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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패배담에서 승리담으로. . (스포일러) <미드소마>엔 첫 숏부터 감독의 인장이 선명하다.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그림 한 폭으로 시작하는 영화의 첫 숏엔 감독의 전작인 <유전>의 오프닝과 궤를 같이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그저 모형인줄만 알았던 미니어처를 정체불명의 시점으로 줌인하여 영화의 극중 공간으로 변모시켰던 <유전>의 오프닝이 우리에게 묘한 불안감을 일으켰던 것처럼 그림을 열어젖히며 시작하는 <미드소마>의 오프닝역시 시점의 주인공을 괄호 치며 또 한 번의 기이한 인상을 자아낸다. 장편영화 두 편 밖에 만들지 않은 감독에게 조금은 이른 분석인지는 모르겠으나 영화의 감독인 아리 에스터의 주제관을 거칠게 요약한다면 아마 다음과 같지 않을까. "이미 결과는 나와 있으니 너네는 벗어날 수 없어." . (다소 이상한 질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전작 <유전>의 제목이 '유전'이어야만 했던 이유, 그건 위에서 아래로 대물림되는 유전이라는 비가역적 성질이 거스를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영화의 중핵과 성질이 맞닿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유전>은 마가 낀 집안 내력을 어떻게든 극복해내려 발버둥 치지만 본인의 운명을 조금도 뒤바꾸지 못한 채 결국에 파멸로 치닫는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유전>에서 인물들의 운명은 이미 영화의 첫 숏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자명한 것이었다. . <미드소마>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관객으로 하여금 의문을 자아내게 만드는 영화의 첫 숏에 등장하는 그림은 사실상 영화의 요약본이라 봐도 무방하다. 중앙을 기점으로 프레임 좌측에 위치한 밤과 프레임 우측에 위치한 낮은 밤의 세계에서 낮의 세계로 이동하는 영화의 플롯구성과 정확히 부합한다. 그렇다면 그림이 열리며 그 안으로 들어가며 시작되는 영화의 두 번째 숏부터는 사실상 처음 보였던 그림의 영상화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영화의 두 번째 숏에 등장하는 뜬금없는 민요는, 아마도 이 두 번째 숏부터 미드소마 의식의 본격적 시작이라는 영화 나름의 선언이 아니었을까.) 이어지는 영화의 내용도 아리 에스터의 주제의식과 가치관을 고스란히 밟아나간다. 크리스티안과 그들의 친구들은 영화 내내 뭔가 이상한 낌새만을 느낄 뿐, 이에 대해 철저히 무력하며 이를 벗어나려 발버둥 쳐보지만 내지인들의 오래된 전통 앞에서 희생양으로 전락되고 만다. 결국 <유전>과 <미드소마>의 공포스러운 분위기에서 묘한 찜찜함이 새어나오는 까닭은 두 영화 모두에 예정된 수순을 밟아나갈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인간군상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 하지만 <미드소마>를 <유전>의 동어반복으로 볼 수 는 없다. 물론 낮과 밤이라는 배경으로 두 영화를 구분짓기엔 그건 너무 피상적인 시각이다. 나름의 답을 제안하자면, 나는 두 영화를 운명의 승패 여부로 구분 짓고자 한다. 먼저 <유전>의 경우, 이건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영락없는 운명의 패배사례다. <유전>의 인물들이 본인들에게 내재된 운명을 통해 득을 본 것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을 테니. 반면에 <미드소마>의 경우엔 사실 의견이 분분할 여지도 있을 것이다. 먼저, 영화를 크리스티안의 입장으로 한 번 바라보자. 본 영화의 중반부에는 첫 숏에 이어 또 한 폭의 그림이 길게 제시된다. 트래킹숏의 시선에 맞춰 그림을 쭉 읽어나가다 보면, 해당 그림이 한 여인이 사랑하는 남성에게 본인의 음모와 생리혈을 먹여 결국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는 내용임을 확인한다. . 영화를 다 보고나면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이건 크리스티안이 미래에 직면하게 되는 사건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또 하나의 그림이 크리스티안의 운명을 암시하는 불길한 징조로서 기능한다. 