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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맹

상맹

5 years ago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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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e de Jour

Movies ・ 1967

Avg 3.5

완벽합니다..... 요새 유럽의 영화제를 휩쓸고 있는 부르주아나 계급과 같은 맑스를 중심으로 한 좌파 논의 영화는 사실 장 르누아르나 60-70년대에 있었던 영화들이 이미 다 끝내놓은 것 같다. 이 걸 보니까 나다니엘 블레이크나 기생충 등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메세지와 그 복잡함은 거의 논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일단 그리고 내가 연구하고 있는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나온 자본주의, 도시 그리고 산책자인 플라네르를 넘어 디지털 플라네르에 대한 논문에 덧붙여도 전혀 손색없는 영화다. 3B 중 부뉴엘, 베리만님은 이미 제 위시리스트에 합격입니다. 브레송님 기대합니다...... 진짜 ㄹㅇ 고전좌파영화라 배운거 투영하면서 지적허영감 풀만족. 미쳤다. 진짜 꿈과 현실을 가르는 연출부터 의상, 편집, 구도, 음악, 메세지, 밀도, 깊이 뭐 말해 뭐하냐. 그냥 다 완벽하다. 1시간 40분동안 다 때려박았다. 김기영을 비롯해 김기덕 최근 봉준호까지 그리고 유럽에 다르덴 형제나 최근 뭐 켄 로치 등등 그냥 이미 다 했던 메세지의 변주였다고 까지 생각이 들었다. 아직까지 좌파담론이 마르크스에 머물러 있는 것도 여전히 슬프고 존재론적 전회나 ANT 혹은 데리다, 들뢰즈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메세지와 기의를 담은 새로운 좌파 영화가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도 슬프면서 예술의 미래를 기대하게 된다. 하나하나 느낀 점을 적어보면, 사실 도시는 가능성의 도시이다. 군중 속에 숨어 개인은 누구나 될 수 있고 누구나 될 수 없다. 그 가능성을 부여해주는 돈이라는 매개만 있다면. 그리고 우리는 그 가능성을 사기 위해 노동한다. 그래서 부르주아들은 가능성의 영역이 많이 열려있다. 그렇기에 안정적인 가정과 부유한 환경에서는 필연적으로 권태라는 것이 생성될 수 밖에 없고 그 권태는 일탈을 꿈꾸게 만든다. 부르주아의 위선을 욕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주체의 분열은 주체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상품과 가면들 그리고 문화들로 만들어진 당연한 것이다. 그에 반해 마르텔로 대변되는 하위계급은 주체를 하나밖에 가지지 못 한다. 그렇기에 여러가지 가면을 쓴 세브린느에게 본명을 물어보지만 그녀는 거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밑바닥 남자들과 관련된 주제로 영화들이 나오는 걸지도 모른다.,그 가면 하나에 목숨을 걸어야하기에. 또한 잇퐁 또한 기표를 넘나드는 부르주아 산책자이기에 그 장소에 맞지 않은 가면을 쓴 세브린느와의 잠자리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이다. 도시와 부르주아의 분열된 주체를 아직 배우지 못한 학생으로서의 세브린느는 자꾸 일탈을 꿈꾸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그렇기에 결말에 한 가정을 보필하게 된 세브린느는 중학생 교복을 입을 수 밖에 없던 것이다. 마지막 결말은 의미 심장하다. 결국 근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에서 남성은 주체를 유지할 수 있지만, 여성은 보조적인 역할로서의 노동을 수행했었다. 그렇기에 남편은 직장과 경제라는 곳에서 주체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노동에서 소외된 세브린느는 그렇지 못하고 주체의 분열을 거듭했다. 결국 주체의 분열을 거듭한 결과 관계는 역전되고 만다. 결국 가정의 주인은 세브린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주체의 분열을 누설한 결과 서로의 가면들을 모두 포용하고 시작되는 진정한 사랑. 그렇다면 웹이라는 도시에서 수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산책하는 디지털 플라네르인 우리는 무엇인건가. 이제는 당연한 주체의 분열과 위선이라면. 그런 사람들이 가진 가능성들은 무엇인가. 누구는 여전히 한물간 주체의 회복을 외치며 위선을 비웃는데만 급급하다. 그리고 자신의 계급을 깨닫고 현실을 깨달으라며 공부를 요구하지만 그런 계몽주의적인 사상은 이미 반지성 반이성주의가 만연한 탐닉적인 나에게는 꼰대같이 들린다. 아즈마 히로키는 산책하며 기표를 넘나드는 사람들이 만드는 오해 가득한 우편적 연대라고 말한다. 가장 짧게 왔다 사라지지만 그 범위는 국경과 현실을 넘나들며 저 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반짝거리다 사라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