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ekong1922

Uncle Boonmee Who Can Recall His Past Lives
Avg 3.5
분미 삼촌은 죽음을 이해했다. 동시에 삶을 이해했다. 먼저 죽음을 앞둔 분미에게는 총 두 가지 일어난다. 사라짐과 나타남. 어느 날 과거의 잘못으로, 미지의 고통과 함께 병든 분미에게 뜬금없이 아내와 아들이 나타난다. 인간의 모습이 아닌, 유령과 원숭이의 모습으로. 삶의 무작위성과 영혼의 욕망이 뒤엉켜 원숭이의 모습이 돼버린 아들. 그리고 분미의 아내 즉, 유령은 불현듯 분미에게 나타나 그의 마지막 나날들을 함께 하려 한다. ‘미래’를 위해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과거’의 모습을 지워나가는 것, ‘과거’에 친구나 소중한 것들을 두고 와 그 과정이 분명 두려울 수 있다. 그렇지만 미지의 고통과 필연적인 고통은, 삶과 죽음은 하나이며 동일하다. 죽고 다시 태어난다. 분미의 아들은 자연의 유혹에 이끌려, 본능에 매료되어 속세를 버리고 자연과 체화되어 나타난다. 자신의 욕망으로, 다른 ‘모습’을 선택하는 것은 그저 자연스럽고, 아름답기까지 한 현상과 수순일 뿐인 것이다. 이에 연장선으로 공주와 가마꾼의 신화같은 이야기를 꺼내 성스럽게 이 수순을 표현한다. 그를 통해 우리와의 거리감을 자아내지만 분미의 아들 또한 이 경험을 했고, 결코 이것은 우리의 일상과 분리된 독립적인 일이 아니라고 영화는 표명한다. 그렇기에 분미는 행복하게(내 생각이다.) 자신이 태어나고, 미지의 고통을 느끼게 해준 동굴에 도착하여, 마지막 나날을 덤덤히 흘려보낸다. 원천에서 수순을 겪는 것이다. 이 지점과 감정은 현재 속세에 머물러 유령의 존재를 겪지 못한 이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아마 딱딱해진 사고로, 그렇다면 결국 우리의 영혼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와 같이 하나로 귀결되는 결말을 원할 것이다. 그런 물음으로 점철될 때 유령은 사라진다. 우리가 아니라. 그에 대한 해결책을 먼저 제시하지 않는다. 분미도 그렇다. 죽음에 있어서, 자신의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가며 젠과 통을 두고 사라진다. 동시에 유령도 사라진다. 젠과 통은 분미를 따라간다. 쫓아간다. 하지만 잡을 수 없다. 이를 통해서 영화는 운명에 잡힐까 봐 달아나도 잡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영혼과 육신을 따로 이탈시켜 방황하며 나의 존재에 대한 지대한 물음을 멍청하게 뒷전으로 치부하기보다는, 그저 병든 나의 몸을 과거에 안착시켜 또 다른 안식처로 영혼을 흘려보내는 것이 어떠냐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 속세를 놓아버린 원시의 상징인 듯한 스님으로 살아가는 통은 역설적으로 그에 차림과 맞지 않게 야식을 먹자고 하고 이성의 집을 넘나든다. 또 폭포가 아닌 속세의 산물인 샤워기에 자신의 몸을 맡긴다. 젠은 자연의 바람이 아닌 에어컨이 만든 인공적인 흐름을 맞이한다. 또 스님의 무소유를 존중하는 자세를 지닌 것 같지만 통의 나체를 궁금해한다. 뭔가 빗나간듯한 두 욕망의 체계를 지닌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듯, 마지막 장면에서 둘은 영혼과 육신 또한 둘로 나누어진다. 분리된다. 그들은 진정 삶에 대해 쫓아가는 것이 아마 불가능해 보인다. 자신의 영혼이 원하는 것과 내가 향하는 곳이 다르다는 걸 인지한 통의 표정과 젠의 모습은 어딘가 처량해 보이고, 두려워 보인다. 그들이 절대 다가가지 못하고, 닿을 수 없는 것들이 떠오른다. 근데 그건 아마 우리도 그럴 것이다. 이뤄내지 못하는 허구의 모습을 위해, 영화를 찾고 있으니까 말이다. 영화와 현실이라는 기로 속에서 갈피를 못잡고 유영하는 모습과 닮아있다. 이를 통해 영화는 우리에게 통과 젠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투영시켜, 두 갈래의 길 중 하나의 모습을 고르라고 한다. 삶과 영혼에 대한 물음이 우리에게 불현듯 ‘나타난다.‘ 어느 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이 하나가 되어 우리의 머릿속에 ’모르겠어‘라는 대답이 떠오를 때쯤, 영화는 ’사라진다.‘ 정글과 언덕 그리고 계곡 앞에 서면 짐승이나 다른 존재였던 내 전생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