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ent
Liemoon

Liemoon

3 years ago

3.5


content

각각의 계절

Books ・ 2023

Avg 3.6

Jun 29, 2023.

일전에 읽은 <하늘 높이 아름답게>를 제외하고 <사슴벌레식 문답> <무구> <기억의 왈츠> <깜빡이> 순으로 좋았다. 하루 동안 함께 여행하는 모녀의 이야기를 다룬 <실버들 천만사>는 두 사람의 관계가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져 이입이 어려웠고,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의 경우 하이퍼리얼리즘적 요소를 살려 조금 더 현대적으로 그렸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옛스럽다는 인상이 가장 강한 단편이었다.) 엄마와 이모를 지켜보는 두 자매의 이야기 <깜빡이>에는 이모를 대하는 엄마의 태도가 한순간 차갑게 식어버리는 지점이 서늘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서늘함 안에서 자매는 대충 취하다 말지 않을 것, ‘윤서방‘을 만들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우리에게 유일한 보호자가 되어주자 거꾸로 다짐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기억의 왈츠>의 경우 전반적인 서사보다는 특정 문장이 마음에 꽂혔는데 예컨대 이런 문장이다. ”그건 아마 당시에 내가 가지고 있던 어두운 정념과 그럼에도 불구하도 스물네 살의 삶이 품을 수밖에 없던 경쾌한 반짝임 사이에서 빚어진 어떤 비틀림 같은 것.“(p.218) “”내가 원한 건 무엇이었을까. 어처구니 없는 걸 요구해서 상대를 끝내 시험에 들게 해 그걸 얻어내고 말겠다는, 결국 이겨먹고 말겠다는 그 악착한 마음은 어디서 왔을까.”(p.232) 유난히도 뜨겁게 못난 그 시절, 돌이키고 싶지 않은 그 시절을 꾸역꾸역 반추한 끝에 화자가 맞닥뜨린 것이 후회나 죄스러운 마음, 성장했다는 감각이 아니라 좋았다. 애써 따스이 봉합하는 것이 아닌, 이제야 긴 도망이 끝났다 자각하는 점이 좋았다. ‘지나쳐왔다’가 아닌 ‘지나고 있다‘의 선언이니까. 이어지는 삶의 포착이니까. <무구>는 특히 이 부분이 좋았다. “하지만 소미는 가끔 가벼운 흥분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만약 현수가 찾아온다면? 그래서 약속한 대로 땅값의 반을 내겠다고 한다면? 그러니 자기에게 땅의 반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그러면 자신은 선뜻 그렇게 할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소미는 마음속으로 발끈했다. 그러려면 그때 너는 빈말로라도 손해의 반을 책임지겠다고 했어야 했어. 내 곁애서 나와 함께 두려움을 이겨냈어야 했어.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비열하게 도망쳤지. 전적으로 나한테 손해를 덮어씌워놓고, 나를 그렇게 오랫동안 불안과 고독 속에 남겨놓고 넌 잠적해버렸지.”(p.144) 가장 거대한 현실, 재물로 지독하게 얽매인 와중에도 그토록 바랐던 것이 우리가 이 불안과 두려움을 함께 나누는 것이었다는 점이 이 소설을 진한 사랑-서사로 만든다. 네가 원망스러운 것은 네가 나를 이용해, 나에게 사기를 쳤기 때문이 아니라 네가 없는 시간 속에서 나 홀로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 때문이라고. 여전히 나는 네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나기를 바란다고. 서사에 어울리는 참 악착같은 고백이다. <사슴벌레식 문답>은 구성적으로는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세월과 불가해를 타고 흐르는, 보다 더 미시적인 부분에 천착한 이야기였으면 좋았을 테다. (작중에 언급되는 ’사슴벌레식 문답‘이 조사 하나 더 붙이는, 아주 간단한 비틀기를 이용한 플롯이었기 때문에 그러하다.) 사람은, ’든‘의 변화는 사상이나 신념 같은 거창한 것 없이도 찾아드니까. 그럼에도 ’사슴벌레식 문답‘이라는 하나의 요소만으로도 이 소설을 사랑할 이유는 충분하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은 무엇으로든 살아” “너는 왜 연극이 하고 싶어.” “나는 왜든 연극이 하고 싶어.“(p.21~22) ‘든’은 가장 강력한 긍정이자 대꾸하지 않겠다는 차가운 방어이자 막막한 절망이다. 단 한 글자에서 이 모든 것을 길어올리는 작가, 어떻게 감탄하지 않을 수 있나. * 작가의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소설집이었다. 담담 초연해진 듯해 조금은 슬펐고, 개인적으로 아직은 감정적으로 널뛰는 이야기에 마음이 동하는구나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