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Were Never Really Here
You Were Never Really Here
2017 · Crime/Drama · UK, France, United States
1h 29m ·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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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l Baby

I Wouldn't Dream of It

Nina Through Glass

Joe's Drive

Sunshine Down (Original Mix)

Angel Baby





chan
4.0
This may contain spoiler!!
이동진 평론가
4.0
잔상과 이명 속에서 간신히 존재하는 자의 핏빛 행로.
정환
5.0
“고통 속에서 없음(0)을 향해 세어가며 악착같이 버텨 온 것이 내가 살아야 하는 유일한 이유였을 때, 마침내 고통이 사라지고 동시에 그 이유마저 없어진다면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없음의 순간에서 무를 견디지 못해 삶을 끝내고픈 충동이 끊임없이 충돌할 때, 내 앞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단 하나의 소명을 붙잡아야 한다.” 조는 몸에도 흉터가 많은 사람이지만,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마음의 흉터다. 거구의 육체를 지닌 사람이 나약하다며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나의 고통이 아닌, 나의 죄책감에 있다. 그는 전쟁터에 있었고 그곳에서 만난 소녀에게 건넨 초콜릿을 건네주었다. 그는 현장에 너무도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막지 못했다. 그가 아버지를 피해 숨었었기 때문에 그곳에 없었던 그 대신에 그곳에 있었던 어머니가 고통받았다. 그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곳에 없었기 때문에 생긴 죄책감들이다. 니나와 조의 공통점은 고통 속에서 0까지 숫자를 센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카운트다운은 고통을 견디기 위한 수단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옥의 삶에 그나마 끝이라는 것을 만드는 것. 그들은 고통 속에서 없음(0)을 향해 세어가며 악착같이 견디며 살아온다. 하지만, 다시금 고통으로 재회하게 만드는 흉터들은 그렇게 악착같이 버티었던 보람마저 무너뜨린다. 현재 나의 불안한 삶의 근원은 고통으로 이어져 온 내 삶과 몸의 역사들이다. 현실마저 과거의 잔상처럼 살아가는데 그렇게 흔들리면서 불안하게 버텨온 이유가 뭘까. 낙인처럼 몸으로 새긴 고통의 역사를 기반으로 불안하게 흔들리는 현실의 걸음걸이는 깨어나지 못할 과거의 악몽에서 마치 몽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늘 없음을 바라며 살아왔는데 막상 고통으로부터 한숨을 돌리고 찾아온 무를 견디지 못한다. 없음을 마주했을 때, 그 무지의 막막함을 채우지 못한다면 그제서야 앞으로 내가 더 살아야 하는 이유를 묻는다. 지옥 속에서 끝까지 살아야 했었던 유일한 이유들은 이 고통이 끝나기를, 즉 없음을 바라기 때문이었으나, 바꿔서 얘기하자면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이것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게 고통이 끝나는 없음이 찾아오는 순간에는 동시에 내가 살아야만 하는 유일한 이유도 사라진다. 그동안 나의 모든 삶은 고통이었고, 고통이 끝난다는 것은 내 삶 역시도 끝이라는 것일까. 내가 악착같이 버티며 살았던 과거와 이제는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끝이 나버렸을 때, 그러니까 고통 속에서 없음(0)을 향해 세어가며 악착같이 견디며 살아온 삶과 그토록 바라왔던 없음의 순간에서 무를 견디지 못해 삶을 끝내고픈 충동이 끊임없이 충돌할 때 우리는 내 앞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단 하나의 소명을 붙잡아야만 한다. 우리의 흉터는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고, 우리의 고통은 그곳에 없었기 때문에 생긴다. 어차피 삶을 몽유하는 육신을 구원받기 늦었다면, 앞으로 남은 이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해야 하지 않을까. 더 이상 내가 그곳에 없었기 때문에 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가 고통받는 일이 없도록. 내가 고통으로부터 지켜야 하는 모든 이들에게. 너만은 그 고통 속에서 흉터를 남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만 한다. 그러니 너는 그 고통 속에서 없었던 거야. 대신에, 네가 고통받는 그곳에 언제든지 내가 지켜줄 테니.
