식, 무의식의 영역을 다루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영적인 세계, 물적인 세계를 매개하며 전개되는 퍼스널쇼퍼가 친절 할 수 없듯이 말이다. 앞서 언급한 두 영화의 경우들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영화도 친절하게 진행될 수 없는 영화나름의 이유가 있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과거의 잔상들 속에서 불완전하게 존재하는 인물 그 자체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불친절한 화술은 영화의 패착이 아닌 영화의 선택이며 그러한 선택은 이 영화의 특색이며 더 나아가 영화의 성취로 귀결된다. . 주인공 조 는 유년시절 가정폭력에 대한 끔찍한 기억과 PTSD 라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트라우마에 갇혀 간신히 존재하는 인물이다. 그러한 온전하지 못한 인물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다소 이색적인 방법들을 이용한다. 보통영화였다면 몇 분의 시간을 할애하여 조가 과거에 겪은 기억들을 플래쉬백씬 들로 보여 줬겠지만 영화는 플래시백 이라기보다 플래시에 가까운 형태로 과거의 끔찍한 잔상들과 이명들이 조의 현재의 삶속에 불쑥 침투했다 사라지는 방식을 택한다. 따라서 영화는 플래시백 쇼트들을 시간 순 에 근거하여 배치하지 않고 철저히 조의 심리에 근거하여 배치한 것 이다. 플래쉬백의 활용보다 훨씬 더 이상한 점 은 바로 이 영화가 액션과 폭력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 영화 속에는 여타 영화들이었다면 롱테이크를 이용하여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액션씬을 연출하거나 빠른 컷 편집을 활용하여 본시리즈와 같이 화려한 액션씬을 찍을 수 있는 상황이 다분하지만 영화는 조의 액션씬이 등장할 때 마다 철저하게 카타르시스를 거세하는 방향으로 액션을 연출했다. 니나가 방에서 다시 납치될 때 조와 납치범의 일대일 격투는 카메라가 워낙 인물에 근접하여 어지럽게 촬영되었고, 심지어 그전 상황인 조가 니나를 구하는 장면은 아예 CCTV속 화면을 보여줌으로서 가장 뜨거운 상황을 가장 냉랭한 방식으로 중계한다. 장도리를 들고 적진으로 들어가는 인물을 보고 올드보이의 복도씬과 같은 액션을 기대한 관객들은 아마 큰 실망을 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감독들 이었다면 각종 영화적 테크닉을 동원해 화려하게 찍기를 마다하지 않았을 영화의 상황들을 린램지 감독은 왜 이런 방식으로 찍은 것 일까? .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 린램지 감독은 어릴 적부터 폭력에 점철되어 있는 조가 폭력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듯이 관객들도 영화의 폭력장면들에서 쾌감을 느끼지 않기를 원하는 것 같다. 따라서 조가 폭력의 주체가 된 상황에서는 폭력을 가장 간접적이게 묘사한 것 이다. 조는 폭력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고 폭력을 혐오하는 사람이니까. 반면 위에서 언급한 장면들과 달리 폭력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장면들도 위의 경우들 보단 적지만 찾을 수 있다. 니나가 다시 납치될 때 납치범들이 인질의 얼굴에 총을 쏠 때 그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위의 상황에서 조가 폭력의 주체인 가해자였다면 폭력의 피해자, 즉 폭력의 객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상황에서는 폭력을 여과 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조의 입장에서, 폭력을 가해할 때는 자기최면을 통해 폭력을 잠시나마 외면할 수 있겠지만 폭력의 피해자 입장에 섰을 땐 폭력이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과거의 트라우마와 오버랩 될 테니까. 그가 폭력의 피해자였던 유년시절처럼. . 더 나아가 이러한 액션 스타일은 조의 존재부정과도 연결 지을 수 있다. 상황이 아닌 흔적을 담는, 액션이 아닌 액션이 남긴 리액션을 담아내는 이 영화의 액션스타일은 (CCTV 연출이 대표적이다.) 그자체로 조의 존재부정과도 연결된다. 말하자면 이 영화의 플래시백, 액션스타일은 철저히 조라는 인물 그 자체를 위해 세팅되어 있는 것이다.( 영화가 사건의 배후에 딱히 관심 없어 보이는 것과, 니나라는 주요인물을 조의 과거로 보이도록 함으로서 조를 더욱 입체적으로 다루기 위한 밑그림의 용도로 활용한다는 점 또한 이 영화의 관심사가 온통 조에 있음을 분명케 한다.) . 앞서 예기한 존재부정이라는 테마에 대해 더 이야기해보자. 추측컨대 영화의 제목인 ‘너는 여기에 없었다.’ 