마크가 실종된 후의 움막에서, 그는 움막의 벽에 그려져 있는 불타는 곰의 형상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로서는 당연히 알 도리가 없지만 곰의 몸에 들어가 불에 타죽는 건 역시 그가 나중에 맞이하게 될 운명이다. 이처럼 영화를 크리스티안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건 <유전>과 마찬가지로 운명패배자에 대한 기록으로 귀결된다. . 허나 개인적으로는 <미드소마>를 <유전>에 이은 또 하나의 운명패배담으로 읽고 싶지 않다. 왜냐면 <미드소마>의 주인공은 크리스티안이 아닌 대니이니까. 이제 대니의 입장에서 영화를 바라볼 차례다. 그렇다면 대니는 과연 운명의 게임에서 승리했는가, 만약 그렇다면, 대니는 어떻게 승자가 되었는가. 이어지는 글은 이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 될 것 같다. . 영화는 프롤로그서부터 본 영화가 대니의 영화임을 분명히 한다. 영화의 프롤로그에서 우리가 대충 어림짐작으로 후의 스토리전개에 대해 단초 삼을만한 설정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대니와 크리스티안의 위태로운 애정전선, 그보다 더 위태로운 대니의 심리상태, 그러한 상태의 원인인 가족의 죽음. 기존 호러물의 초반설정과는 완전히 판이한 듯 보이는 이러한 설정들은 메인 플롯 내에서 과연 어떻게 회수될 것인가. 영화는 이 모든 설정들을 프롤로그와 정반대되는 세상에 인물들을 몰아넣으며 해결한다. 마침내 대니와 크리스티안의 일행들이 펠레의 고향에 방문하게 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도로를 질주하는 차를 180도 회전하는 앵글로 담아낸다. 말 그대로 180도 정반대의 세상에 인물들이 입장중임을 카메라가 몸소 부언하고 있는 셈이다. . 이어지는 장면들에서 여러 설정들이 이러한 전환을 강조한다. 백야현상, 뒤로 걷는 사람들, (좌에서 우로 읽게 만들어진 첫 숏의 그림과 달리)우에서 좌로 이동하며 그림을 비추는 숏 등등. 무엇보다도 개개인의 자유보다는 공동체의 권익을 우선시하는 집단의 성향자체가 이전에 대니가 속해있던 곳과의 가장 큰 차별점일 테다. 이처럼 이전과 매우 상이한 영화의 환경은 대니의 급진적인 변화를 촉발시킨다. . 새로운 공동체가 대니에게 어떻게 변화를 가져다주었는지를 따지기 전에 관객에 따라서는 도대체 마을에서의 일과 그 이전에 대니의 일이 무슨 상관관계인지를 궁금해 할만도 하다. 엄밀히 따지자면 가족을 잃은 슬픔과 남자친구와의 권태로운 감정이 마을에서의 일과 인과적인 논리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으니까. 이러한 헐거운 양자 간의 연결을 그럴 듯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극도로 불안한 대니의 심신미약 상태다. 펠레가 대니에게 유감의 감정을 표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발작에 가까운 리액션을 보이며 화장실로 반사적으로 달려가는 대니의 모습을 미래 시제인 비행기 내에서의 모습과 곧장 엮어낸다. 지속되는 인물의 충격을 고스란히 수반하는 편집에 이어 영화는 실컷 울고 온 대니를 위로하는 크리스티안에게 다가가는 듯싶더니 요동치는 기체 바깥으로 줌인한다. 평온한 기체 내부와 정반대되는 기체 외부의 요동을 통해 우리는 대니에 대한 크리스티안의 위로가 대니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한다. . 이어지는 장면에서도 위태로운 대니의 상태는 여전하다. 너희가 가족 같다고 말하는 펠레의 무의미한 대사에서도 대니는 가족이란 대사에 급격히 발작한다. 그녀가 약기운에 몸을 맡긴 채 질주한 어느 실내에서도, 그녀는 뜬금없게도 가스통을 물고 있는 동생의 형상을 마주한다. 현재의 그녀는, 세상 어디에 있든 본인의 개인사로부터 속박되어 있는 인물이다. . 이처럼 겉으론 대니의 개인사와 마을에서의 에피소드가 무관해보일지 모르겠지만 대니는 모든 일을 본인의 사례로 번안시켜 이를 받아들인다. 정황상 애인을 두고 먼저 떠난 남자로 보이는 이에 대해 크리스티안이 별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그럼 너도 그럴 수 있겠네.”라며 싸늘하게 받아치는 대니의 대사가 단적인 예시다. 언뜻 보기엔 서로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지만 지금의 대니는 그러한 인과론을 무시할 만큼 위태롭다. 그렇다면 그토록 불안하던 대니는 이 새로운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변하였을까. 먼저, 대니와 공동체 서로가 처음부터 서로에게 호의적이었던 것 같다. 