Jay Oh
4.0
아물지 않는 상처는 온전히 내가 되었다. 적은 대사. 화면으로 모든걸 전달한다. Living with permanently open wounds. + 분석/스포 ... ( 스 포 주 의 ) 느낀 점 몇 가지: 영화 내에선 주인공에게 세 가지의 트라우마가 작용한다. 첫째는 어렸을 적 아버지가 어머니와 자신을 학대했던 기억, 둘째는 파병 나가서 초콜렛을 건네준 아이가 눈앞에서 초콜렛을 탐하던 다른 아이에게 살해당한 기억, 셋째가 인신매매 단속이 늦는 바람에 구하려던 이들이 다 컨테이너 안에 죽어있던 기억이다. 이 트라우마들은 PTSD처럼 주인공 삶의 일부가 되었으며,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계속해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첫째 기억에서처럼 폭력을 행사하기 전에 얼굴에 수건은 덮어두는 것이나 아버지와 동일한 망치를 사용하는 것은 그런 아버지의 영향과 폭력적인 성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게 되었음을 보인다. 아버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공은 이 폭력을 납치된 아이들을 구할 때 납치범, 인신매매범들을 상대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폭력이 비록 벗어날 수 없는 본성이 되었지만 이를 어떻게든 이롭게 사용하려는 듯이 말이다. 또한 어렸을 적의 자신과 어머니를 누군가가 구해줬었다면...싶은 욕망이 반영된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자신을 구해줄 '너는 여기에 없었다'라고 제목을 해석할 수도 있겠다. 후반부에 니나를 구하러 건물에 들어가기 전에 토하는 모습을 보아 주인공 스스로도 폭력을 반기지 않아 보인다. 싫지만 트라우마처럼 떨쳐버릴 수 없이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일부이기에. 감독은 관객 또한 이 폭력의 굴레에 빠지지 않게 해주려는 듯, 가능하면 누군가를 살인하는 장면을 쉽게 화면에 보여주지 않는다. 그나마 기억나는 장면은 천장의 깨진 거울을 통해 보는 장면.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사람이 죽어갈 때조차 주인공은 그에게 진통제를 주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손을 잡아주고 같이 노래를 부른다.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강력하게 다가왔던 장면이다. 여러모로 망가진 사람이지만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한 가닥은 놓치고싶지 않았던걸까. 여기서 어머니를 죽인 사람이 어머니를 쏘았을 때 어머니가 자고 있었다고 주인공에게 얘기해준다. 감독이 허투루 넣은 장면이 없다 생각하면 이를 영화 초반에 주인공의 어머니가 집에 들어온 주인공을 놀래키려고 자는 척을 하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당시 주인공의 반응을 보아 이는 어머니가 자주 하시는 장난으로 보인다. 어머니는 죽는 순간에 단지 자는 척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주인공은 알고도 살인자에게 안식을 안겨준 셈이고, 주인공의 본성은 선하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영화 시작에 누군가를 처리하고 나올 때 받은 단순한 첫인상과는 상반되는 이미지다. 자신을 유일하게 반겨주던 사람인 어머니를 잃었다. 초반에 히치콕의 <싸이코>가 자주 언급되는데 이는 주인공이 살인자라는 것 뿐만 아니라 어머니와의 사이가 유독 소중했음을 암시하기도 하는 만큼 이제 주인공은 잃을게 없다 생각하고 니나를 구하러 간다. 하지만 도착한 그 곳엔 니나를 납치했던 주지사가 이미 니나의 손에 죽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니나는 누가 구해줄 필요가 없었단 사실과 자신은 어렸을 적 그러지 못했던 기억이 복합적으로 밀려오면서 그 자리에서 오열해버리고 만다. 자신이 나약하고 쓸데없다면서 말이다. 니나가 어쩔 수 없이 어린 나이에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것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을 것이다. 니나와 함께 식당을 가서 니나가 예고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주인공은 '내가 뭐하러 이러고 있나'싶었는지 총으로 자살을 한다. 그리고 식당에 있는 그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가 모두 주인공 상상이었음을 니나가 돌아오면서 알게 되긴 하지만, 이는 나쁜 일이 있어도 세상은 계속해 돌아간다는 메세지와 주인공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한 번 더 상기시켜준다. 하지만 니나는 아름다운 날이라며 주인공에게 같이 떠나자고 한다. 그들이 떠난 식당 자리를 비추며 다시 영화의 제목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식당의 그 빈자리. '너는 여기에 없었다'라는 말이 처음으로 희망적으로 다가오는 장면이다. 어쩌면 내일도 아름다울지 모른다는 희망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 이를 모두 최소한의 대화와 트라우마/PTSD를 연상시키는 전개와 편집을 통해 이뤄냈다니 실로 대단하다. 짤막하고 순식간에 지나가는 회상 장면들은 런타임에서 몇 분도 채 안될테고, 런타임 자체도 90분 이내로 짧은 편이었는데... 신기하다. 의식의 흐름처럼 썼는데 뭘 이리 많이 썼나 싶다. 결론은 생각해볼 것도 많았고 개인적으로 재밌었던 영화다!
