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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ttt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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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years ago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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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

Books ・ 2015

Avg 2.8

이들이 읽은 책을 추천받으려고 했던 목적 이상의 글귀를 얻어간다. - p.59 / 잠들지 않은 꿈 때문일까 (박현주) 긴 세월이 흐른 뒤에야 우리는 아마 깨닫게 된다. 어떤 말로 붙들어 맨 관계도 변한다는 것을. 그러기에 오래전에 우리는 하고 싶은 말을 삼켰으리라. 불확실의 허들은 너무 높아서 확실성의 결승점까지 다다를 수 없었다. 어느 비 내리고 바람 부는 날에는, 과거에 스쳐 보낸 어떤 이들의 얼굴이 유령처럼 돌아온다. 대부분은 말하지 않았기에 이제 와서는 다행이라고 안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정말로 진실한 어떤 것은 세상 그 누구도 모를만큼 불확실한 상태에서 절대적인 확실을 획득한다. 가끔은, 어쩌면 단 한 사람이 있기도 한다. 확실한 선언만을 인정하고 연애의 가정법을 믿지 않은 여자에게도, 말없이 만약으로만 존재하는 사람이 있다. 그때 용기를 더 내서 말했더라면 어떠했을까 상상하게 되는 사람이 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나 자신에게도 소리 내어 말하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해서 좋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마음속의 구리 광산에 묻혀 있다가 반세기만에 다시 만났어도 깨끗한 시체처럼, 한참 후에 되살려 보아도 여전히 과거의 모습 그대로 깨끗하게 돌아오는 사람이 있다. - p.130 / 가스등이 어두워질 때 (이도우)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평생 우정을 나눈 친구라 하더라도, 인간관계는 수평을 이루기가 아주 힘들다. 관계에는 역학의 부등호가 있어서 한쪽이 좀 더 우위에 있고 다른 한쪽이 더 배려하게 돼 있다. 언제나 자기를 희생해 더 사랑하는 사람, 더 아껴 주는 사람이 있지 않던가. 그들은 밀고 당기는 힘의 관계에서 기꺼이 주도권을 내어 주기 때문에, 상대방은 이들의 선하고 약한 마음을 때때로 조종하기도 한다. 그것이 악의나 숨은 의도를 지니면, 언제나 낮은 의자에 앉은 캐서린 같은 인물에겐 지옥이 시작되는 셈이다. - p.156 / 가장 어려운 예술은 사랑이니까 (김민정) 그렇게 여자와 남자는 자잘한 눈송이가 쏟아지는 하늘가에 제 눈들을 그 눈들 속에 섞었다. 내리는 눈을 보며 눈이네, 하는 말. 내리는 비를 보며 비네, 하는 만큼 당연한 말인데도 여지없이 튀어 나가고 마는 말. 그만큼 진실해서 더없이 예쁜 말. 그래서 언제 들어도 지치지 않는 말. 눈이네, 라고 말하는 순간 여자의 심장은 뜨거워졌다. 사랑해, 라고 말하는 순간과 무엇이 다르니, 라고 묻는다면 저도 모르게 달궈진 제 얼굴을 침묵으로 고스란히 들킬 요량이었다. 남자는 수명을 다해 꺼지기 직전의 알전구 속 필라멘트처럼 꺼졌는가 싶다가도 켜지고 켜지는가 싶다가도 꺼지기를 반복했다. 이해하는 마음이야말로 사랑이 아니겠냐며 여자는 되레 남자의 침묵을 견뎠다. 여자는 희고 남자는 검었다. 바둑을 두려고 만난 사이가 남녀는 아니라지만 때로 사랑은 치밀하게 바둑알을 놓는 수 싸움 같은 것이라서 여자는 초겨울 능의 색을 고스란히 껴입은 단단하고 네모진 바둑판을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했다. 그때 여자와 남자가 무엇에 홀려 그 눈송이들과 함께 죽은 자들 사이를 걷지 않을 수 없었는지...모르겠다. 다만 여자와 남자는 ‘눈’이야말로 겨울의 ‘시’가 아니겠냐는 사실 한 가지만을 분명히 공유한 사이였다. 설명 불가결의 그것, 무수한 억측 속의 그것, 그 시라는 밧줄의 양끝을 붙든 채 여자와 남자의 줄다리기는 계속됐다. - p.177 / 사랑의 시대 (박준) 사랑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명확하지 않다. 연애를 처음 시작한 날을 기억하고 100일, 200일, 1000일 등을 기념할 수 있지만 사랑이 처음 시작된 날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연애는 상대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자라나 있을 때 시작되는 것이므로 연애의 시작은 사랑의 시작보다 늘 한발 늦다. - p.180 / 사랑의 시대 (박준) 상대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그 누군가’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 혹은 지금 내가 받고 있는 그 사랑이 과거 ‘그 누군가’가 받았던 것이라거나, 훗날 다른 ‘그 누군가’가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로 사랑을 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은 곧잘 상한다. 하지만 생각을 한 번 더 깊이 가져가 보면 그리 억울해 할 일은 아니다.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대상은 ‘그 누군가’가 아니라 사랑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가장 즐거웠던 한 시절을 떠올려 보면, 그때 우리의 눈앞에는 더없이 아름다웠던 연인이 웃음을 내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 연인의 정한 눈동자에는 스스로의 모습이 설핏 비쳐 보인다. 어쩌면 우리가 진정 그리워하는 것은 과거 사랑했던 상대가 아니라, 상대를 온전히 사랑하던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상대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은 감정을 ‘사랑’이라 부를 수도 있겠으나, 내가 나에게 유일해지고 싶은 감정은 ‘사랑’이라는 말이 아니라면 부를 방법이 없다. - p.190 / 나는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진다 (김중혁)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낮은 확률인 셈이다. 어떤 사람은 그걸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노력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냥 지나쳐 버린다. 확률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사랑에 대한 태도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