모두가 심심함을 표하며 마을에 입장하는 와중에 오로지 그녀만이 웃음을 지으며 발을 내딛는데, 영화는 이를 놓치지 않고 마을에 대한 그녀의 첫인상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준다. 이어서 약을 한 상태인 그녀의 몸에 돋아나는 풀잎들은 공동체에 쉽사리 동화될 그녀의 운명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녀의 살가운 첫 미소에 대한 공동체 나름의 반가운 화답이 아니었을까. . 이처럼 공동체와 개인 상호간의 호의가 맴도는 와중에 대니에게 큰 충격과 혼란을 야기하는 에피소드가 불쑥 등장한다. 72번째 생일을 맞아 투신하는 노인들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그녀는 혼자 무언가에 씐 듯 그들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해당 사건의 충격 포인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노인의 투신, 그리고 실패한 자살을 완결 짓는 이들의 망치질. 짓이겨진 노인의 참혹한 얼굴은 텍스트 내에 있는 대니의 입장에서 그다지 놀랄 것이 없다. 그건 호러 장르의 섬뜩함을 기대한 텍스트 밖 관객을 위해 마련된 이미지니까. 아무튼, 대니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본인만의 방식으로 해석했을까. 그녀에게 진정 충격을 가져다 준 이미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 관객의 입장에서 혼란스러운 와중에, 아리 에스터의 훌륭하고도 친절한 연출이 이를 효과적으로 설명한다. 투신과 망치질이라는 두 번의 참혹한 순간에서, 영화는 이를 모두 롱숏으로 관조하며 사건의 충격을 역으로 부각한다. 그러던 와중에 영화 스스로 이건 충격의 순간 중에서도 단연 으뜸가는 충격의 순간임을 몸소 강조하는 모멘트가 있다. 바로 어떤 남성에 이어 젊은 여성이 투신에 실패한 노인의 얼굴을 망치로 내려치는 순간. 그 순간 카메라는 눈에 띄게 상하로 진동하여 그녀의 심리적 충격을 몸소 가시화한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앞서 말했듯이)분명 여성이 노인을 망치로 내려치기 전에 이미 한 남성 역시 노인을 망치로 내려쳤는데, 왜 그녀는 두 번째 여성의 망치질에 그토록 당황했던 것일까. 이 역시 모든 일을 본인의 사례에 적용시켜 판단하는 대니의 현 상태의 연장이다. . 첫 번째 남성의 망치질이 아닌 두 번째 여성의 망치질에 그녀가 크게 심리적으로 동요했다는 것에서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를 유추할 수 있다. 그건 바로 대니가 진정 놀란 것이 남성의 망치질이 아닌 ‘여성’의 망치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첫 번째가 아니라 구태여 두 번째에 충격을 받게 하는 영화의 설정은 우리로 하여금 대니의 충격의 근원이 망치질이라는 행위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젠더에 있음을 추측케 한다. 풀어서 말하면 대니가 그 순간 그토록 강렬한 인상을 받은 까닭은 망치질을 한 여성에 본인의 동생을 대입했기 때문이다. 잠시 간과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죽은 인물들이 노인이라는 것. 그것도 마치 짝이라도 맞춘 듯 남과 여로. . 그렇다면 늙은 남성 한 명과 여성 한 명이 자살하고, 그 자살에 마침표를 찍은 한 여성이 있다는 스웨덴 한 작은 마을의 사건은 대니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이는 대니에게 프롤로그에 가족이 몰살된 사건을 강력하게 상기시킨다. 노인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완성시키는 젊은 여성. ‘가족’이란 단어 하나에 크게 흔들리는 대니가 이처럼 노골적인 키워드를 본인의 사례로 번안하지 않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 해당 사건은 대니의 치유과정의 첫 걸음이라 봐도 무방하지만 우선 해당 사건이 대니에게 당장의 고무적인 효과를 불러온 것이라 보기는 다소 힘들다. 말 그대로 해당 사건은 당시의 대니에게 그저 충격과 혼란일 뿐이다. 사건의 충격이 남긴 여파를, 그녀가 단번에 그녀 방식대로 해석하고 치유의 과정으로 승화시키기엔 앞서 거듭 말했듯이 그녀의 내면은 너무나도 위태롭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녀는 혼란에 겨운 나머지 이유모를 눈물을 흘리며 마을을 떠나려고까지 한다. 영화는 꿈이라는 형식을 경유해 그녀의 치유를 보여준다. 