김혜리 평론가 봇
5.0
트라우마의 비범한 영화적 구현
GS
4.0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 -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원제는 'You Were Never Really Here'로 시제가 과거형이다. 과거형의 제목은 오프닝 타이틀의 공표 방식과 연결된다. 위험한 사건을 처리한 주인공 조(易와킨 피닉스)가 택시에 몸을 싣고 떠나는 장면에서 영화의 제목이 등장한다. 보통 영화라면 'You Were Never Really Here' 문장 전체를 페이드 인(FI)&아웃(FO)을 하는데, 이 영화는 한 단어로 끊어서 페이드 인하고, 다음 단어가 페이드 인하면 이전 단어는 페이드 아웃하는 방법으로 제목을 알린다. 그러니까 다음 단어가 등장하면 이전 단어는 사라져 문장이 완성되지 못한다. 이는 과거형의 제목과 상통하는 방식의 오프닝이며, 동시에 파편화된 조의 과거와 유사한 구석이 있다.(하느님을 찬송하는 택시 기사를 통해 오프닝을 종교적인 레퍼런스{신은 여기에 없었다}로도 읽을 수 있다.) - 영화를 보고 나서 '너는 여기에 없었다.'라는 제목을 곱씹으면 결국 너는 조를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는 과거가 된다. 모든 인간은 과거가 있기에 현재의 자신이 존재하는데, 조는 왜 과거를 부정하는 것일까. 왜 과거에 없었어야 하는가. 이 질문의 대답은 파편화된 과거의 플래시백으로 대신한다. 첫 번째 과거는 조의 엄마가 아빠에게 가정 폭력을 당해 두려움에 떠는 과거다. 그리고 두 번째 과거는 조가 군인 시절에 경험했던 참혹한 현장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과거는 아시아 소녀들의 몰살 현장을 목격했을 때다. 이 세 개의 과거가 공유하는 하나의 정서는 죄책감이다. 끔찍한 과거로부터 비롯된 조의 죄책감은 과거의 기억으로만 머물지 않고, 현재의 삶에 연결되어 끊임없이 그를 괴롭힌다. - 가정 폭력을 당하는 첫 번째 과거는 영화 <싸이코>를 보고 두려워하는 엄마로 변주한다. 영화가 무서운 늙은 엄마는 아들 조에게 본인이 잠들 때까지 옆에 있기를 부탁하고, 조는 과거의 엄마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함께 있는다. 조가 군 복무 했던 두 번째 과거는 조직에 살해당한 엄마로 변주한다. 본인이 건넨 초코바로 인해 소녀가 죽자, 괴로워하는 조의 죄책감은 엄마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이어지고, 소녀의 발바닥과 어머니의 발바닥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마지막 세 번째 과거는 길거리에서 아시아 소녀의 사진 촬영 요청으로 인해 다시 상기된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읊조리며 조는 계속해서 방황한다. -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조는 유일한 구원 방식을 자살이라 믿는 존재다. 하지만 조에게는 늙은 엄마가 아직 살아있고, 엄마가 죽은 후에는 니나(易예카테리나 삼소노프나)라는 소녀를 구해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조는 자살하지 못하고, 대신 본인의 흔적을 없애려 한다. 여기서 조는 왜 니나를 필사적으로 구하려 하는가. 이는 니나가 조의 과거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버지의 반인륜적인 행동으로 인해 끔찍한 과거를 겪었으며(겪고 있고), 살인과 자살로 부모를 잃었다. 조가 니나를 보며 느낀 감정은 측은한 마음을 넘어서 과거의 자신을 투영하기에 이른다. 조와 니나는 극 중에서 카운트 다운을 하는 존재다. 