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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일

오세일

10 months ago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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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nfer

Movies ・ 1994

Avg 3.6

시퀀스가 넘어갈 때마다 점프 컷과 함께 짧은 검은 화면이 섬광처럼 돌출된다. 이는 마치 스스로 기억을 조작하는 폴의 정신 이상을 시각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클로드 샤브롤의 의도처럼 읽히며, 때문에 영화의 후반부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지옥)를 현실이라 믿는 폴의 방황에 확신을 얹어준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뒤 다시 생각해 보면, 샤브롤은 넬리가 외도를 하지 않았다는 '진실'을 극 중 어디에도 심어두지 않았다. 결국 폴이 자가 생성해 낸 외도의 이미지들은 현실과 거짓 사이의 간극에 애매하게 걸쳐지며, 끝내 관객들은 이 미스터리한 이야기의 진실을 마주할 수 없게 된다. 영화의 단편적인 전개만 바라본다면 폴의 착각으로ㅡ거의ㅡ확신되지만, 그것조차 샤브롤이 설계한 함정일 수도 있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지옥>이 무서운 영화인 이유이다. 히치콕의 영향 아래에 있는 감독들은, 모두 다 팜므 파탈적인 여성 캐릭터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나 보다. 브라이언 드 팔마는 제목부터 <팜므 파탈>인 작품이 있고, <지옥>에서의 넬리 또한 온 육신을 매혹으로 두르고 있는 피사체가 아니던가. <지옥>은 <현기증>과 마찬가지로 심리의 불안정함이 이끌어내는 환상의 세계가 제시되지만, 동시에 대치되는 요소가 눈에 띄기도 한다. <현기증>의 스코티는 여성(매들린)이라는 타자에 대한 복합적인 호기심이 스토킹의 원천이지만, <지옥>의 폴은 아내의 외도에 대한 의심이 우선시된다. <현기증>에 비해 직선적인 심리 탐구이지만, 기필코 의심으로 시작된 불신 지옥의 끝을 보겠다는 샤브롤의 광기가 대단하다. 누벨바그와 히치콕의 스타일을 적절히 조합하면 <지옥>과 같은 결괏값이 나오는 것일까. 영화 촬영 카메라로 호텔의 사소한 일상들을 기록하는 직원. 그 직원은 이따금 자신이 촬영한 영상들을 호텔 손님들에게 필름 상영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상에서 폴은 애써 외면하던 이미지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아내의 외도 사실을 확신하게 만든, 다른 남자와 보트를 즐기던 넬리의 모습. 폴은 힘겹게 그때의 이미지를 기억 속에서 지워보지만, 직원의 영상을 통해 또다시 각인된다. 그 영상이 하나의 '영화'라는 개념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면, 그 순간 관객들은 혼란에 빠진다. 먼저 폴의 착각으로 인해 생성된ㅡ혹은 생성되었다고 생각한ㅡ첫 번째 이미지가 스크린에 새겨지고, 이내 다시 직원의 영상(영화)을 통해 '보트 이미지'가 학습된다. 그렇다면 관객들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 폴의 이미지, 넬리가 주장하는 결백, 직원의 영상 속 이미지. 결국 <지옥>에서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