한 밤중의 꿈에서 그녀는 떨어진 여성의 얼굴이 어머니의 얼굴로 교체되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녀의 입엔 동생이 자살로 사용했던 도구인 가스호스의 가스가 분출되고 있다. . 추측컨대 이때의 꿈은 대니가 마음을 추스린 뒤 해당 사건을 본인의 사례에 적용시킨 것 같다. 우선, 시종 낮의 화면만 제시되던 마을에서 대니의 꿈으로 넘어가자 갑자기 밤의 배경이 제시된다. 이는 호러장르의 음산한 분위기를 위해서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대니가 본인의 꿈에서 그 사건을 완전히 본인의 케이스로 변환시켰음을 방증하기 위해서다. 대니의 가족은 어두컴컴한 밤의 배경에서 죽었으니까. 그렇다면 자연스레 뒤따라오는 질문들. 그녀가 동생대신 가스호스를 문 까닭은 무엇일까. 관객의 능동성이 요구되는 부분이라 완전한 답은 없겠다만 어쩌면 그녀는 순간 동생의 입장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추가적으로 그녀가 동생의 입장이 되어서 이해한 것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이 꼬리로 따라온다. . 여기서 아리 에스터 특유의 주제의식인 운명론을 간과하기 힘들다. 앞선 마을의 노인들은 스스로 죽음을 향한 의지를 동반한 채 절벽에서 낙하했다. 후의 망치질은 이미 예정된 죽음을 보다 편안히, 그리고 좀 더 빠르게 진행시킨 하나의 마무리에 불과했다. 어쩌면 대니는 부모가 죽는 것은 어차피 언젠가 일어날 필연의 결과였고 동생의 가스 테러는 그저 예정된 죽음을 마무리시킨 부차적인 행위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던 게 아닐까? 즉 그녀의 꿈은 심신의 안정을 위한 내적 합리화의 시각화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대니는 운명론을 체득하며 스스로를 위무한다. 마침내 대니가 자가치유의 길을 찾았다면. 이제 그녀에게 필요한 건 그녀를 품어줄 새로운 집단으로의 귀속이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는 새로운 가족을 찾는다. 과연 어떠한 과정들이 그녀를 새로운 집단에 금세 융화시켰을까. 이쯤에서 앞서 언급한 대니와 크리스티안의 위태로운 관계를 다시 언급하면 좋을 것 같다. 프롤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다시피 연인관계에 갑을이 있다면 그녀는 철저하게 관계의 약자다. 서로간의 대화를 주도하는 건 더 많은 애정을 갈구하는 그녀이며 상대의 잘못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관계의 원만한 유지를 위해 용서를 비는 것 역시 그녀이다. . 그녀가 그와 헤어지기 위해선 두 가지가 필요하다. 명분, 그리고 (명분보다 더 중요한)위태로운 그녀를 받아줄 곳. 후반부의 변태적 면모와 기괴함은 이 둘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영화의 후반부인 여왕선별전에서, 그녀는 춤을 추는 도중에 생전 사용한 적이 없는 스웨덴어를 일시적으로 터득한다. 앞서 마을에 입장할 때 그녀가 마을을 향해 웃음 짓자 마을의 환경이 그녀의 몸에 풀을 돋아나게 한 것과 반대로 이번엔 마을이 그녀의 몸에 먼저 풀을 돋아나게 하자 그녀가 마을의 언어를 구사하며 이에 화답한다. 그렇게, 그녀는 점차 공동체에 동화된다. (단순히 이 두 번의 경우를 약물이 불러일으킨 환각증세로 치부하기는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 약물은 그저 초현실적 묘사에 대한 나름의 개연성 정도로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마침내 그녀가 여왕으로 선별되자, 또 한 번의 초현실적 이미지가 등장한다. 여왕이 된 직후의 퍼레이드에서,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녀의 앞으로 죽은 어머니가 슥 지나간다. 죽은 어머니의 혼령이 마을 집단에 스며드는 순간, 그녀의 상실감은 서서히 메꿔지며 이제 공동체에 대한 그녀의 호의는 정말 이곳에 머물러도 좋지 않을까라는 묘한 안정감으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허나 아직은 부족하다. 그녀에겐 조금 더 강력한 심리적 동인이 필요하다. . 영화에서 가장 기괴한 장면 중 하나인 크리스티안이 씨내리의 역할을 수행당하는 장면이 바로 대니의 명분이 된다.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지만, 그의 외도 아닌 외도를 목격하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그와의 만남을 이어나갈 수가 없다. 