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으로의 맹목적인 욕망이 바라는 바를 대체했으니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다. 90년대 외국 자본이 거침없이 밀려들어오는 대만 사회를 다국적인 등장 인물을 통해 처음부터 적시한 영화는 욕망에 가득찬 젊은이들의 거짓된 행동들을 보여주며 파국을 향한 균열로 잠식해간다. 오로지 속이는 자와 속는 자의 이분화로만 표상되는 사회의 일면은 그러나 그 속에서도 바라던 바가 무엇인지 회의하는 이를 통해 의문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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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믿었던 두 젊은이는 속는 자의 위치에 서게 될 때 그들의 욕망이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 앞에서는 결국 무력할 수 밖에 없음을 깨닫고 좌절한다. 그들의 자멸적인 분노의 폭력과 자괴적인 슬픔의 오열은 속이는 자를 대변했던 아버지의 자살과 대비되어 자본 앞에 나약할 수 밖에 없는 개인의 층위를 강화시킨다.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아버지의 죽음은 아버지의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살았던 그들의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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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화는 그런 그들의 현재를, 바라던 바를 회의했던 한 젊은이의 지금의 선택을 통해 일말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무지의 화면 속에 울음에 이어지는 웃음으로 현실에 대한 절망적인 통렬함을 이끌었던 서사는 그로 인해 다시 전환된다. 적어도 자본을 향한 맹목적인 욕망이 아닌 사람을 향한 보편적인 사랑이 보다 바라는 것에 가깝다는 영화의 윤리적인 판단이 냉혹한 현실 속에 얼마나 힘을 얻을지 망설여지지만, 그럼에도 속고 속이는 자가 아닌, 종속하고 종속되어지는 관계가 아닌, 대등한 사람과 사람으로서의 하나를 추구하는 대만 남자와 프랑스 여자의 키스는 그 자체로 숭고하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말해진대로 양기를 뺏기는 지배의 몸짓이 아닌 또한 영화 속에서 다시 말해진대로 그 무엇보다 사랑을 통해 하나 되는, 당연한 몸짓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