카운트 다운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을 내뿜는 무력한 주문이자 기도로 기능하는데, 이들은 동질적인 의미에서 거울로 바라보는 자신과 같다. 아까의 문장을 번복하면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너'는 '조'뿐만 아니라 '니나'에게도 해당하는 셈이다. - 영화는 괴로워하고 분열하는 조를 비정상적인 존재로 묘사한다. 열차와 자동차가 카메라를 가로지르면 조는 사라지고(등장하고), 혹은 다른 각도의 컷을 넣어 이동했음을 암시하는 방식을 통해 환상과 유령에 가깝게 묘사한다. 또한 조가 니나를 구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를 때, 카메라는 객관적 시점을 견지하며 감정을 배제하는 CCTV로 대신한다. 게다가 CCTV 화면을 교차로 편집하여 조의 특정 행위를 명확히 담지 않고, 의도적으로 조의 존재를 불투명하게 만든다. 또한 자신의 거주지를 알아버린 앤젤과의 거래 중지, 보스와 연락할 때는 반드시 음성메세지를 사용하는 행위(통화는 상대와 함께 하는 동시적인 행동이라면, 음성메세지는 일방적인 과거의 행동이다.)를 통해 과거와 흔적 삭제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 그런데 과거와 현재의 간극에서 끊임없이 방황하고 교차하는 조의 존재가 하나로 접합하는 기묘한 순간이 절정-결말 부에서 등장한다. 조가 두 번째로 니나를 구하려고 침입한 호텔에서 플래시백으로만 틈입하던 과거가 명확한 실체처럼 구현되고, 니나가 스스로 구원에 성공한 모습을 목격하는 장면은 과거와의 간극을 접합하는 순간처럼 여겨진다. (이전 장면에서 조의 자탄과 눈물도 같은 범주에서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렇다면 마지막 식당에서 상상 자살을 하는 조의 상징적 청산은 과거를 잊고 아름다운 날을 시작하는 행위가 아닐까. - 영화의 결말을 새드 엔딩으로도 유추할 수 있다. 영화는 녹색과 빨간색의 은유를 자주 사용한다. 녹색은 평화를 상징하는 색상이지만, 빨간색은 핏빛으로 가득한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상징한다. 그런데 녹색 젤리를 좋아하지만 짓이겨버리는 조의 행동과 니나가 녹색 콩을 계속 먹는 장면은 연결되고, 이는 평화로운 내면과 세상을 바라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엔딩에서 조와 니나는 사라졌지만, 테이블에 계속 놓여있는 계산표와 흔적들은 너는 여기에 '없었다'가 아닌 '있었다'는 비극에 가깝다. 무엇이 됐든 영화의 결말 부는 매혹적이고 묘한 정서적 여운을 남긴다. -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과거의 기억을 제공하는 방식 자체가 매우 거칠어 영화가 불친절하게 느껴지지만, 이러한 영화의 문법은 조의 괴롭고 단편적인 과거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으로 읽을 수 있다. 거친 영화를 더욱 증폭시키는 것은 조니 그린우드의 신디사이저 음악과 조 역할을 맡은 와킨 피닉스의 미친 연기다. 이 영화의 일등 공신으로 인정받아 마땅하다. - - https://blog.naver.com/rmatjdwjdals/221370986628 영화 공부를 하며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석미인
3.5
고뇌의 카운트다운을 하더라도 엄마가 부르면 대답하는 사나이. 장도리 원샷 때리는 그런 사나이. 라디오 뚝배기 음악감독이 잡사운드 낭낭하게 넣어줘서 풍미를 살림(여기서 뚝배기는 head 입니다)
이건영(everyhuman)
3.5
삶, 과거로부터 도피와 단절을 향한 끝없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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