연인이 다른 이성과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목격한 것, 연인사이를 마무리할 명분에 있어서 이것만큼 강력한 사건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녀의 명분은 공동체에 대한 그녀의 확신으로 연쇄된다. 역시 기괴한 장면이 연속된다. 복잡 미묘한 감정으로 오열하는 그녀를 향해 공동체의 동료들은 함께 목청껏 울부짖어준다. 한 발 떨어진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우습기 짝이 없지만 중요한 건 대니의 심리다. . 관객의 시선에선 코미디에 가까운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퍼포먼스에 대니는 진정으로 위안을 받는다. 프롤로그에서 가족을 잃은 그녀가 엉엉 울음을 토해낼 때 크리스티안은 무덤덤하게 그녀를 토닥여줄 뿐이었다. 그리고 카메라는 바깥의 폭설 현장으로 줌인하며 이미 식을 데로 식어 차갑기 짝이 없는 둘의 관계를 조소했다. 그녀와 함께 오열한 이들의 눈물의 진실성이 어떻던, 공동체의 비이성적인 마력은 그녀에게 확신을 선물한다. 그녀에게 절실했던 건 공감이었다. 스웨덴의 이 이상한 공동체는 대니에게 세상에서 가장 변태적이고 기괴한 공감을 선물한다. 이곳에 정식으로 속해도 되리란 확신이 생긴 그녀는 크리스티안과 익명의 공동체 구성원 1명중 희생의 제물로 바쳐질 이로 크리스티안을 지목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생일 케이크 촛불조차 붙여주는데 실패했던 그가 불에 활활 타죽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는 미소 짓는다. 새로운 집단에 귀속되었다는 편안함, 속 시원한 이별을 맞이했다는 해방감, 상실의 트라우마를 치유했다는 안정감, 이 모두가 내포된 미소를. . 모든 것이 파멸로 내정돼 있는 아리 에스터의 세계관에서, 그녀는 어떻게 유일한 승자가 될 수 있었을까. 공동체의 성질로 유추해보고 싶어진다.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나이부터, 물려받을 이름까지, 더 나아가 오래 전부터 이어온 의식의 규칙까지. 모든 게 미리 결정되어 있는 호르가 공동체는 아리 에스터의 운명론적 세계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심지어 그들은 인생이 순환한다는 나름의 운명론까지 믿고 있다.(당연한 얘기지만 이를 감독의 인생관과 직접적으로 연결 짓는 건 어폐가 있는 귀결이다.) . 이런 운명의 극단인 공동체에서 크리스티안을 비롯한 나머지 일행들은 이를 거스르려 애쓰다 모두 같은 처지에 이른다. 마치 <유전>에서의 인물들처럼. 운명의 공동체와 서로 상보관계를 맺으며 공동체에 가장 잘 융화된 모습을 보인 대니만이 유일한 생존자이자 승자가 되었다는 건, 현재까지 아리 에스터의 영화에서 본인의 운명을 정직히 수용하며 기꺼이 그 광기어린 여정에 몸을 맡긴 인물만이 살아남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살아남은 것은 덤에 불과하고, 그녀는 본인을 둘러싼 모든 부정적 요소를 이 운명의 공동체를 통해 떨쳐낸다. . 꽤나 전체주의적 태도로 일관하는 구성원들의 태도와 그런 전체주의적 성향으로 트라우마를 치료받은 인물을 전면에 내새웠다는 점을 보면 이 영화에 파시즘을 옹호하는 감독 개인의 성향이 내재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러한 비판은 굉장히 기계적인 동시에 소모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미드소마>는 어디까지나 호러의 범주에 속한다. 우리는 호러를 보며 윤리적 가치판단을 할 필요가 전무하다. 이건 <시계태엽오렌지>와 같은 사회윤리드라마가 아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질문들, 악으로 또 다른 악을 교화시키는 건 윤리적으로 올바른가, 그게 애시당초에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등등의 윤리적 질문들. <미드소마>는 애초에 이러한 질문을 하는 영화들과 궤를 달리하는 장르물이다. 우리는 그저 단순히 호러의 즉각적인 즐거움을 만끽해도 좋고 대니를 타자화하여 악의 세력으로 정화된 무시무시한 안티히어로로 바라봐도 좋다. 단언컨대 <미드소마>는 치유물이다. 다만 이상적인 치유의 형태를 제시하진 않는다. 세상에는 이렇게 뒤틀리고 저속한 형태의 치유또한 존재할 수 있음을 또렷이 알려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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