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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빈

이승빈

6 years ago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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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Young and the Damned

Movies ・ 1950

Avg 3.9

Oct 11, 2019.

먼저 스스로를 다큐적이라며 규정하고 시작한 픽션영화의 카메라에, 민중이 반응하거나 또는 막상 반응하지 않는 차이의 유형들이 가시화되며 흥미롭게 다가와요. 이를테면, 카메라의 거리에 따라서, 원경과 중경, 근경에서 카메라와 민중의 관계가 달라지죠. 단순한 도식화는 위험하지만, 기억을 복기하는 차원에서 개인적인 인상의 단편들을 적는다면: "원경" 빈민가 너머 무대의 경계장치가 되는 고가 고속화 도로, 그 위를 유유히 지나는 자동차 모빌리티. / "중경" 부잣집 아이들이 타고 있는 회전목마를 돌리는 빈민가 아이들, 선만으로 이루어진 공사 현장 구축물 아래에서의 폭력과 살해. / "근경" 카메라의 방향으로 향하는 인간 투우, 카메라를 직시하고 카메라에게 달걀을 던지는 주인공. ... 등등. 거리의 갭에 기인한 차이들의 사이에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멕시코적 내지는 민중적인 희망을 찾게 되어요. 전후 1950년의 멕시코시티의 배경에서라면, 멕시코적 맥락이든 민중적 맥락이든 무엇보다 계몽주의를 그 방법으로 희망을 찾으려는 관객들이 상당히 많았겠죠. 그런데 그렇다고 [잊혀진 사람들]이 계몽영화일까요? '그' 루이스 부뉴엘이 스스로 자신한 멕시코 시기의 대표작이 계몽영화라면 그건 다소 당황스럽죠. 희망을 찾으려는 당대 관객의 반응을 미리 염두에 두고 계몽주의를 전면에 부각하는 구체적 부분(예를 들어 계몽주의자 교장과, 계몽주의적 내레이션)을 생각해볼 때, 이는 되려 본작을 단지 계몽영화라고 보기 곤란해지는 지점일 수 있어요. 영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의 한 사람일 부뉴엘이라는 이름을 애써 고려하지 않더라도요. 이 영화에서 계몽적 요소들의 배치는 정말로 이질적이고 과잉되게 이상하니까요. 계몽적 요소들은 리얼리즘과 초현실주의의 사이에 있기보다는 따로 어색하게 떠다니죠. 이는 계몽영화에서의 연출의 실수라기보다는, 계몽영화가 아닌 작품의 의도된 부유나 소격에 가까울 거에요. 그렇다고 이 영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아니에요. 단지 희망이 계몽주의적 표면과는 분명 다른 것일 수 있겠죠. (여기서 다시 부뉴엘의 이름을 고려해보게 돼요. 부뉴엘이 아나키스트 예술가였다는 개별작품 외적일 정보를 다시 한번 상기해본다면 본작, 특히 결말부에서 말한 희망의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