부터가 존재부정이라는 키워드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제목에서 ‘여기’가 지칭하는 공간 혹은 시간들은 현재시점에서 조가 고통 받게 되는 원인이 되었던 과거의 시공간들이다. 흥미로운 건 이문장이 과거형이라는 건데, 보다시피 ‘없었다. 라는 과거형의 동사와 여기라는 대명사가 조응하지 않는다. 어법에 바르게 문장이 구성되려면 “너는 거기에 없었다.” 라고 해야 말이 될 것이다.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여기’ 라는 대명사는 말하는 이에게 가까운 곳을 가리키는 말이고 ‘거기’라는 대명사는 듣는 이에게 가까운 곳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 말인즉슨 결국에 “너는 여기에 없었다.” 라는 제목은 현재시점의 조가 현재의 본인에게 본인의 과거를 부정함으로서 하는 자기위안과도 같은 말이라는 것 이다. 이러한 위안을 듣는이는 말하는 본인, 즉 말하는 이 이니까. 하지만 비극적으로 현재의 조는 과거의 자신에 의해 존재하므로 결국 과거에 대한 부정을 담은 제목은 본인 스스로에 대한 존재부정으로 귀결된다. 또한 ‘여기’라는 대명사가 내포한 근거리적인 특성이 본인이 부정하고 싶은 과거가 얼마나 현재의 삶에 가까이 근접해 있는지를 암시하기도 한다. 그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연출이 있는데, 초반부 조가 사건을 처리하고 공항에 들어와서 물을 마시는 장면이 예사롭지 않게 연출되었다. . 해당 장면은 조가 물을 마시는 쇼트, 조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바라보는 쇼트, 조가 물을 마시던 방향을 여자가 바라보는 리버스쇼트로 연결되는데 이 연결쇼트들 중에서 여자가 조의 방향을 바라보는 리버스쇼트에는 조가 입을 대고 마시던 식수대의 물은 계속 흘러나오지만 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이는 앞서 위에서 언급한 액션 연출의 스타일과 더불어 존재부정이란 키워드를 인상적으로 표현한 연출로 보이는 동시에 조를 유령, 또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처럼 묘사하는 영화의 방식을 엿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처럼 스스로에 대한 부정을 하는 조는 당연하게도 더 이상 삶을 원하지 않는 인물 인 것 같다. 말하자면 죽지 못해 사는 인물이랄까? 그가 살아있는 이유는 오로지 본인의 어머니 인 것처럼 보인다. 후반부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한 조직원이 죽어가는 순간에 조가 그의 손을 맞잡아 주고 그가 부르는 노래를 같이 부르는 건 아마도 조가 표시하는 일종의 감사인사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어머니를 죽임으로서 이제 조는 죽을 수 있게 된 것이니까. 그러나 죽음을 결심하고 실행하는 그 단계에서 조차 조는 본인의 옛 과거처럼 보이는 니나의 이명을 듣게 되고 자살을 중단하고 니나를 구출하러 간다. 결국에 구출까지 성공했지만 구출한 대상은 이미 본인의 도움의 필요 없는 상태였고 조는 다시 한 번 좌절에 빠진다. 만약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더라면 이 영화는 스콜세지의 택시드라이버와 유사한 결말을 택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결말이 택시드라이버와 확연히 다른 노선을 택했다고 말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니나의 마지막 대사다. . ‘날씨가 좋아요’ 라는 니나의 말로 인해 조가 오랜 트라우마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다 라고는 단언할 수 없겠지만 어둑한 조의 인생에 있어 한줄기 빛과 같은 말이었음은 분명하다. 조가 있었지만 이젠 없는 공간을 찍는 앞서 자주 보여준 연출처럼 조와 니나가 앉아 있던 의자를 찍는 장면으로 끝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같은 빈공간이지만 앞서 보여준 빈공간과 다른 느낌을 가져다준다. . 레옹이 구원을 원하는 여자아이를 구하여 구원을 얻는 남자의 이야기라면 택시드라이버는 구원을 원치 않는 여자아이를 구하여 파국을 맞게 되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구원이 필요 없는 여자아이를 구하여(정확히 말하자면 구한 것 도 아니다) 인생의 작은 한줄기 빛을 보게 되는 남자의 이야기, 즉 앞서 말한 두 영화의 사이에 있는 영화라고 말 할 수 있겠다. 만약 택시드라이버의 아이리스가 트래비스에게 니나의 마지막 대사를 말해주었다면 트래비스의 삶은 조금이나마 달라졌을까? 다소 숙연해지는 대목이다.
This comment contains spoil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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